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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30년

 

우리나라의 모든 고고학 분야가 그렇지만, 가야사 발굴은 일제강점기 총독부에 의해 시작됐다. 특히,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가야 지역을 샅샅이 조사했다. ‘반 도굴 반 발굴’로 임나일본부 프로젝트가 진행됐고 이들이 만든 <조선고적도보>는 현대 고고학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가야사는 시작부터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한반도 고고학은 정지 상태에 들어섰고, 가뜩이나 듣보였던 가야는 긴 암흑기를 맞는다.

 

광복 이후 가야사의 발굴은 단순 지표조사 수준에서 머물러 있었다. 사실 제대로 발굴할 기술도 능력도 없었고. 오직 식민사관, 즉 임나일본부설 극복을 위한 문헌 연구에 머물러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가야에 대한 순수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었고, 90년대 초중반부터 비로소 제대로 된 발굴이 진행됐다. 따지고 보면 고작 30년 남짓의 젊은 나이다.

 

필자는 과거 딴지의 기사 ‘개발과 문화재 : 그 일과 thㅏ랑 같은 관계’(링크)에서 문화재 발굴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선 막대한 예산이 투입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야기한 바 있다. 누구나 할 수 이야기만큼 어려운 이야기는 없다. ‘대통령의 가야사’가 그랬다.

 

역대 정부 중 최초로 가야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김대중 정부였다. 2000년, 1,000억이 넘게 투입된 1단계 가야사 정비 사업은 김해, 함안, 창녕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유명한 김해 대성동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 함안 말이산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등 현재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가야 유물 유적을 전시하는 공원과 박물관이 이 시기에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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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고분군 전경

출처 - 가야고분추진단

 

민주정부를 계승한 참여정부 역시 이를 확대한 2단계 가야사 정비 사업을 그렸다. 특히, 김해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은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다. 봉하마을 뒷산인 봉화산엔 가락국 역사가 전술되는 마애불이 있고, 봉하마을 방문객에도 수시로 가야사 이야기를 했단다. 특히,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일본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주 표했다고. 노무현 대통령 개인을 떠올려볼 때 당연히 그랬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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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전설이 서려있는 봉화산 자은골 마애불

출처 - <중앙일보>

 

하지만 참여정부의 2단계 가야사 정비 사업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사유를 간단히 말하면 돈. 사업 용지조차도 매입할 수 없는 예산으로 국가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2단계 가야사 정비 사업은 그렇게, 12년이 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이에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2010년, 가카 정부는 기존 정부에서 그렸던 가야사 발굴 프로젝트를 전면 수정하며 ‘가야 문화권 특정 지역 지정 및 개발계획’을 만들고 박근혜 정부에 인계한다. 2017년까지 21개 사업에 2천억 원이 넘는 돈이 투입되긴 했다.

 

 

영남 그리고 호남

 

그리고 2017년, 문재인 정부의 탄생과 함께 다시 가야사 정비 사업은 전방위적 프로젝트로 부활했다. 발굴 성과는 18년~19년에 걸쳐 굵직한 뉴스가 한 달에 한 건 이상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토의 면적은 좁은데 역사는 오래되어서 어지간한 곳은 파면 다 나온다지만, 이렇게 꾸준히, 또 착착 진행될 줄은 역덕인 필자도 예상하지 못했다.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이 가야사에 관심 가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분명,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인 김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어떻게 보면, ‘정치적 선물’로 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발언 이후, 본지가 열렬히 사랑해 마지않는 자매지 <조선일보>는 신나게 비판 의견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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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역사의 특정 시기나 분야 연구나 복원을 지시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

(하일식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조선일보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문재인 대통령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가야사 연구 복원은 말하자면 영호남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

 

“가야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까지의 역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섬진강과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 남원 일대와 금강 상류 유역에도 유적들이 남아 있다.”

 

‘영호남 통합’은 이젠 다소 촌스러운 말이 된 것 같다. 아마도 대통령의 ‘영호남 통합’ 발언이 그저 명분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도 더러 있다. 사드 논란으로 꽤 뜨거웠던 당시의 시국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비판론자들은 '고향 땅에 주는 정치적 선물을 위한 포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확언한다. 문재인 대통령, 나아가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발굴 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명분이 아닌, 영호남 화해와 통합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은 사업임을. 그 이유는 조금씩 더 이야기해보겠다.

 

 

가야로 가야

 

김대중 정부의 1단계 가야사 정비사업은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특정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순수한 발굴 보다 지방자치단체의 토목적 사업에 쏠려 있었던 경향이 있었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것에 비해 학문적 성과는 그리 높지 않다(막대한 예산이 일부 연구자, 관계자의 주머니로만 들어간 것은 논외로 하자). 참여 정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고,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국민통합’을 위해서도 가야사 발굴의 밑그림은 ‘영호남 통합’의 위해서 그려졌다. 

 

자세한 이유야 모르지만 참여정부의 가야사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되고, 보수 정부는 앞서 말했듯 ‘가야 문화권 특정 지역 지정 및 개발계획’을 수립하여 다시 실행한다. 막대한 예산과 거창한 계획과는 달리, 지자체의 우선 사업 순위에서 제외되고 중앙 정부의 예산 지원은 지지부진했고 중요한 아라가야는 ‘특정 지역’에서 빠지면서 괴랄하게 진행된다. 나름대로 성과도 의지도 있었지만, 보수 정부 10년간 가야라는 뉴스를 통해 가야라는 이름을 들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잘 떠올려보면 그 성과를 가늠할 수 있다.

 

불초한 필레기의 사견임을 전제하고 쓴다면, 가카와 영애 두 정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문화재 발굴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개발과 문화재 : 그 일과 thㅏ랑 같은 관계’에서 4대강 사업으로 날아간 문화재와 경주 월성 졸속 발굴 사업 항목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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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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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신문>

 

두 분의 가카 시절 진행된 문화재 발굴은 사사건건 학계의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발굴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비판을 본 적이 없다. 

 

참여정부는 문화재 발굴, 연구, 보존에 명백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던 정부였다. 유홍준 문화재청장 시절, 숭례문이 불타버린 안타까운 케이스도 있다. 하지만, 유홍준 쌤 본인의 슈퍼-권위적인 태도, 자의적인 과한 해석 등에 대한 비판을 제쳐놓더라도, 당시 문화재청의 존재감과 그 이후 10년간의 존재감을 비교해보면 명백한 차이가 있다. 국가가 진행하는 온갖 토목사업의 뒤처리만 수행해야 했던 가카 시절의 문화재청, 영애께서 각별히 관심가지사 전투적이고 속도전의 발굴을 치러야 했던 경주 발굴의 문화재청이 아니었다. 

 

그랬던 참여정부의 2단계 가야사 정비 사업이 무산된 이유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특정 지역’ 프로젝트, 또 박근혜 정부의 경주 몰빵 프로젝트는 그들이 왜 참여정부의 사업을 엎고 다시 판을 짰는지 추측해볼 수 있게 하는 장면이다. 근거는 없다. 근거는 없는데, 그런 느낌이 쎄하다. 중앙정부에서 지자체까지, 4년이라는 임기 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딱 좋은 것이 발굴 사업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비판을 문재인 정부에게도 할 수 있겠지만, 성과가 어떠냐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좌우간, 참여 정부의 시도는 무산됐지만, 한 가지 아이디어는 남았다. ‘가야 문화권’이다. 경남과 경북의 서부는 그동안 부울경, 즉 ‘신라 문화권’에 밀려 존재감 없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은 가야가 아니라, 신라의 이름으로 자연스레 포섭된 것이다. 가야가 멸망한 뒤 강수, 우륵, 김유신이 그러했듯 말이다. 그런데, 이 지역엔 신라 문화권이 독점한 ‘영남’, 혹은 ‘호남’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독창적인 ‘가야 문화권’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비록 중앙 정부의 시도는 무산됐지만, 이러한 기조 자체는 끝까지 유지되었고 2005년, 가야사라는 자산을 공유하고 있는 지자체들이 모여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라는 모임이 결성된다. 2019년 현재, 이 모임은 25개 시 군으로 늘어났다.

 

가야사 발굴 사업이 오래도록 지지부진했던 까닭엔 이 지역 지자체의 예산 부족도 한몫한다. 가야의 역사처럼, 이 지역의 지자체도 구심점 없이 찔끔씩 예산을 투입하니 시원시원하고 명확한 발굴이 이뤄질 수 없었다. 또한, 1편에서 동상이몽을 꿈꾸던 가야 연맹의 사신단처럼, 현재도 각 지자체마다 그리는 그림이 조금씩 다르다. 결국, 가야사는 중앙 정부가 나서서 주도하고 지원하며 조율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보수정부는 말만 무성했지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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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령군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이완영 의원은 2015년 새누리당 시절,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국가’ 운운하며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개뿔이나, 뭐했나 몰라.

 

 

가야사 복원이 국정교과서와 다를 바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역사에 개입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편찬, 명백한 의도가 담긴 경주 월성 졸속 발굴 등 부적절한 선례가 많다. 부적절한 사례들은 모두,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자신들의 유리한 현실적 해석을 위해 끌어당기거나 비트는 행위에서 비롯됐다. 만약, 문재인 정부의 ‘영호남 통합’도 과거의 역사적 해석을 비트는 것이라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이에 대해 가야사를 연구한 곽장근 군산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이냐? 가야시대엔 영호남이 따로 없었다.”

 

즉, ‘영호남 통합’이라는 기치는 ‘가야 문화권’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단일 지역으로서의 복원을 뜻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가야 시대엔 소국 간의 이익 다툼이 있었으나, 그것은 영남과 호남이라는 지역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갈등이 아니었다. 가야 연맹 내부는 때로는 내전도, 때로는 분열도 있었으나, 결코 상호 간의 멸망과 합병을 목표로 했던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러한 정체성이 가야 멸망의 제1원인이 되었던 것이겠지만, ‘영호남 통합’이라는 상징과 예산 투입은 오래도록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이용만 당한 채 역사 속에서 소외받은 것에 대한 일정 부분의 보답이라 할 수 있겠다. 소외된 곳에 대한 배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과 연계된다. 즉, 역사적 사실을 비트는 것과는 무관한 일인 것이다.

 

사실, 일부 학계에서 대통령의 가야사 발언을 비판한 이유는 조금 더 있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의 ‘동북아역사지도’ 공격과 ‘임나라는 표현을 쓰는 학자는 일본의 지원을 받는 사람들’ 등의 발언에서 드러난 역사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비판론자들 역시 상당 부문에서 도 장관을 비판하고 있다. 필자도 장관이 시중에서 히트친 이덕일류 대중 교양서를 너무 많이 읽은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도 장관은 장관직을 수행한 이후 역사 관련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발굴 행보를 보면서 비판론자들도 일부 돌아서거나 사그러들었다. 특히, 2018년 11월, 앞서 소개한 하일식 교수가 회장으로 역임 중이며,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발언을 비판했던 한국고대사학회가 국립기관과 합동으로 가야 학술대회에 참여하는 등, 달라진 반응을 보였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가 가졌던 ‘선의’는 깐깐한 학자님들에게도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지자체의 동상이몽은 ‘가야의 핫플레이스’를 두고 첨예하게 경쟁하며, 지역마다 가야사의 흐름이 조금씩 다르게 서술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지역 내 발굴 유적을 실제의 규모보다 확대 해석 하는 등, 선의를 뛰어넘는 부작용이 슬슬 보이기도 한다(대표적인 삽질인 ‘구지가 유물 드립’은 다음 편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이 또한 가야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란 그래서 재밌는 법이다.

 

그럼, 따끈따끈한 발굴 소식을 들고 다음 편으로 찾아뵙겠다.

 

 

 

뱀발.

 

필자는 ‘개발과 문화재 : 그 일과 thㅏ랑 같은 관계’에서 ‘내가 대통령이라면’이라는 전제하에 발굴 사업에 예산을 쏟아붓는 역덕 대통령이란 망상을 푼 적이 있다. 현실에선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의 오랜 역사적 고민이 녹아든 사업을 지켜보고 있자니 부럽기도 하다.

 

 

 

* 참고문헌

 

<사국시대의 가야사 연구> / 김태식 저 / 서경문화사

<가야문화권 중장기 조사 연구 종합계획>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가야자료총서 1~7권>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가야의 국가발전단계와 가야사연구> / 남재우(창원대학교) / 효원사학회

<백제의 사비회의 개최와 가야 諸國의 대응> / 신가영 / 한국사학회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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