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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가야고분군추진단

 

가야사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로 선정된 이후, 다양한 발굴 성과가 쏟아져 나왔다. 일개 역덕인 필자가 보기에도 기대 이상이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이 성과를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기사를 찾기 어렵다. 표창장 때문에 바빠서 그런지,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다.

 

물론 문화재 발굴 성과를 정리하기가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건 인정한다. 유적의 역사적 의미를 상세히 연구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연구를 해놓아도 다른 사료가 발굴되면 손쉽게 뒤집히기도 하고. 가뜩이나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없다. 다른 언론에서 안 하니까 나라도 해볼까 한다.

 

필자는 일개 역덕 나부랭이이므로, 각각의 유적에 대해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까진 역량이 닿지 못한다. 그런 일은 녹봉을 드시는 연구소 선생님들이 잘 해주실 것이니, 나는 18~19년도에 쏟아진 가야사 발굴 소식을 정리하고, 간단하게 조망해보려 한다.

 

 

1. 가락국(금관가야) – 경남 김해

 

전기 가야연맹의 핵인싸 가락국의 유적 발굴은 무려 1907년부터 최근까지 진행되어 왔다. 100 동안이나 파도 파도 끝없이 나오는 유적처럼 보이지만, 5 넘게 지속하여 동네이니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미 가야를 대표하는 대성동과 봉황동 유적이 있지만, 최근의 발굴에서  디테일한 성과가 나왔다. 수로왕이 허황후의 도래를 처음 관측한 곳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망산도, 가야 후기 고분의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자 고분 밀집 지역인 원지리 고분군, 봉황동 마을만큼의 스케일을 가진 유하동 주거지, 그리고 봉황동 추가 발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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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발굴된 봉황동 모양 토기

출처 - <경향신문>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양 토기이다. 봉황동 고분에선 새로운 형태의 모양 토기가 나왔다. 삼국시대의 현존 건축물이 1개도 없는 상황에서 모양 토기는 당시의 주거문화를 살펴볼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인데, 20 점밖에 없다. 가야의 모양은 크게 고상 가옥과 수혈식 주거지(땅을 조금 파고 임시로 가옥을 올렸다가 철거하는 ) 나뉜다. 특히, 수혈식 집은 중국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이었다. 그런데 봉황동 유적에서 추가로 발견된 토기는 벽이 지면과 붙어 있고, 앞에는 삿갓형인데 뒤는 원형인 굉장히 특이한 형태라 눈에 띈다. 만들기도 어려워 보이는데 굳이 이런 집을 만들었을까.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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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 토기에 따라 가야인의 집구석을 복원해 놓은 봉황동 유적

출처 - <오마이뉴스>

 

누구는 고상 가옥에 살고, 누구는 수혈주거지에 살며, 누구는 새로 발굴된 무덤 같은 집에 살았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살았을까? 힌트가 새로이 발굴된 김해 유하리 유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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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동 주거 유적

출처 - <연합뉴스>

 

유하리 주거 지역의 좌우엔 생활 쓰레기장인 패총과 함께 발굴됐다. 특히, 고상 건물지가 있는 중앙부는 지대도 높고 규모도 크며 전망도 좋다. , 끗발 날리는 사람들이 살았을 만한 곳이다. 같은 초가집처럼 보이지만, 나름 고상 가옥은 고급 아파트였던 같다. 반면 수혈주거지나 무덤 같은 집은 평민, 혹은 특수 직업군이 살던 집이 아니었을까.

 

한편, 유하동 유적에서는 다른 흥미로운 유물이 나왔다. 골각기(骨角器), 동물의 뼈를 야무지게 깎아 만든 사냥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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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리 유적에서 출토된 골각기

출처 - <국제신문>

 

아무리 철이 넘쳐나는 지역이라지만, 옛말에도 잡는데 소 잡는 이란 말도 있지 않든가. 화폐와도 다름없는 철을 동물 잡는 쓰기엔 아깝기도 하고 비싸기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동물의 뼈를 가공하여 사냥도구를 만들었다. 특히, 유하리 유적의 골각기는 완성도가 굉장히 높아, 근처에 전문 제작소가 있었던 아니냐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름에는 소거하고 겨울에는 혈처한다(夏則巢居冬則穴處)"

- <진서(晉書)> <동이 (東夷傳) 변진(弁辰)조>

 

위의 유물, 유적과 사료를 종합해보면, 가야인 마을의 모습을 대충 상상할 있다. 고상 가옥에서 나와 동네를 순시하시는 높으신 양반, 겨울이 오기 전에 분주히 짓고 지붕 올리는 사람들, 한쪽에선 동물 뼈로 열심히 사냥도구를 만들고, 도구를 이용해 열심히 산으로 바다로 뛰어다니는 사람들. 이윽고 저녁 때엔 해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짓는 연기가 솔솔 올라왔을 것이다. 때로는 상상이 실체를 확인하는 것보다 즐거울 때가 있다.

 

 

2. 안라국(아라가야) – 경남 함안, 창원

 

아라가야 문화권은 이번 프로젝트에서 대박을 곳이다. 후기 가야연맹의 외교를 담당하면서 국력이 성장하는 사료에서의 모습처럼, 유적의 연대도 아주 자연스럽게 쫓아가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후로 100 만에 발굴된 말이산 고분군은 최상위 계층의 무덤으로 아라가야의 특징이 에센스로 담겨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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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가야읍 가야리에서 발굴된 아라가야 왕궁(王宮) 왕성(王城) 추정지

 

그중에서도 초대박은 바로 아라가야 왕궁과 왕성 추정지 발굴이다. 왕궁은 터만 남아서 모습을 추측하기 어렵지만, 왕성은 규모나 축조 공법을 통해 국력을 추측할 있다. 아라가야의 왕성 유적은 토성으로, 높이 8.5m 상부 너비 20~40m 규모로 판축 공법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삼국시대 다수의 성이 토성이거나, 거의 토성인데 겉면만 돌로 쌓은 형식이었다. 어쨌든, 왕성의 규모로 삼국시대 전체 사이즈로 보면 평범한 편이지만, 같은 시기 가야의 권역으로 보면 최대급이다. 시기, 이미 가야 소국들과 백제, 신라와의 국력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시겠다.

 

축조 시기는 5세기 중반 ~ 6세기 중반이다. 점이 흥미로운데, 전편에서 언급했던 대로 시기에 아랴가야는 국제회의를 주도하면서 왕성이라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고, 말이산 고분군까지 지으며 열심히 테크를 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제야 나라다운 나라의 모습이 갖춰지는 시점에서 거대한 시대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망국행 급행열차를 것이라고도 있다. 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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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얘기를 조금만 해보자면, 함안에선 가야권 최초의 산성 유적으로 추정되는 안곡산성도 발굴됐다. 둘레 1km, 높이 6m 성은 깬 돌과 진흙을 뭉쳐서 성곽 안을 채우는 기상천외한 공법을 썼다. 이러한 사례는 삼국 어디에서도 확인할 없다. 그래서 성을 가야의 산성으로추정 수밖에 없다. 표본이 없고 갑자기 떨어진 듯한 양식이기 때문에, 진짜로 가야인이 쌓은 성이 맞는지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차후 연구성과를 기다려야 얘기가 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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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법수면 우거리 대규모 가마터

출처 - <연합뉴스>

 

한편, 대규모 가마터도 발굴됐다. 가마터는 다른 형태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지지고 볶고 떠드는 ,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먹고 살기 위해선 식기가 필요하다. 삼국시대의 식기는 토기였다. 그러니까, 삼국시대의 가마는 우리 시대의 다이소, 아니, 이상의 의미를 가진 생필품 공급 공간이었다.

 

이미 함안 법수면에선 토기 가마터 13곳을 확인했었는데, 이번 발굴에선 가장 규모의 계단식 가마터가 발굴됐다. 아무래도 졸라 항아리만 전문적으로 굽는 곳이 아니었나 싶다. , 가마의 규모에 따라 구워내는 토기의 종류도 달랐다는 점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유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고고학이 일이다.

 

조금 나아가 본다면, 가야의 유적에서 확인할 있는 모습은 특성화된 산업단지를 육성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자연조건으로 인해 출발했던 생산지, 토기 생산지, 작은 항구 등이 국가의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철기 산업 지대, 토기 산업 지대, 국제무역 지구 등으로 확장되어 것이다. 자연히 먹고 살기 조금 유리한 지역으로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니, 마을은 점점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사람이 먹고사는 모습, 도시가 확장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한편, 말이산 고분군에선 하나의 중요한 유물이 나왔다. 모양의 모습을 토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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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귀엽다

출처 - <매일경제>

 

낙랑, 일본, 백제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가야 사람들은 이런 모습의 배를 타고 남해와 서해, 그리고 동해를 누볐다. 실제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안엔 무엇이 담겨 있는지, 배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조종은 어떤 형식으로 하는지는 완벽하게 없다. , 아주 단편적인 증거들을 오리고 조리고 모이고 붙여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항해에서 천문 관측이 얼마나 중요한지 익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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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산 고분 내부에서 발견된 별자리 구멍(성혈)

출처 - <한겨레>

 

고구려 고분군의 별자리 벽화처럼 화려하지 않으나, 가야인들이 무덤에 새겨 넣었던 별자리 구멍과 위의 모양 토기는가야인의 항해술 그려나가는 좋은 증거가 되어준다. 물론, 이유가 있어서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은 아니다만, 항해하는 사람은 이유 있게 보지 않겠는가. 이렇게 새로운 증거들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삶은 조금씩 진해져 간다.

 

 

3. 가야-백제 접경지역 (장수, 남원, 무주, 완주 )

 

호남 동부 지역, 특히 전북 지역의 가야는 일본과의 무역이 축소되자 새로운 판로를 위해 대백제 무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성장했음을 앞서 밝힌 있다. 그러나 문헌 사료가 절망적으로 없어서 전적으로 고고학에 의지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백제, 혹은 대가야의 필요에 의해 설치되고 확장된 전략 지역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과 지배층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세력을 끝없이 저울질했을 것이다. 심지어, 가야 너머 신라까지도 중요한 옵션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지역의 유물, 유적 특징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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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특히, 국경이라는 경계 지역의 특성이 드러나는 유적 또한 그들의 삶을 짐작해볼 있는 좋은 수단이다. 대백제 최전선 가야국인 전북 완주 지역의 반파국은 이러한 봉수를 세웠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진돗개나 데프콘을 발령하는 봉수는 사실 지금까지 남아있기가 힘들다. 방어용 초소의 개념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반파국은 봉수를 석축으로 쌓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비 회의에서의 모습처럼, 비록 중요한 거래처였지만 갑질을 마다하지 않는 백제의 존재는 가야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2018년에 진행된 완주 지역의 지표 유적조사 결과 봉수 8, 산성 9, 제철유적 31 등이 발굴된 것을 , 가야에 있어 전북 동부 지역은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라는 말에 적합한 곳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요충지가 양쪽으로 있어서 양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안습한 스타팅 포인트였지만.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러한 봉수 라인이 가야의 중심 , 대가야나 아라가야 방면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 자락을 따라 장수방면으로 남하하고 있다. 이후의 라인은 앞으로 상당히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전북 동부 지역의 가야는 일종의 운명공동체적 성격을 띠었다고 봐도 좋을 같다. 순망치한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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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가 남하한 장수군의 가야의 모습은 어땠을까. 장수군 삼고리 고분군에서는 사진과 같은 금제 귀고리가 출토됐다. 이는 백두대간 서쪽 지역(, 전북 이남 지역)에선 처음 출토되는 것이다. 다른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대가야, 소가야, 신라계, 재지계(지역 토착민 세력)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문화의 도가니처럼 다양한 양식이 백두대간을 넘어 지역까지 흘러들어온 것은 반대로 지역의 사람들이 어느 곳에 의지하지 못한 끊임없이 간을 봐야 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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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군 대차리 일원에서 발굴된 신라계 토기

 

그것은 무주 지역의 유물에서도 드러난다. 무주군 최초로 발굴된 삼국시대 고분인 대차리 고분군에선 6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었다. 발굴된 11 2기만 가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나머지 9기는 신라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 6세기에 이미 신라는 호남 북부지역에 깊숙이 진출하기 시작했고, 호남 동부의 가야인 아니라 대가야를 머리 위에서 위협하는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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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대한민국정책브리핑

 

호남 동부 가야지역의 모습을 뚜렷하게 밝히는데 기대되는 발굴작업이 있다. 전북 남원의 청계 고분군이다. 이미 상당한 훼손과 도굴이 진행되었지만, 근처에 월산리 고분군이 있으므로 지역이 핵심 세력의 근거지임을 추정할 있다. 독자들도 느꼈겠지만, 김해나 함안 지역에 비해 호남 지역의 가야사는 아직 삶의 모습을 추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루빨리 적극적인 발굴이 이뤄져 다양한 자료를 눈에 보고 싶다.

 

한편으로 지역의 가야사는, 가야의 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항상 주변부로써 이용되어 왔다. 일단은 대가야와 가장 강한 관계를 맺은 곳이지만 후기에 성립되었고 백제, 신라와 강하게 연결되었다. 오히려 지역의 유물과 유적은 뜬금없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차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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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공식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의 역사학자는 거의 없어졌지만, 여전히 교과서나 일부 서적에는 흔적이 남아있다. 가야의 영역을 상당히 확장해 목포지역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선 상기문, 하기문, 상다리, 하다리, 시타, 모루 등의 가야 지명이 등장한다. 백제가 임나국에게 뱉으라고 요구한 지역이었다. 한국 학계에선 고고학적 증거에 따라 이를 완주, 장수, 남원, 순천, 광양 등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일본 학계에선 이를 나주나 목포까지 확장한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역사학에서의 극일을 위해서라도, 호남 동부 지역의 가야사 발굴은 조금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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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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