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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신고하자" 7-80년대 삼천리 방방곡곡 어느 두메산골이나 깡깡어촌이나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표어다. 그런데 이 가공할 신고 정신(?)은 전쟁을 치른 분단국가, 군부 독재의 히스테리가 가득하던 나라 고유의 특산물만은 아니다. 세계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신성시되고 그것을 자기네 나라의 정체성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미국에서도 저 표어와 비슷한 '신고 정신'이 깃발을 날릴 때가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내내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다. 막대한 양의 미제 물품들이 소련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분홍빛 햄 '스팸'은 러시아 인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다. 미국이 대 소련 물자 지원을 선언한 순간 미국 주재 소련 대사는 환호하며 외쳤었다. "이제 우리는 전쟁에 이긴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적 독일이 쓰러지고 일본도 두 손을 든 순간부터 양국은 서로에 대한 경계와 적대의 눈초리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내부의 국민들도 덩달아 새로운 적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 주된 과녁이 된 것은 젊은 예술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던 미국 공산당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3년도 되지 않은 1947년 10월 헐리우드에서 각각의 업무에 종사하던 43명에게 '비미(非美)활동조사위원회'(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나와 증언할 것을 명하는 출두 요구서가 날아갔다. 43명은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거나 그렇다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위원회 이름 자체가 재미있다. Anti-America도 아니고 Un-America인데 언뜻 일본인들이 말 안듣는 조선인들에게 '비국민(非國民)이라 낙인찍던 것을 떠오르게 한다. 이 '비미위원회'는 일제 파쇼 당국이나 할 '조사'를 시작했다. 43명이 "작품을 통해 순진무구한 대중을 의식화시키려 했을 가능성"에 대한 조사였다.

 

43명 중 19명이 증거 제출을 거부했고 11명이 소환됐는데 막판에 저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입장을 바꿔 조사위원회에서의 증언을 수락한다. 남은 것은 10명이 됐다. 알바 베시, 허버트 비버만, 레스터 콜, 에드워드 드미트릭, 링 라드너, 존 로슨, 알버트 말츠, 새뮤얼 오르니츠, 애드리안 스코트, 그리고 달턴 트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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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던져진 질문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과거 우리의 고문기술자들이 "너 북한이 좋지?"라고 물었던 것처럼. "당신은 공산당원을 현재 알고 있거나 과거에 알고 지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여기서 모른다고 하면 그것이 거짓임을 입증할 태세였고, 알고 있거나 알고 지낸 적이 있다고 하면 그를 '신고'하라는 강요였다. 인간의 양심의 밑바닥을 헤집는 갈고리 같은 질문이었다.

 

헐리우드 텐은 여기에 저항한다. 어떤 이는 조사위원회에서 대답 대신 미국 수정 헌법 1조를 유장하게 읊는다. "의회는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청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다." 수십 년 뒤 어느 나라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을 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처럼.

 

'헐리우드 텐'은 의회 모독죄로 기소됐다.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고 1947년 11월 25일, '미국 영화 협회'는 마침내 그 10명의 이름을 일일이 읽어 내리면서 이들이 "의회모독죄를 면하지 못하고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선언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헐리우드에서 밥줄이 끊길 것이며 회원 가운데 누구도 그들을 고용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한다

 

헐리우드 블랙리스트의 탄생이었다.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배우협회장 로널드 레이건과 게리 쿠퍼, 로버트 테일러 등도 뉴욕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모여 ‘우리 영화인들은 공산주의자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기관이나 단체의 회원과는 앞으로 일체 공동 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못박는다.

 

1947년 11월 25일 이후 헐리우드 텐은 공식적으로 영화계에서 추방됐다. 혹자는 가명을 쓰기도 하고, 또는 유럽으로 가서 창작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10여년 간 헐리우드에서는 완벽하게 배제됐다. 그러나 그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도 이것은 미국이 아니라고, 내가 사랑하는 자유의 나라 미합중국이 아니라고 분연히 항의한 사람들이 있었다.

 

요즘의 한국식 영어로 하면 "소셜테이너", 존 휴스턴 감독과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 로렌 바콜은 워싱턴을 행진하며 헐리우드 텐의 양심의 자유에 대한 탄압에 항의했다. 그런데 이 블랙리스트를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킨 헐리우드 스타가 있었다. 그가 바로 커크 더글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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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텐 멤버 중의 하나인 달톤 트럼보는 욕조에서 글을 쓰는 기벽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헐리우드 텐으로 낙인 찍힌 이후 그는 투명인간이 됐다. 아무도 그와 작업하려 하지 않았고 그의 시나리오를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글 쓰는 재주 밖에는 없던 트럼보는 욕조에 앉아서 꺼이꺼이 울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글을 썼고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암울한 분위기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그는 친구에게 연락한다.

 

“내 이름으로는 안되는 거 알잖아.”

 

“어흠 어흠.... 아 이거 참 곤란하게..... ”

 

“그러니까 이 시나리오 자네 이름으로 해서 팔아주게.”

 

이렇게 하여 지금도 <로마의 휴일>의 크레딧에는 각본에 맥리렌 헌터의 이름이 올라 있으나 오드리 헵번을 전설로 떠올린 이 영화의 원작자는 다름 아닌 달톤 트럼보였던 것이다.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헵번의 단발머리가 전 세계에 폭풍적 유행을 몰고 오는 것을 보면서 달톤 트럼보는 그야말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본 이발사의 심경이 됐으리라. 미국에 대나무숲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디 록키 산맥 깊숙이 들어가 곰굴 앞에서라도 외치고 싶었으리라. “로마의 휴일은 내 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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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톤 트럼보는 이런 식으로 계속 대본을 써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18시간 이상 글을 써야 했다. 이름 없는 2류 영화사에서 그야말로 대본 공장 공장장처럼 일했다. 하지만 낭중지추는 항상 돋보일 수밖에 없다. 1956년 <브레이브 원>이라는 영화로 덜컥 각본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영화의 각본은 로버트 리치. 달톤 트럼보가 사용한 열 개도 넘는 가명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아카데미 상 시상식에 로버트 리치는 나타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소문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 쑥덕거림은 헐리우드를 진동했고, 아는 사람은 다 로버트 리치가 누구의 가명이며 로마의 휴일의 각본이 사실은 누군가임을 알게 됐다. 그래도 헐리우드 텐을 대놓고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 트럼보를 찾아온 사람이 커크 더글라스였다. 명배우이자 1955년 영화사를 설립한 어엿한 사장님. 그가 트럼보에게 대본을 의뢰한 내용 역시 참으로 위험스런(?) 것이었다. 로마의 검투사들이 로마의 잔학한 착취와 비인간적인 처우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전멸하는 이야기 아닌가 말이다. 시저나 알렉산더면 좋겠는데 노예 반란의 주동자 스파르타쿠스라니.

 

커크 더글라스가 배우이자 제작자로서 감독을 너무 무시하는 바람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커크는 불운한 각본가에게는 최선을 다했다. 달톤 트럼보가 이 영화의 각본자임이 드러나면서 한국에나 미국에나 있는 ‘꼴통’들은 분개하기 시작했다. 그놈의 ‘비미(非美)’ 무슨 위원회부터 재향군인회 등 완고한 사람들이 영화 반대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트럼보랑 노는 너도 빨갱이!” 류의 협박도 난무했다. 그러나 커크 더글라스는 이 협박을 매우 쿨하게 물리쳐 버리고 아예 크레딧에 각본 달톤 트럼보의 이름을 올려 버렸다. “각본: 달톤 트럼보” 이걸 의역하면 이 말이 될 것이다. “매카시스트들? 퍽 큐”

 

원래 금기는 무너지기 시작하면 모래성만도 못한 법이다. <스파르타쿠스>에서 트럼보는 개인의 양심을 무너뜨리는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한다.

 

로마 장군이 패배한 노예군을 앞에 두고 의기양양하여 "누가 스파르타쿠스냐? 그만 죽이고 다 살려 주겠다."고 호언한다. 누구 하나를 턱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살 수 있는 유혹 앞에서 노예들은 저마다 일어나서 외친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내가 스파르타쿠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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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 더글라스는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1200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아무리 헐리우드 대스타라고는 하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이었고 영화의 성패에 따라 자신의 인생도 크게 기우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카시즘의 희생자 달톤 트럼보를 찾았고 매서운 반대에도 불구하고 트럼보의 이름을 회복시킴으로써 쇠퇴하던 매카시즘의 턱에 피니쉬 블로우를 꽂아 넣었다. 그는 어쩌면 “나도 트럼보야 싸나브비치”라고 외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커크 더글라스는 헐리우드에서 고액기부자로 이름이 높다. “더글러스는 여러 비영리 단체에 꾸준히 거액을 기부한 것으로도 명성이 높다.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기부한 것을 필두로 여러 의료 봉사 단체를 후원했다. 시설이 노후해진 캘리포니아 지역 많은 학교의 운동장 시설을 복구시켰으며, 노숙 여성의 재활을 돕는 단체도 만들었고, 치매 환자 재활 센터에도 거액을 기부했다. 작년 12월 99세의 생일을 기념하여 1500만 달러를 기부한 것까지 포함하면 더글러스 부부가 기부한 액수는 8000만달러에 달한다.” (한겨레신문 2016년 2월 8일 , 조한욱의 <서양 사람>)

 

한 세기를 넘겨 산 헐리우드의 대스타, 우리 아버지가 팬을 자처했던 명배우. 매카시즘의 턱에 통렬한 주먹을 날린 영화인. 커크 더글라스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