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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선 열기가 한참 뜨끈하게 달아오르던 2012년. 나는 호주에 있었다.

 

워킹홀리데이로 호주를 찾은 젊은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내 생활도 특별할 것 하나 없었다. 부모님 돈으로 유학원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호주에서 태어난 한인 2세들을 더더더 부러워하며,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공원에서 캥거루와 노는 야경주캥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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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막 입국한 뉴비들에게 캥거루 투어를 시켜주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게 됐다. 한국에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나타났는데, 인기가 굉장하다고 했다. 어쩌면 올해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고.

 

V3 안철수? 안철수가 언제 그렇게 떴지? 호기심이 가득하던 차에, 그가 책을 냈다.

 

그 이름하야, <안철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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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안철수가 정치에 뛰어들게 됐나 궁금하던 참이었는데, 제목부터 '안철수 생각'이라니. 기대됐다. 호주에서 책 구할 방법을 이리저리 알아보다, 한인 커뮤니티의 중고장터에서 책을 발견했다.

 

시티 중심부 공원에서 판매자를 만났다.

 

 “어때요?"

 

 “직접 읽어보세요 ㅎㅎ”

 

5달러에 쿨거래가 끝난 뒤, 바로 공원 벤치에 앉아 <안철수의 생각>을 읽어 내려갔다.

 

호주의 내리쬐는 태양 아래 페이지 넘기기를 2시간.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내가 첫 번째로 한 행동은 한인 커뮤니티에 다시 접속하는 거였고, 두 번째는 방금 산 <안철수의 생각>을 5달러에 다시 내놓는 것이었다.

 

책은 금방 팔렸다.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공원에 나타난 다음 희생자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나한테 책을 넘긴 사람 웃음의 의미가 이거였구나. 그날 집으로 돌아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안철수의 생각 사서 읽었다. 좋은 말만 다 가져다 써놨다. 무슨 생각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공허하다.’

 

 

2.

 

그 다음은 모두가 목격한 대로다.

 

안철수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후보 사퇴를 했다.

 

2013년 삼성 X 파일로 노회찬 의원 의원직 상실, 그 지역구인 노원 병에 출마, 당선된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 김한길과 공동대표가 된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다.

 

2016년 국민의당 창당, 천정배와 공동대표가 된다. 총선에서 국민의당은 38석을 차지한다.

 

2017년 대선후보로 출마, 21.4% 득표한다. 바른정당과 통합해 바른미래당을 창당한다.

 

2018년 서울시장에 출마, 19.55% 득표한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며 독일로 떠난다.

 

여기까지가 정치 입문 후 10년을 보낸 안철수의 굵직한 히스토리다. 사실 이런 무미건조한 약력보다는 2015년 탈당 때 극강의 땡깡을 보여준 것,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호남 홀대론을 주장한 것, 이희호 여사와 대화를 몰래 녹음하고 왜곡한 것, 제가 MB아바탑니까, 누굽니꽈, 그만 좀 개로피십시오 등의 주옥같은 장면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했는데 다 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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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튼. 요는 안철수, 정치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했고, 바닥도 보여줄 만큼 보여줬다. 밑천이 다 드러났다.

 

여전히 안철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건 니 생각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미 숱한 여론조사로도 드러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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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론조사에서 비호감도 69% 만큼이나 인상적인 건, 세부 데이터다. 안철수는 믿고 기대던 무당층에서 호감 21%, 비호감 57%를 기록했다. 이는 황교안(호감14% 비호감 54%), 유승민(호감21% 비호감47%)보다도 낮으며, 이낙연(호감27% 비호감39%)과는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치다.

 

예정된 결말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안철수에게는 컨텐츠가 없었다. 그가 가진 무기라고는 '새롭다'는 이미지뿐이었다. 아이폰도 1년이 지나면 신형이 나오고 3년이 지나면 구형이라 불리는데, 안철수라고 다를 바 있겠는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안철수의 컨텐츠는 '새정치' 아니냐고. 새정치? 박근혜의 창조경제, 김정은의 속마음과 함께 한반도 3대 미스터리로 꼽힌 안철수의 새정치 말인가? 그 역시 실체 없는 이미지뿐이었다.

 

한 재야 원로는 안철수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

 

적확한 표현이다. 정치 변화의 열망이 안철수라는 현상으로 표출됐던 것이지, 안철수 그 자체가 변화가 아니란 말이다.

 

안철수가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볼매라면 반전을 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철수는 노출이 되면 될수록 지지율이 떨어졌다. 그는... 뭐랄까, 갈비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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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안철수의 최측근으로 불렸던 금태섭 의원은 안철수를 이렇게 회고했다.

 

안 후보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 나는 산책로 바깥에서 울퉁불퉁한 진흙 위를 걸어야 했다. 못 걸을 길은 아니었지만 좀 불편했고 흙먼지 때문에 신발도 지저분해질 수 있었다. 두 시간을 그렇게 걸었다.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오랜 기간은 아니라도 함께 대선을 치렀기 때문에 안 후보의 성품을 어느 정도는 안다. 자신이 편하자고 일행에게 불편함을 강요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라도 누구를 괴롭히는 유형은 전혀 아니다. (...) 안 후보는 단지 내가 불편한 길로 걷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란히 함께 걷는데 옆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지 눈치를 못 채는 것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p.211)

-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 / 금태섭

 

눈치만큼이나 정치력도 없어서 박지원, 윤여준, 이상돈, 유승민 등등에게 이용만 당했다. 화술도 좋지 않아서,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그 화려한 언변(?)이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 결과, 새롭다는 이미지는 구역만리로 떠나고 무능한데 고집만 쎄다는 이미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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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그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 했을 때,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안철수 현상은 끝났고, 정치인 안철수의 역할도 끝이 났다고.

 

 

3.

 

그런 안철수가 2019년 신간을 냈다. 제목은 <안철수, 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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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출발을 의미하는 것일까? 달리기의 의미는 뭘까? 한물간 정치인의 회고일까? 그렇담 제목을 '안철수, 내가 후달리며 배운 것들'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등등. 쓸데없는 호기심인 줄 알면서도 직업병이 도졌고, 책을 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혹여나 마라톤에 대한 책을 찾는 동호인이라면 이 책은 피하라. <마라톤에서 지는 법>이라는 재밌고 유익한 책이 있으니 그걸 읽으면 되겠다. 이 책도 기본적으로는 안철수가 마라톤을 준비하고 대회에 출전하는 이야기지만,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 재미가 없고, 둘째, 재미가 없다.

 

안철수가 마라톤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딱 한 번, 어라? 했던 대목이 있는데, '페이스메이커'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은 앞서 달리는 데 있는 것일까, 아니면 따라오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있는 것일까? 그들을 통해 올바른 리더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충분히 더 좋은 기록을 세울 수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속도를 기꺼이 늦추는 사람, 한 사람이라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앞서 달리는 것 같지만 실제 역할은 다른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사람이 진정 올바른 리더가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이런 페이스메이커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필요하다. (...) 나는 이렇게 또 달리기를 하며 페이스메이커로부터 인생을 배운다. (p.177)

 

- 안철수, 내가 달리기를 하며 배운 것들 / 안철수

 

마라톤 하면 내내 보는 게 페이스메이커니 마라톤 책에 페이스메이커 이야기가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굳이 리더와 연결을 시키고 '인생을 배운다'고 쓰다니. 이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안철수가 달라진 게 아닐까. 마라톤 하며 성장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사람이 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도 않고 흔하지도 않다. 오히려 드물다. 사람은 '겨우' 변하니까. 하지만 9년 동안이나 정치판에서 달린, 아니 후달린 안철수라면 조금은 배우고 깨우쳐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도 그를 지지한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발광체라 착각했던 안철수가 반사체로서 페이스메이커가 된다면, '나 아니면 안돼'라는 태도를 버리고 킹메이커가 된다면, 어쩌면 우리 사회와 정치 발전에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티끌처럼 남아 있는 정치 변화의 열망이 제대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은, 아아주 티끌처럼 작았지만 조금은 하게 됐다.

 

 

4.

 

얼마 후, 안철수가 귀국했다. 그의 손에는 자신의 신간, <안철수, 우리의 생각이 미래를 만든다>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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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직업병이 발동, 제목부터 재미라고는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이 책을 사버리고 말았다. 책엔 그가 에스토니아, 스페인, 핀란드, 프랑스, 독일 등을 다니며 보고 배운 것을 길고 지루하게 써놨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에 갔다. ~를 만났다. 참 뜻깊었다. 우리도 이런 걸 배워서 좋은 나라가 되면 좋겠다. 

 

요즘엔 중학생도 현장학습 보고서 이렇게 쓰면 혼난다. 어쩌면 이렇게 심플할 수 있을까, 나무야 미안해 등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또 다 해버렸네?

 

여튼. 이 책 역시 안철수의 생각처럼 좋고 뻔한 말만 다 가져다 썼다. 이것저것 열심히 공부하고 외워 썼는데, 정작 안철수가 무슨 미래를 만들겠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초에 내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내 관심은,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던, 변화한 안철수의 모습, 이거 딱 하나였다. 안철수 맞춤형으로 표현하자면,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대통령이 될 거야!' 모드가 드디어 막을 내렸는가, 였다. 과연 안철수는 성장했을까?

 

박근혜 말에서 올바른 주어를 찾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겼고, 찾아내고야 말았다.

 

'페이스메이커'를 다시 언급하는 안철수를.

 

정부는 스스로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우리 정부는 아직도 옛날의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정부는 민간에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하고 도전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수레를 앞에서 끄는 역할이 아니라, 이제는 뒤에서 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도우미 정부, '페이스메이커' 정부로 거듭나야 한다. (p.213)

 

- 안철수, 우리의 생각이 미래를 만든다 / 안철수

 

응? 페이스메이커 정부?

 

그렇다. 이게 전부다. 자신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공동체 발전을 위한 역할을 찾아보겠다는 게 아니라, 페이스메이커 정부를 만들겠다는 거였다. 물론 그 역할을 하는 건 안철수 본인이고.

 

여전히 희생은 없고, "열심히 공부한 내가 대통령이 될 거야!"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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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안철수는, 성장하지 않았다.

 

입에 단내가 나도록 달리고, 정치 입문 후 9년간 후달리며 성장했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순진한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총선 국면에 접어들자마자 안철수의 대활약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일찍이 가카께서 대운하를 4대강으로 우라까이 하셨듯(가카께서는 뼈 속까지 친일이라, 불가피하게 일본어를 사용합니다), 새정치를 '중도 실용정치'로 우라까이 했다. 정당 이름을 안철수당으로 했다가 빠꾸를 먹고(국민당도 까였다), 민중당 주황색을 그대로 써놓곤 오렌지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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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입국 한 달 만에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대활약이다. 그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

 

안철수가 변했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했던 어제의 멍청한 나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이제 총선까지 60일. 보수 이합집산에 위성정당까지 톺아볼 사안이 많지만, 멍청했던 나는 반성의 의미로 오로지 안철수만 바라보기로 했다. 내게 이번 총선은 안철수다.

 

안철수당이 약진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 눈여겨 보려는 거냐고?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제의 나만큼 바보인 것이다. 안철수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다르다. 오늘의 나는 그런 헛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이번 총선에서 안철수가 얼마나 많은 헛발질을 하는가. 이것이 내 유일한 관심사다. 놀랍게도 이 기사를 쓰는 동안 안철수가 로스쿨과 의전원을 폐지하고 사법시험을 부활시키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시작이 좋다. 이번 총선이 지나면 안철수의 이름이 구태 정치인 반열에 오른다에 500원을 건다.

 

가라! 안철수여!

화이팅이다! 안철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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