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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권이 바뀌고 사회적인 일에 대한 글을 줄였다. 사회적인 문제가 줄어서는 아니다. 나 아니어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난 정권에서는 나 같은 필부도 나라 걱정하게 만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허접함이 기레기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살아가기 위해 당연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이야기해야 했다. 요즘에는 언론과 각종 이익단체가 권력에 대해 선택적 투쟁도 한다. 보복이 두려운 상대에겐 입을 닫고 조용히 지내던 사람들이 시끄러워진 걸 보면 세상이 그래도 조금은 좋아졌다.

 

살기 위해 주변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수신제가도 아직 멀었지 싶었다. 불혹이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린다. 옳은 삶을 살고 싶지만, 그런대로 사는 삶을 변명하고픈 마음도 있다. 태생적으로 내재된 결함은 아쉽지만 인정했다. 나는 작고 약한 사람이다. 국민연금 공단을 찾아갔다. 반납금과 아내의 국민연금 미납금 중 12개월분을 납부했다. 무리 되지 않을 정도로 하면 십 년 이내에 완납이 가능할 것 같다.

 

아내의 국민연금을 완납하고 나면 경제활동을 줄일 계획이었다. 지금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아이들도 다 자랐다. 그 정도 기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비상시를 대비한 자금도 모일 듯하다. 그즈음이 되면 좀 더 자연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겠거니 하는 구체적이지 않은 기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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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kbs 다큐 프로인 '나무야 나무야 - 홍천 은행나무숲' 편을 보고 막연한 계획이 조금 단단해졌다. 기억에 있는 숲이었다. 1996년의 기억 속에서 은행나무는 좀 더 작았다. 어른 팔목만 한 굵기의 밑동을 가진, 아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였다. 은행나무숲을 가꾼 주인 남자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은행나무숲은 몸이 안 좋은 아내를 위해 마련한 남자의 결정체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 부분이 기억과 달랐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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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간첩 활동을 위해 남파된 북한 잠수정이 강릉에서 좌초되었다. 26명의 북한군 중 11명이 강릉에서 두부에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산악지형으로 월북하기 위해서 관련 훈련을 받지 않은 승조원을 처형한 것이다. 한 명은 식량을 구하러 민가에 와서 일부러 수상한 짓을 한 뒤에 신고 전화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특작부대원이 빈약한 무장의 경찰에게 제압당한 걸 보고 생존본능을 따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 14명이 문제였다. 첫날 헬기 레펠을 하던 특전사 부대원이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헬멧을 관통당했다는 말도 있고, 헬멧이 가리지 못하는 후두부를 맞췄다는 말도 있었다. 사격 실력이 가늠되었다. 강원도에서 철책을 지키는 부대 말고는 거의 작전에 투입되었다. 우리 부대도 첫날부터 강릉으로 이동했다.

 

병사들은 작전명령대로 장기판의 말처럼 사용된다. 첫날은 강릉의 해안가에 매복을 시켰다. 모래사장을 파고 해안을 경계하는 건지 산에서 다시 바다로 오는 북한 무장공비를 경계하는 건지 가늠하지 못했다. 양방향으로 경계를 했다. 수색 및 매복이 이어졌다. 오랜 입산 금지로 잡목이 우거진 숲은 이동이 불편했다. 작두날만 떼어놓은 것 같은 군용 정글도를 지급받았다. 군장을 메고 정글도를 들고 경사가 가파른 산을 오르는 일은 더 불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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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수시로 이동해서 매복하거나 수색을 했다. 무장공비가 사살되거나 아군 병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초반의 매복에 노루나 멧돼지의 움직임에 사격이 가해지고 조명탄이 떴다. 작전 섹터가 겹친 곳에서 오인사격 이야기도 들렸다. 실탄사격 통제 명령이 내려왔다. 거동이 수상한 사람에게 암구호를 확인하던 병사가 총에 맞아 죽었다. 다시 작전 구역별로 강화된 사격 명령이 내려왔다. 입산 통제에 따르지 않은 민간인이 송이버섯을 따러 산에 들어왔다. 군인을 만나고 당황해서 도망을 쳤다. 사격을 받고 민간인이 죽었다. 다시 사격을 통제하는 명령이 내려왔다.

 

손발톱을 깎고 유서를 적었다. 한동안 제보되던 공비들의 이동이 감지되지 않았다. 군은 포위망을 넓게 펼쳤다. 우리 부대는 오대산 자락으로 이동했다. 몇 번의 이동 후에 아직 어린 은행나무들이 자라는 산비탈 아래 계곡에 자리를 잡았다. 땅을 파고 돌로 호를 쌓았다. 호끼리는 신호용 끈으로 연결되었다. 호 주변은 자갈로 작은 돌탑들을 쌓고 맨 윗돌을 낚싯줄로 묶어서 연결했다. 건들면 경계음이 나도록 조치했다.

 

다음날부터 밤이면 매복, 낮이면 주변 수색을 나서야 했다. 그때 은행나무밭을 가꾸던 아저씨를 만났다. 가족분들은 서울에 있다고 했다. 은행나무는 열매를 생각하고 심었단다. 제약회사 직원들이 은행잎을 계약하자는 말을 했지만, 은행잎 채취 과정에서 나무가 상할 것을 우려해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집은 돌을 옮겨다가 직접 지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아내분은 서울을 떠날 맘이 없어서 자신만 오가며 나무를 가꾸는 중이라고 했다. 넓은 땅과 생계에 메이지 않는 삶이 부러웠다. 다큐는 시청자들의 감성 충족을 위해 노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는 약간의 조미료가 첨가되어 있었다. 방송도 상품이다. 진실이 필요한 고객도 있고 위로가 필요한 고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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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가꾸지는 못해도 게으른 농부로, 작은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출연자들과 비슷한 정도의 삶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걸 아내에게 강요하거나 요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살다 보면 자연스레 윤곽이 잡힐 것이다. 이런 소소하고 개인적인 삶에 충실하기로 했다. 바른말 하는 사람들도 많고, 잘난 사람들도 많고, 목소리 큰 사람들도 많으니까 이 정도 삶은 괜찮을 것 같다. 아내가 도시가 주는 편리를 버리고 따라 줄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막연한 계획이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옥상에 화분 가꾸는 정도로 만족한다.

 

 

 

3.

 

쌍용차 해고자의 자살 뉴스를 접했다.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소식이 끊긴 파카한일유압 사람들이라고 다들 잘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인터넷 뉴스의 댓글을 읽어 보았다. 죽음은 안타까워한다지만 죽음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적었다. 최저임금에 허덕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대기업 공장 노동자의 실패에 위로해 줄 여력조차 없어 보였다. 나조차도 그의 죽음에 온전히 공감하기는 힘들다.

 

그에게 남았을 트라우마와 거쳐야 했던 수많은 재판, 지속되는 손배소송을 생각해도 말이다. 자살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족들에게 남을 상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당사자가 느꼈을 고통을 일부러 외면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이 그쪽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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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서비스노조 지부장 염호석 씨의 죽음 뒷이야기도 아팠다. 아내가 TV에서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화를 냈다. 그의 아버지가 자식의 시신을 팔았다. 자식 목숨값으로 6억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세상에 꽤 있다. 천안함 유족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어린 자녀를 버렸던 어머니가 나타나 목숨값을 수령해 갔다.

 

세월호 참사에서 유가족들에게 빈정거리던 사람들 속마음에 일정 부분 그런 것이 깔려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가족에게 인정과 위안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인격체로 대우해 준 조직에 애착을 느낀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옷을 벗고 남자는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건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다.

 

타인에게 선을 강요하는 것도 독선이다. 원하지 않는 충고는 때론 폭력이다. 자신이 원하는 선을 이루는 방법은 자신이 선을 행하는 것뿐이다. 막다른 구석으로 내몰렸다고 느낀 사람이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에 어줍지 않은 해석을 달고 싶지는 않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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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은 단정 짓기 어려운 이야기다. 자본은 여전히 강자고 노동은 상대적 약자의 지위에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은 상대적 약자를 응원하는 본능이 있다. 강자의 권리독점은 사회를 무너뜨리고 무너진 사회는 구성원들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현실은 상대적 약자의 지위에 있는 양대 노총이 상대적 약자로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자본과 언론과 권력의 효과적인 대응전략도 있지만 양대 노총이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에게 하는 처신이 공감을 얻기 힘들게도 한다.

 

선량한 신앙인들이 모인 종교 집단은 대부분 대규모 살육을 일으킨 역사를 갖고 있다. 종교가 발원할 때 약자의 입장에서는 순교자를 내고 핍박을 받다가, 강성해진 시기에는 군림하고 소수를 박해했다. 인간이 구성한 집단 중 가장 순수하게 선을 추구하는 종교 집단에서 벌어진 실제의 역사다. 그 변화가 사회변혁을 일으켜 왔다. 이익 집단은 상황 변화에 조금 더 유연하긴 하다. 노동자 집단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추구한다. 이익 집단이지만 공유하는 가치에 종교적인 성격이 섞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다. 역사는 진자운동처럼 반복된다. 약자의 울분을 품고 일어선 이들이 주도권을 잡고 나면 다른 약자를 핍박한다. 핍박하는 강자에 맞서기 위한 약자는 필연적으로 연대를 선택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권력을 오래 쥐고 있다는 것은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약자의 연대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권력은 무너지고 자리의 주인은 바뀌게 된다. 노동자를 대변하는 집단이 암묵적인 계급 사회에서 확장성이 없다. 외부적인 요인보다 내부적인 문제가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