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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마루치 날아라 아라치. 마루치 아라치 마루치 아라치 야! 태권 동자 마루치 승리의 주먹에 파란 해골 13호 납작코가 되었네."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국산 애니메이션 <마루치 아라치>의 주제가다. 1974년 공전의 히트를 친 라디오 드라마가 1977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젊은 날의 장미희가 등장하는 <겨울 여자>가 히트를 치고 이승현의 <고교 얄개>가 관객몰이를 하던 해였는데, 여러 한국 영화 가운데 흥행 3위(16만 명)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그 16만 명 중에는 물론 나도 끼어 있었다). 온 동네 아이들이 태권도복을 입고 동네를 누비며, "마룻! 아랏!"이라고 쩌렁쩌렁 외치며 몸을 날리던 시절.

 

당시 슈퍼맨이나 원더우먼 등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특수효과를 현실로 착각한 어린아이들이 이층집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마루치 아라치 때문에 사고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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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 대문 위의 장독대에서 나랑 동갑내기 녀석과 그 형이 마룻! 아랏!을 외치며 뛰어내렸다가 나란히 오른쪽,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녀석들은 좁은 골목을 이에 둔 맞은편 집 대문 위 장독대까지 뛰어 건널 심산이었다. 이단 옆차기를 날리면서. 그러나 이단 옆차기의 자세를 취한 채 자유낙하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다른 동네도 비슷했겠지만 우리 동네에는 널따란 정원과 풀장(시멘트로 막아 만든 물놀이장 정도지만)이 있는 이층 양옥집과 아기 돼지 3형제에 등장하는 늑대라도 나와서 훅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판잣집이 공존하고 있었다.

 

저택의 동훈이 동원이 형제가 나오면 온갖 신기한 장난감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비닐같이 잘 찢어지는 축구공 말고, 물 먹어도 깔끔하고 슛할 때 촉감도 좋은 가죽공도 걔들 덕에 차 봤다. 녀석들이 가지고 나왔던 ‘독일군 총’이 얼마나 미치도록 갖고 싶었던지 어린 마음에 아버지 출근하시는 길을 막아도 봤었다.

 

바로 그 집 앞에서 30미터만 내려가면 판잣집이 있었고 당시 유행했던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만큼이나 불쌍한 녀석이 살았다. 이름은 기호였던 것 같다. 심각한 알콜중독인 아버지와 둘이 살았는데, 이 아버지라는 사람, 무척이나 폭력적이었다. 술 먹으면 기호를 두들겨 패는 것은 동네에 소문나 있었거니와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학교 일찍 파하고 신나서 동네로 돌아오는데 험상궂은 표정의 아저씨가 나를 포함한 동네 아이들 앞을 막았다. “이 새끼가? 이 새끼가?” 아들에게 하나하나 지목하며 뭔가를 물었다. 기호는 울면서 아니라고 했다. 나도 지목을 당했는데 기호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기호가 동네에서 놀다가 누구에겐가 맞고 들어왔고 토요일 오전부터 술 취해 자빠져 있던 아버지가 그 멱살을 잡고 때린 놈을 잡으러 나온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저 아버지한테 걸렸으니 때린 놈도 무사하지 않겠다 싶었는데 막상 범인(?)을 잡고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버지란 사람은 물러섰고 아들을 개싸움 붙이듯 내몰았던 것이다.

 

“결투를 하라는 기다. 이 자슥아. 사나이가 맞고 우째 사노.”

 

기호 아버지의 서슬에 기가 질린 상대 아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기호도 울고 있었지만 기호 아버지는 연신 뺨을 때리며 “덤비라!”고 고함을 질렀다. 기호가 결국 달려들었고 ‘결투’가 시작됐지만 그게 어디 결투인가. 아버지의 코치(?)를 받으며 ‘라이트 훅, 레프트 훅’을 휘두르는 기호에게 상대방 아이가 적당히 맞는 것으로 끝났다. 지나가던 동네 어른이 싸움을 말리고 아버지를 타일러 보낸 게 다행이었다.

 

아버지에게 끌려가는 기호에게 아이들이 따라가며 물었다.

 

“기호야, 와 싸웠는데?”

 

기호는 누구랑 싸울 아이가 아니었다. 병약하고 깡말라서 주먹을 내세울 처지도 아니었고, 괴롭힘을 당하면 힘없이 피해 집에 가면 갔지 대들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싸움을 했고 두들겨 맞았다니.

 

그때 기호가 울부짖었다.

 

“개새끼들아. 느그도 내보고 파란 해골이라 부르지 마라. 내 해골 아이다. 해골 바가지 아이다. 또 파란 해골 13호라 카마 칼로 찔러 죽이뿔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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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했듯 녀석은 무척 말랐고 얼굴에도 살이라고는 없었다. 광대뼈는 산처럼 솟았고 눈은 골짜기처럼 깊이 패었다. 게다가 턱은 좁고 입술은 얇아 이가 다 드러나 보였기에 그의 별명은 영화 <마루치 아라치>의 악당 '파란 해골 13호'였다. 줄여서 ‘해골’, 아니면 ‘13호’.

 

평소 녀석이 우물쭈물 작달막한 소리로 ‘하지 마라’고 했지만 애들이 어디 그런가.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면 더 골리려 드는 게 악동들의 기질. 노다지 ‘해골아 놀자’였고 ‘해골아 어디 가노’였고 ‘13호 니 까불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의 한 녀석이 어디서 장난감 해골을 들고 와서는 '네 형님 왔다' 등으로 까불다가 기호의 한 맺힌 스트레이트를 맞았던 것이다. 물론 녀석은 가차 없이 응징했는데 하필 그날 기호 집에 술 취한 기호 아버지가 소주를 마시고 있었고, 아버지는 "맞았으면 때린 놈을 죽여 버려야지!"하며 아들을 몰고 나갔던 것이다. 나중에 기호랑 싸운 녀석도 그렇게 얘기했다.

 

“기호 아부지도 무섭긴 했는데 기호 표정이 진짜 무섭더라. 그래서 그냥 맞았다.”

 

어느 날 기호가 병원에 실려가는 사고가 생겼다. 배가 고파서 집에 있던 약통의 약을 털어 넣었다고 했다. 집에서 먹을 거라고는 나라에서 준 구충제 약병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배가 고파서, 정말로 배가 고파서 아버지 없는 일요일에 구충제를 털어 넣었던 것이다. 무슨 탈이 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며칠 뒤 더 퀭해진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 낯빛은 새파랬다. 어떤 꼬마들이 키들거렸다. “진짜 파란 해골이다.” 그러자 좀 머리 큰 형이 대뜸 군밤을 날렸다. “시끄럽다. 그라지 마라.” 잠시 후 동네 평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기호에게 한 아주머니가 다가섰다.

 

“기호야. 배고프면 우리 집에 온나. 꼭! 알았재?”

 

그때 기호는 울음을 터뜨렸다. 덩달아 지켜보는 나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서러운 울음이었다. 아주머니도 눈물을 흘렸다. 어느 집 아주머니인가 자세히 봤더니 기호에게 해골 가지고 장난치다가 쌈박질을 했고 흥건히 두들겨 팬 뒤 아버지와 함께 나타난 기호에게 당했던 녀석의 어머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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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옛일을 떠올린 것은 <마루치 아루치>의 감독 임정규 님의 별세 소식 때문이다. <전자 인간 337>, <별나라 삼총사>, <소년 007 은하 특공대> 등 추억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한 분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 부음 덕분에 까마득하게 매장돼 있던 유년의 기억 하나가 생생하게 솟았다.

 

해골이 기호... 동갑이었으니까 이제 녀석도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돼 고달픈 중년의 삶을 경험하고 있으리라. 혹시 팔자가 좋았으면 당시 그 집 앞에 있던 으리으리한 저택 같은 곳에서 인생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고.

 

고 임정규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추억의 한 자락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