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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약쟁이 괴링 때문에 시작된독일 공군의 최고 책임자였던 그는 전투기 조종사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유는 영국본토항공전(Battle Of Britain)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공군 파일럿들은 자신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괴링에게 대놓고 반발하고 있었다(폭격기 근접호위 같은 무리한 요구를 계속하다 보니 파일럿들도 화가 났다).

 

영국본토항공전 와중에 괴링과 아돌프 갈란트의 대립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다.

 

(아돌프 갈란트는 전간기 스페인 내전에서 콘돌 군단으로 참전했던 베테랑 군인이며, 공인격추 104기의 기록을 가진 전투기 조종사였다. 대전 중반에 이미 중장 계급장을 달았고, 부하들의 신망을  몸에 받았던 멋쟁이다. 정말로 멋 부리는  좋아했던  하던 인물이다)

 

영화 <Battle Of Britain>에도  장면이  묘사돼 있는데, 괴링이

 

 자네들을 도우려고 여기 있는 거야.  필요한  없나?”

 

라고 묻자, 아돌프 갈란트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비행단에 스핏파이어를 주십시오.”

 

스핏파이어는 영국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다.  마디로 엿을 먹인 거였는데, 아돌프 갈란트는 자신의 자서전에도  대목을 자랑스럽게 기술해 놓았다. 친절하게(?) 괴링의 반응도 적어 놨다.

 

『나의 이런 직설적인 대답에 괴링은 크게 놀랐고, 괘씸해하며 돌아갔다.

 

괴링은 전투기 파일럿들에게 악감정을 가지게 됐고, 전투기 조종사들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여기서 걸리는  전과기록이다. 독일 공군의 격추기록 인증은 연합국의 다른 공군들의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철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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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공군은 독일전투기 날개에 불이 붙거나 연기가 나면 이걸 격추로 인정했다. 전투기가 불이 붙었다고  추락하는  아님에도 말이다. (불이 붙어도 연료탱크에 있는 자동방루장치 덕분에 연료가 새는  막고, 새어나간 연료만 계속 타다가 연료가  타면 불이 꺼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독일군은 현장에서  파일럿이 탈출하거나(낙하산 탈출 같은), 적기가 땅에 떨어져 충돌할 경우에 격추로 인정했다. 문제는 이걸 확인 받기 위해 본인이 2장의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통은 ‘전투보고서’, 한통은 ‘격추보고서.  2장의 보고서와 함께 증인의 보고서도 1 첨부돼야 한다. 만약 증인 보고서를 확보하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했다.

 

전투보고서에는 출격일시와 임무의 종류, 귀환일시와 함께 전투상황을 상세히 기술해야 한다(일종의 자술서 같은 느낌이다). 격추보고서는 이보다는 훨씬  ‘서류’ 같은 느낌인데, 일시와 장소, 격추기종, 격추기의 국정, 격추상황과 추락상황(추락위치와 폭발 시에는 지면충돌 때문인지 공중폭발인지 등을 기록하게 했다), 아울러 적기 공격횟수와 공격방향, 사격당시 적기와의 거리  사용 탄종과 탄수 등등을 세세히 기록해야 했다.

 

증인의 보고서와 함께 상급부대로 순차적으로 결재를 받고 올라가고,  마지막에 괴링의 사인을 받아야 격추기록을 인정받는 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격추기록을 부풀리는  어려웠을 거다.

 

(같은 시기 연합군들의 격추 집계방식을 보면 독일 공군이 얼마나 빡빡하게 격추기록을 집계했는지 확인할  있다. 미국 공군은 ‘공동격추라는 개념을 인정했는데,

 

독일 전투기  대를 너랑  윙맨(wingman : 2 편대에서 6 후방을 지켜주는 동료기) 같이 잡은 걸로 하자.”

그럼 반반씩 잡은 걸로 해요? 제가 거의  잡았는데...”

 총탄  떨어져서 어쩔  몰라    동료가 막타 넣어줬잖아. 아예 놓칠   건데, 0.5기라도 건진  어디야? 반반씩 .”

 

이런 식의 공동격추를 인정해줬다. 격추 판정도 여유 있었는데, 적기가 피탄 비상착륙한 것도 격추로 인정했)

 

그럼 2 대전 때 독일 공군의 슈퍼 에이스들은 어떻게 등장하게  걸까? 수세에 몰렸음에도 하루 6, 8시간의 요격비행을 감행한 독일 공군 파일럿의 감투정신 때문일까? 아니면 우수해서? 훨씬  좋은 기체에 타고 있어서? 전쟁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 작전을 이끌어서? (이들 베테랑들은 전쟁이 길어지면서 점점 사라져갔고, 독일 공군은 파일럿 양성기간을 대폭 단축시킨)

 

연합국 전투기 파일럿 중 많은 격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에 리처드 봉(Richard Ira Bong)이라고 있다.  육군 항공대에서 P-38 40기를 격추했다. 영국 공군엔 제임스 에드가 조니 존슨(James Edgar Johnnie Johnson) 있다. 38기로 영국군 최고 에이스다(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점령하의 서유럽과 영국 본토항공전에서 오로지 독일 전투기들 상대한 전과였다. 조니 존슨의 모든 격추전과는 당대 최고의 전투기라 평가받던 독일 공군의 Bf-109 Fw-190만을 상대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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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파일럿들의 격추기록을 살펴보면, 독일 공군의 그것은 과장됐다는 생각  밖에 없다.  격추기록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무수한 가설이 나왔다.

 

연합국들은 기본적으로 전선에서 일정 기간 복무를 하면 후방으로 이동 시킨다. 전투기 훈련 교관과 같은 비전투임무를 줬기 때문에 격추기록을 쌓을 기회가 적었다.”

 

미군의 경우 이런 제도를 운영했었다. 그런데 상당수의 일선 파일럿들은 후방으로 가라고 해도 이를 거부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독일 공군 파일럿들의 우수성을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우수성이란 것도 1942년이 되면 연합군 별반 다를  없어진다. 2 대전 초반 독일군이 여타 다른 군대를 압도할  있었던 요인들  하나가 풍부한 ‘실전경험이었지만,전쟁이 길어지면서 실전경험은 모두가 가지게 됐다. 

 

경험을 가진 일선 병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도 했다. 이를 메우기 위해 훈련 기간을 유지해야 하는데, 1942년이 지나면서 유류를 비롯한 물자의 부족, 전선의 급박함 등등이 더해지면서 훈련기간이 계속 축소됐다. 4 과정의 파일럿 양성기간도 2년으로 단축됐던   시절의 일이었다.

 

우수한 전투기 성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연합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고나서는 독일군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  까놓고 전쟁 초기의 특수한 몇몇 상황을 제외하고는 독일 공군이 양적인 우세를 보였던 적은 없었다. 그나마 1941 6 소련 침공 이후에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나마 생각할  있는 ,

 

살아남은 베테랑들을 끊임없이 굴렸다.”

 

라는 건데, 모든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2 대전 독일공군의 슈퍼에이스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고 있지만, 2 세계대전이 끝난  70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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