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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1920년대가 끝이 날 무렵. 전 세계는 충격과 공포에 빠져들게 된다. 바로 ‘대공황’이다. 유래 없는 경제 대참사 앞에 모든 국가들은 저마다의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우리가 잘 알듯이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파시즘이라는 정치 체제를 선택해 제2차 세계대전의 단초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됐을까? 사실 1920~30년대 일본 매매춘 시장의 폭발과 뒤이은 전쟁매춘의 시작은 대공황 이전에 그 ‘싹’을 틔우고 있었다.

 

시작은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었다. 리히터 규모로 진도 8.4를 기록한 이 대지진 앞에 도쿄, 요코하마는 물론 치바현, 가나가와 현, 시즈오카 현에서 14만 2천명이 사망했고, 3만 7천명이 실종됐다.

 

...여기까지는 안타까운 인명 피해라고,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라고 눈물을 삼켜야 할 대목이다(이 당시 일본 사회는 패닉 상태에 빠졌고, 그 결과 박열 열사를 끌고 와 대역사건을 조작해 여론의 시선을 돌리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바로 경제적 손실이다. 이 지진 한 번으로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파괴되고, 또 그만큼의 건물이 반파됐다. 이를 복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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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대출이 이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대출은 부실화됐고, 부실채권들은 은행을 갉아 먹게 됐다. 대공황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27년 일본 은행가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흉흉한 소문은 곧 사실로 판명된다.

 

이 당시 일본은 식민지로 삼은 대만에서 활동하는 일본 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해 대만은행을 설립했는데, 이 대만은행의 주요 고객 중 하나였던 스즈키 상점이 1927년 파산을 선언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대만은행에 돈을 맡겼던 고객들이 은행으로 몰려가 예금을 인출하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운다. 대만은행은 문을 닫았고, 불안은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은행으로 달려갔고, 예금주들의 대규모 인출사태. 이른바 뱅크런(bank run)이 일어난다.

 

1927년 4월부터 5월까지 수십 개의 은행이 지급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이 덕분에 일본 재벌들은 그 영향력을 더욱더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29년 10월 29일 대공황이 시작됐다.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폭풍은 일본 본토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쌀과 보리 같은 곡물 가격이 43% 폭락했고, 곡물가의 폭락은 일본 농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놨다. 지주들은 소작농에게 경작시키느니 스스로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했고,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소작쟁의에 나서게 된다.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소규모 영세상인들은 폐업의 길을 걸었고, 도시 임금노동자들은 임금 인하와 실업률에 신음하게 된다.

 

“항산항심(恒産恒心)”

 

『맹자』에 나온 말이다. 먹을 것이 있어야 도덕과 윤리가 나온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인(仁)과 예(禮)를 찾을 정신이 있겠는가? 일본이 그랬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윤리는 발에 채이고 있었다. 변화? 격변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주의의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경제위기는 일본인들에게 각성을 가져왔다. 바로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였다. 일본인들의 사회의식은 높아졌고,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욕망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발맞춰 여성들의 ‘자유의지’도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그 조짐은 1920년대에 보이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모던 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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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고, 곧 사회에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들의 호전적인 모습은 일본 사회에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충격은 더 큰 울림 앞에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사회로 나왔다.

 

수많은 카페와 댄스홀이 등장했고, 이 카페에서는 공공연한 성매매가 이루어졌다. 사창(私娼)이 등장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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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이렇게 변화의 물결에 흔들리고 있을 때 식민지 조선은 어떠했을까? 그 변화는 일본보다 더 컸다. 식민지 이전에 산업이라곤 1차 산업인 농업이 전부였던 조선이 어느새 2차 산업을 넘어 3차 산업의 시스템까지 맛보게 됐다. 이제 사회는 여성의 몸과 애교를 무기로 한 상품 판매전략이 일상화 됐고, 새로운 ‘여성 직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숖걸(점원), 데파트걸, 바걸, 헬러걸(전화교환수), 티켓걸, 웨이트리스 등등 수많은 ‘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발맞춰 카페와 다방도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카페와 다방을 단순하게 커피와 음료를 마시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늘날의 티켓다방을 생각하면 된다. 이 곳에선 성매매가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이 시기 성매매 산업이 폭발하게 된 이유가 뭘까? 크게 3가지 정도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경제위기에 의한 여성들의 도시 진출

둘째, 경제위기에 의한 수요의 폭증

셋째, 에로, 그로, 넌센스로 대표되는 사회 분위기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여성들의 일자리다. 곡물가의 하락으로 인해 농촌경제는 붕괴하게 됐고, 시골에 있던 여성들이 도시로 올라오게 됐다. 도시 노동자의 삶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때 여성들이 가장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이 당시 여성들에게 성매매만큼 확실한 직업이 없었다. 만약 밑천이 있다면, 3~4년 기생학교를 다닌 후 고급 창녀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이미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졌고, 먹고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던 게 당시 사회 분위기였다.

 

수요의 확대도 생각해 봐야 한다. 경제위기 덕분에 남성들은 결혼을 뒤로 미루게 됐고, 이들의 성욕은 ‘프로’에게 맡기게 됐다. 그 결과 성매매 수요는 폭증하게 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사회 분위기도 있다. 에로(에로티시즘), 그로(그로테스크), 넌센스로 대표되는 1930년대. 비현실적 상황 속에서 향락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넌센스로 대표되는 냉소주의로 스스로를 비하하며 한 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당시 사회 분위기가 채만식과 이상과 같은 이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현실에 저항할 수 없었던 이들은 몸을 향락에 맡기고, 머리를 냉소주의로 물들여 하루하루를 버텼던 거다.

 

아마 이 시기가 한반도에 사람이 거주한 이래로 향락산업이 가장 번창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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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명동

이미지 출처 - 링크

 

이렇게 성매매가 폭증하자 사회 곳곳에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문제가 사창(私娼)의 번성이다. 이는 일본 본토도 마찬가지다. 1929년 당시 매춘여성으로 등록된 여성들의 숫자보다 카페 여급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당시 경찰에 등록된 매춘여성의 숫자는 50,000명이었다). 이 숫자는 1936년이 되면 111,000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카페에서는 술과 커피만 파는 게 아니었다.

 

조선도 같은 상황이었다. 1936년 기준으로 예기(預妓)의 숫자는 6,983명이었으나(전년보다 922명 증가했다), 카페와 바에 소속된 여급의 숫자는 4,060명이나 됐다. 등장한 지 얼마 안 된 카페의 여급 숫자가 어느새 기생을 위협할 정도가 됐다(이 기록은 당시 동아일보의 취재결과이다).

 

이렇듯 성매매 여성들이 폭발하자 이에 대한 사회 각계각층의 불만의 목소리가 퍼져 나왔다.

 

“주택가 한 가운데 집창촌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교육환경, 생활환경을 위해서도 집창촌을 없애야 한다.”

 

“공급이 수요를 자극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늘어난 매춘녀들이 성매매에 관심 없는 남성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일본 본토의 경우에는 공창제의 역사가 깊어 이를 당연시 하고 있지만, 식민지 조선의 경우에는 공창제의 역사가 짧다. 지금 폐창을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집창촌에 대한 이전요구는 요시와라의 그것과 같다. 처음 유곽을 만들었을 당시에는 개발이 덜 된 외곽이었지만, 점점 도시의 규모가 커지면서 어느새 유곽 주변이 중심가가 되는 경우. 그 경우가 재현된 거다. 여기에 더해 매매춘 여성들이 직접 호객하는 행위가 더해지면서 일반 시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게 공창제 폐지와 집창촌의 철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성병 관리차원에서도 공창제를 없앨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더 큰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성매매 자체를 없앴다간 여기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생계가 문제가 됐다. 대공황과 이어지는 경제위기로 인해 몸을 팔기 시작한 여성들인데, 만약 매매춘까지 금지시켰다간 이들의 생활이 불안정하게 된다는 논리가 등장한다(어디서 많이 들어 본 논리다).

 

어쨌든 총독부는 공창제 폐지나 집창촌 철거 주장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눈을 감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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