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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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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링크로 들어가시면

선창규 씨와의 인터뷰를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다

 

 

 

끝내 조국 전 장관의 아내 정경심씨가 구속수감되었다. 조 전 장관의 자택을 비롯한 100여 곳을 압수수색하고, 23일 0시 30분 경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불의의 사고로 두개골 골절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뇌경색, 뇌종양을 앓고 있어 일상생활조차 불가한 정경심 교수가 어떻게 도주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장을 발부했다.

 

두 달 넘게 이어진 조국 일가에 대한 검찰의 ‘사냥식 수사’는 많은 시민들에게 ‘검찰 이대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했다. 조 전 장관 자택에 대한 11시간에 걸친 압수수색과 ‘짜장면 배달’은 “서울대 교수에 장관까지 한 사람도 저렇게 당하는데 일반 시민들은 죽어나는 것 아니냐”하는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검찰개혁’ 또는 ‘수사, 기소 분리’라는 막연한 수식어나 거대담론 같았던 검찰 문제를 보다 현실적으로 알아보고, 문제의식을 공유해보고자, 검찰의 무리한 수사, 기소로 피해를 입은 일반 시민들의 사연을 다루기로 하였다. 

 

첫 번째 주인공은 선창규씨(6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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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거래를 제안했다

 

2009년 2월, 선씨는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으로 둔갑시켜 유통시킨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긴급체포됐다. 그해 7월까지 미결구금(판결선고 전 구금)으로 수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검찰의 수사는 제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는데, 제보자는 전북지역에 있는 한 유력유통업자의 사주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게 기소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선씨는 축산물유통분야에서 30년 가까이 일한 건실한 사업가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유통업체인 한국까르푸에서 판매부장으로 근무했고, 유통업체를 퇴사한 후에는 지방자치단체와 대형마트를 연결하는 ‘축산물 유통 컨설팅 사업’을 했다. 

 

검찰은 세 차례에 걸쳐 기소했다. '광우병 의심 미국산 소고기를 호주산으로 둔갑시켰다’는 혐의(축산물가공처리법 위반), 금품수수·배임, 조세포탈 혐의였다. 가장 혐의가 컸고,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미국산 소고기를 호주산으로 둔갑시킨’ 혐의는 공소사실에서 슬그머니 빠졌고, 본 건이 아니었던 조세포탈 혐의가 추가되었다. 

 

여기서 ‘조세포탈’ 혐의는 별건수사로 이뤄졌다. 선씨에 따르면 “광우병으로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으로 바꿔치기 하여 유통했다는 사실을 자백하면 세무조사는 면해주겠다”는 검사의 제안, 즉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 또는 사전형량조정제도라고 부르기도 함)'을 거부한 결과였다. 

 

‘광우병 쇠고기’를 유통시킨 혐의와 금품수수·배임혐의는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별건수사로 이뤄진 ‘조세포탈’에 대해서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에 벌금 40억 원을 선고받았다. 형사소송법상 별건수사는 원칙적으로 위법이지만 검찰은 무시했다.

 

축산물가공처리법 위반에 대해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그에게는 이미 ‘광우병 소고기를 유통시킨 파렴치한 업자’라는 낙인이 찍혀있었다. 검찰 기소로 가정도, 사업도, 재산도 잃고, 11년 째 고통 속에 살아오고 있다.

 

자신을 수사하고 기소했던 검사들을 피의사실공표죄와 권리남용죄 위반으로 고발하였으나 무죄가 선고되었다. 형사피해에 대해서만 국가가 일정금액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을 뿐이다.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몇 달에 걸쳐 구치소 생활까지 했던 그에게 돌아온 건 고작 돈 몇 푼. 그는 지금도 억울해서 소주를 10병 넘게 마셔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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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자는 선씨가 2년 전부터 그의 일터가 된 전북 장수로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검찰 수사 받으면서 당한 일들에 대해 말해달라

 

어느 날 출근길에 체포되어 뭣도 모르고 남부지검으로 끌려갔다. 

 

영장도 없이 사돈의 팔촌까지 다 뒤졌다. 불법 압수수색하고, 그래도 안 되면 주변에 사업하는 사람들, 연관있던 사람들 다 불러다가 '(사회적으로) 죽이겠다'는 식으로 자백하게 했다. 

 

사람을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친구나 지인들에게 못 보일 모습을 자꾸 보이게 했다. 때려서 고문하는 게 아닌데, 고문보다 더 심하게 사람을 치욕적으로 다룬다. 

 

검찰이 내 동생이고 누구고 다 불렀다. 그 앞에 나를 데리고 가서 포승줄 채우고, 수갑 채우고 해서, 뱅뱅 돌게 한다. 그래놓고 “동생하고 이야기 해봐라”고 한다. 동생한테는 어깨 툭 치면서 “잘해!” 그런다. 그럼 동생이 이렇게 말한다.

 

“형님이 자백하지 않으면 회사랑 다 망가뜨리겠다고 합니다.” 

 

일했던 사람들도 불러다놓고 “너 저렇게 안 되려면 잘하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나에 대해 좋은 말은 하나도 안 하고 검사가 쓰라는 대로 쓴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검사도 "빨리 하고 빨리 나가야지”, “너도 같이 저렇게 되고 싶어?”윽박지른다. 부하직원 하나는 "그런 사실 없다"고 부인하니 그 직원 구속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참고인 조사로 불려오는 사람들이 무한정 늘어난다. 

 

검사들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기들 이익 위해서 사건 하나를 물면 개 같이 달려든다. 나는 광우병 소고기 수십 톤을 파렴치하게 판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재산을 지키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지 않게 하고, 가정도 평화롭게 하려면 검사가 시키는대로 받아써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 죄 하나 만들었는데, 그 피해에 대한 대가가 고작 700만 원이다.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게 개탄스럽다. 

 

 

- 당시 검사들을 상대로 한 소송은 어떻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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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남용과 피의사실공표죄는 무죄판결이 나왔고, 지금은 민사만 남았다. 민사 1심에서는 국가가 700만원 배상하라고 나왔다. 700만원 수령하라고 하는데 안 했다. 

 

검사들은 지난 3년 동안 내가 한 소송을 서울로, 군산으로 뺑뺑이 돌리기만 했다. 나를 불러서 조사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검찰은 자기 식구와 관련된 사건은 아예 안 한다. 

 

시효가 다 지나서 대검찰청, 광주지검, 서울남부 지검 앞에서 1인시위도 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진정서도 넣어봤는데 대검 감찰실로 이관시켰다. 당연히 대검에서는 문제없다고 했다. 이걸 어떻게 이기나? 이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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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규씨가 검사를 상대로 고소한 사건을 담당검사는 계속 다른 곳으로 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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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감찰처분결과 통지

 

 

- 신문 기사로도 났었다. 어떤 심경이었나?

 

기소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에 기사가 먼저 나갔다. 피의사실공표(공판청구 전에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것)다. 

 

구치소에서 그 ‘ㅎ’ 일보의 기사를 봤다. 하지도 않은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몇 달 후엔 다른 주간지에 보도가 됐다. 그걸 보고 검사의 플리 바게닝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유통업체에서 30년을 일했고, 나와 거래했던 사람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없었다. 건실한 기업을 다니던 처남이 거기서 나와 축산물 납품일을 하고 있었는데 기사가 나오고 처남이 거래하고 있던 대형마트에서 거래를 끊었다. 나중에 그 대형마트도 부도가 났다. 처남하고 같이 이름이 오르내리고 나와 거래하던 거래처 사람들이 전부 알게 되니까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광우병 소고기를 납품했다는 게 얼마나 나쁜 일인가?

 

구치소에서 나와선 그 일간지 기자를 만나서 ‘왜 확인도 안하고 기사를 썼습니까?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습니까?’라고 물으니 영등포 경찰서를 출입하던 중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썼다고 하더라. 경찰서에서는 내 사건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결국 일간지와 기자들 상대로 고소를 했다. 변호인은 정의당 사무총장까지 했던 신장식 변호사였는데, 손해배상 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걸로 끝이었다. 정정보도도 안해줬다. 그냥 그 기사를 내리는 것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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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대한 보도

 

 

- 검찰이 정확하게 어떤 '제의'를 했나?

 

기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가 나갔고, 혐의에 대해서 자백하지 않은 단계에서 기소되었다. 재판 중에는 수사한 검사가 나를 불렀다. 

 

(재판 중에 검사가 부르는 건 원칙적으로 위법이다. 수사와 재판이 동시에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는 가능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항변하고 검사의 기소사실 모두 부인하니까 ‘사돈의 팔촌까지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재판 중에 세 차례에 걸쳐서 거래를 제의했다. 내가 어느 지자체장에게 뇌물을 줬다고 자백하라면서, A4용지를 가져다놓고 쓰라고 했다. 

 

또 국세청 통해서 세무조사하고, 국세청에게 ‘(선씨를) 고발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대기업도 아닌 일개 개인사업자가 서울국세청 조사4국에서 조사를 받았고(일반적으로 조사4국은 대기업 특별 세무조사 담당), 고발도 당했다. 조세포탈로 집행유예와 벌금 40억 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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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백 안 한 대가로 검찰은 내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아예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네가 하나를 부인하면 내가 두 개를 붙일 것이고, 네가 두 개를 부인하면 또 네 개를 붙일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구치소 수감 중에 조사실에서 검사한테 조사를 받고 나가면 교도관들이 그랬다. “꼭 이겨내라!”고. 나를 조사실로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리고 가는 게 교도관이니까 조사실 구석에서 내용을 듣고 있지 않나. “뭐 이런 조사가 다 있냐!”고 화내면서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한다"고 용기를 줬다. 하도 검사들이 힘들게 하니까 교도관들이 “그냥 아프다고 해라! 오늘은 아파서 못 나간다고 사유서 써내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 제안을 거부해서 결국 벌금 40억 원 포함 120억 원 세금 폭탄을 받았다. 

 

벌금 대신 한 달 노역을 살았다. 살던 중에 동생이 돈을 내줘서 나왔다. 20억은 집사람이, 나머지는 형제들이 모아서 해줬다. 

 

 

- 탈세혐의는 별건수사다. 압수수색을 통한 증거도 위법이었다. 

 

불법 압수수색하고 별건이라고 수사한다. 본 건을 수사해서 안 나오면 못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서 별건을 똘똘 말아넣는다. 

 

검찰과 사법부는 끼리끼리다. 별건수사라고 판사가 내치지 않는다. 불법이라고 인정해야 되지 않나? 근데 안 하고, 되레 정당성을 끼워 넣는다. 

 

재미있는 게 6개월 지나서 내보내야 할 때가 되면 영장을 또 친다. 자기들이 그렇게 한 것이 외부로 샐까봐 계속 못 나가게 하는 것이다. 7개월 지나서 거의 다 되니까 보석으로 풀어주었다.

 

 

남은 건 분노와 억울함 뿐

 

- 분노와 억울함으로 보낸 세월이 10년이다. 

 

2008년 5월부터 시작했는데 지금도 안 끝났다. 저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냐. 이건 우리 모두의 일이다. 내 개인의 일만은 아니다. 또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니까 검찰청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그런다.

 

광주지검 앞에서도 일주일 정도 시위를 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가 퇴임하고 차린 변호사 사무실 앞에서도 한다. 어떻게든 이걸 알려야겠다 싶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안 하면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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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하고 돌아올 때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갈 때는 발걸음이 무겁지만 올 때는 편하다. 사람들도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머물러서 보진 않지만 잠깐이라도 본다. 

 

어떤 것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을 알아달라는 것도 아니지만, 검찰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내 사연을 보고, 그 유사한 사건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까 한다. 

 

 

- 이후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

 

구치소 나와서도 재판하느라 제대로 못 살았다. 가족이고 뭐고 다 떠났다. 술로 살았다. 근데 술을 마셔도 잠을 한숨도 못잔다. 소주 열 병을 마셔도 잠이 안 온다. 어제 저녁에도 술을 굉장히 많이 마셨는데 잠을 전혀 못잤다. 자려고 하면 머릿속에 지나왔던 모든 것들이 떠오른다. 병원에서 수면제도 받아봤는데 다음날 어지러워서 안 되겠더라.

 

이런 상태니 몸이 썩기 시작한다. 종기처럼 뭐가 난다. 

 

(실제로 그의 다리에는 종기 같이 볼록하게 올라온 것과 울긋불긋한 상처가 여러 군데 있었다)

 

밤엔 더 심하다. 염증이 온 몸에 돌아다니면서, 어떤 때는 종기처럼 막 고름이 잡혔다가 낫고. 엄청 가렵다.

 

그나마 나는 괜찮은 거다. 공범으로 엮여서 들어간 처남이 많이 힘들었다. 그 때 처남네 둘째가 칠삭둥이로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 됐었나? 애가 병원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고 있는 판에 처남이 검찰수사 받고 7개월이나 구속되어 있었다. 가정 파탄이 왔다.

 

처남은 너무 힘들어서 거짓으로 자백하고 나가려고 했었다. 수사한 검사가 처남과 나를 불러서, '그렇다'고만 하면 풀어준다고 했다. 처남은 털고 나가려고 하는데 내가 완강하게 거부하니까 안 됐다. 둘이 증언이 맞아야 하니까. 

 

나는 처가댁에서 원수가 됐다. 그렇게 가족도 파탄나고 가진 재산도 다 잃었다. 

 

 

사람답게 사는 건 판검사 뿐

 

-구치소에서 나온 뒤 수사, 기소했던 검사들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봤나?

 

봤다. 한 검사는 변호사 사무실(검사를 그만두고 차린 사무실) 앞에서 시위할 때 봤다. “사과하라!”고 했는데 그냥 가더니, 한 달 동안 그 앞을 한 번도 안 나왔다.

 

또 다른 검사는 전화를 했더니 “나중에 통화하시죠!” 했다. 이후로 통화가 안됐고, 그 검사가 옮긴 광주검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는데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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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장관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
 

저 사람 잡으려고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다치게 할까, 생각했다. 주변 사람 계속 후벼팔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만뒀는데도 계속 화살을 쏘지 않나.

 

우리나라는 검찰공화국이 맞다. 사람답게 사는 건 판, 검사 뿐이다. 나 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쥐락펴락 하면서 사람도 죽이고 기업도 죽인다.

 

2003년 검사와의 대화 때 노무현 대통령도 “지금 막가자는 것이냐!”고 하지 않았나. 나와서 보니까 그게 보인다. 검찰이 자기 마음대로 요리하는 거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결국 무죄를 받았지만, 이미 사람들한테 나쁜놈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내 이름 석자를 네이버에 치면 ‘광우병’뿐이 안 나온다. 사람들은 무죄 받은 건 알아주지 않는다.

 

힘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검사가 죄를 만들려면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 구조가 없어지는 게 바람이다. 나 하나로 끝났으면 한다. 

 

이런 일 있을 때는 검사도 처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수사 검사의 고의성이 드러난다든지 하면 처벌 받을 수 있게 제도 개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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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 수사를 받거나 기소되었을 때 대응방법

 

- 변호인을 선임하여 도움을 받는다. 

- 비용걱정이 될 때에는 국선변호인을 선임하여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 앞으로는 경찰수사 단계에서도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수사 종결 후 혹은 기소 후 재판이 끝나고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여겨질 때에는 대검찰청 감찰관실이나, 법무부 감찰관실에 진정을 넣을 수 있다. 

- 대검찰청 감찰관으로 과거에는 검사출신들이 근무했으나 지금은 판사출신들이 대체해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다. 

- 법무부 감찰관실도 최근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최후에는 형사피해국가배상 소송뿐만 아니라 검사를 상대로 고소한다. 고소 후 판결내용을 공개하는 것도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큰 효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