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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신과 신겐의 본격적인 만남(?) 말하기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것이 있다.

 

겐신 여성설

 

소문이 무성하긴 하지만, 이 어디까지나 호사가들의 추측성 주장일 뿐이다. 그러나 은근히 겐신이 여성이길 바라는 이들이 많았는지(아니면, 상업적으로 그게  먹혀서 그런건지) 우에스기 겐신을 ‘여체화해서 등장시킨 게임도 (일본 사극 중 오다 노부나가를 여성으로 만든 작품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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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신 여성설'은 음모론의 진화과정 비슷하다. 결론을 내놓고, 거기에 부합하는 증거들을 찾아 넣는다.  증거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첫째, 겐신은  달에   정도 복통을 호소했다. 발발하는 일시는 일정치 않았으나, 통상   통증을 호소하면 10 정도 거동이 어려웠다.  통증 때문에 전투 중에 진을 물린 적도 있다.

 

둘째, 여성적인 필체와 연애물을 즐겼다.

 

셋째, 겐신은 붉고 밝은 색을 좋아했었다.

 

대충 꼽아보면   가지 항목에  개의 기록들이 첨언되는 형식이다(그를 여자라고 보고한 선교사의 보고 정도?). 

 

'복통'에 관한  우선 말하겠다. 보통  달에   복통을 앓고, 기간이 10 정도란 말을 들으면 '생리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겐신이 평소 술을 자주 마셨다는  생각해봐야 한다. 일생의 ‘도락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그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안주라도 제대로 챙겨먹었다면 좋겠지만, 안주는 매실 장아찌 하나였다. 평소 식습관도 ‘수행자 그것을 보는  소식소찬이었다(평소 겐신은  한공기,   그릇, 반찬 한가지로 식사를 했다. 그러다가 전쟁을 앞두고서야 밥을 든든히 챙겨 먹었다. 부하들은 겐신의 식사량을 보고 전쟁이 가까워졌음을 확인했었다).

 

술꾼에게 복통은 일상이다. 음주가 몸에 좋지 않다는  일반 상식이지 않은가?

 

여성적인 필체와 연애물을 좋아하는 것도 그의 가족사를 보면 이해의 범주 안이다. 겐신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따랐다. 어머니를 따라 독실한 불교신자가  , 그의 누이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딸부잣집의 막내아들의 성향을 생각해보라).

 

겐신이 연애물을 좋아하고, 여성적인 필체가   주위 여성들의 영향이라 생각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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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붉은 색을 좋아했다는 , 밝은  계열을 좋아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붉은  갑옷을 입는 경우는  있었다. 다만 붉은 염료를 뽑아내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때문에 붉은 색은 고관대작이나 귀족들의 색깔로 분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자들은 붉은 색을 찾았다. 붉은 색의 의미가 ‘였기에, 전쟁과 피로 점철되는 전국시대 무장들은 붉은  갑옷을 입는  선호했다.

 

결정적으로 겐신이 ‘여성이었다 하더라도 당시에 이걸 숨길 이유가 없었다는 거다. 드물긴 해도 여성 다이묘들이 있었다. 아시카가 우지히메(足利氏) 경우도 있고( 경우엔 형식만 가독으로 승계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이 나오토라(井伊直虎) 경우는 여성인데, 남성 행세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에스기 겐신이 설사 여성이라도 굳이 숨길 이유 같은  없었다고 본다. 압도적인 실적이 있지 않은가

 

겐신이 여성이라는 추측은 추측으로 끝을 내야 한다.

 

 

 

필생의 라이벌과의 만남

 

1553년부터 신겐과 겐신은 카와나카지마(川中島の戦い)에서 맞부딪힌다 강이 만나서 삼각지 형태를 띄고 있는 이 지역을 통해야만 에치고로 넘어갈  있다. 겐신으로서는 앞문이 열리는 꼴이다. 반대로 겐신이 이곳을 차지한다면 신겐의 진출을 막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신겐의 목덜미를 물어 뜯을  있다.

 

실리를 따진다고 해도 결코 허투루   있는 땅이 아니었다. 토양이 비옥해  수확량이 많고 연어 같은 어종도 많았다. 때문에  곳에는 중소 호족들이 난립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든든한 배경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고, 우에스기와 손을 맞잡은 상태였다.

 

1553 처음 충돌한 이후 1564년까지 거의 2년에   꼴로 카와나카지마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1차부터 시작해 5차까지 이어진 전투 중 클라이막스는 4 전투이다. 신겐과 겐신 양군 통틀어 사상자 비율이 80% 넘나들 정도의 대혈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패를 확인하지 못했다. 무승부라고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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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겐과 겐신은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다.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전투로만 보면 겐신이 미세하게 우세했다. 병력 숫자면에서는 우에스기 겐신이 열세였으나, 용병술 덕분에 전황은 대부분 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때문인지 신겐은 야전에서 겐신을 만나는  껄끄러워 했다.

 

그러나 전쟁의 신인 겐신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바로 에치고(越後)였다. 일본에서  꼽히는 다설지역이라 겨울이 되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울러  땅의 무사들은 ‘자유분방’했.  틈을 놓치지 않고 신겐은 반란을 부채질했다.

 

다시 말하지만, 신겐과 겐신은 상극(相剋)이었다.

 

겐신의 경우에는 명분이 없으면 다른 다이묘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겐에게 명분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생존 앞에서 도덕은 '탁상공론'의 다른 말이었다. 이런 철학 덕분인지 신겐은 전쟁 외의 비상한 수법, 예를 들면 음모나 모략을 꾸며 상대방을 뒤흔드는  좋아했다. 아니면 점잖게 외교로 상대방의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모든 것들은 겐신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겐신은 깔끔하게 전장에서 칼과 창으로 승부를 보는  좋아했다. 평생을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기에 계략이나 음모 자체를 몸서리치도록 싫어했다.

 

이 둘은 성격 또한 달랐다. 신겐은 천하통일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겐신의 경우는  엄청난 능력 가졌음에도 ‘은둔형 외톨이 모습을 보여줬다.

 

신겐과 겐신이 서로 물고 뜯는 동안 가장  이득을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68 오다의 상경(上京) 당시, 극동 쪽에는 난부(南部) 다테(伊達) 가문이 눈에 띄었지만 전국구로 치고 나오기엔 여건상 문제가 많았다(독안룡 다테 마사무네는 이 때 한 살이었다). 오다의 서쪽에는 고만고만한 군소 세력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오다에게 위협이 됐던 존재들, 신겐과 겐신은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노려보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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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운이라고 해야 할까?

 

군략, 지략, 정치  모든 능력 면에서 전국시대 최강의 장수였던 다케다 신겐은 궁박한 카이와 시나노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고, 전투력 면에서 신겐을 넘어 전국시대 최강을 자랑하던 우에스긴 겐신은 그의 ‘정신세계덕분에 신겐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11 동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군대가 다섯 번에 걸쳐 혈투를 벌인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어쩌면, 전국시대 최강자를 결정하는 타이틀 매치 전인지도 모르겠다. 부상이나 상패는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