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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가난한 나라였다. 국가예산도 적었고, 월급을 받는 관료의 숫자도 적었다. 문관 관료 숫자만 보면, 500 정도 수준이었다(월급 받는 기준). 작은 정부가  수밖에 없는 구조다.

 

우리가 사극에서 질리도록 보아  문관,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연발하는 수는 5 명이 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 시험    때마다 수십 명 뽑은 신진관료들은 어떻게 자리를 받았을까? 3년에 한 번 식년시 볼 때마다 33명씩 뽑았고, 이외에도 수시로 보는 특별전형까지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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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전부 월급을 주는 자리에 줬다가는 조선은 파산했을 거다 결과 나온  산직(散職 : 직임이 없는 관료자리)이나 무록관(無祿官 : 월급이 안나오는 자리)이었다.

 

조선시대 월급을 받는 관료 자리는 문무반 합쳐서  5천여 명이었. 앞에서 언급한 문관이 5백 명 수준이었고, 나머지 4 5 명은 ‘직업군인이었. 나라 지키는 군인들에게는 최소한 ‘월급 줘야 했기에 국가는 이들에게 돈을 썼다.

 

(그 와중에 중국에서 사신이 온다거나 흉년이 들면 월급을 줄였다. 흉년이야 나라 세수가 줄어서 그렇다 하지만, 중국 사신의 등장에 대해서는... 사신들에게 뇌물을 먹여야 하는데, 뇌물을 만들기 위해서 관료들의 월급을 줄인 거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조선은 ‘강제적으로작은 정부가 됐고, 일정 수준 이상의 지출을 억제했다. 따라서 관료들이 문제를 '알아서' 해결하는 경우가 곧잘 있었다.

 

이런 '문제'에는 군함도 있었다지금 상식으론 이해가  가겠지만, 군함을 ‘알아서만들라고 했. 그것도 우리가  아는 인물에게 말이다.

 

"(상략인하여 연해의 백성들과 물건을 교역(交易)하는  그들이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하는 습관이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썼지만 힘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 최상의 계책은 비선(飛船) 많이 만들어 밤낮으로 바다 위에 띄워 놓고 당선의 어채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에 먼저 비선 20척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본영(本營) 재력으로는 실로 착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영의 유고전(留庫錢) 병영의 별비전(別備錢)  2 (), 상정미(詳定米) 50() 특별히 획급해 주도록 허락하면 제때에 배를 만들어   있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을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간과(干戈)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4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 이주진(李周鎭) 말하기를,

 

"황해 수사가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있는 것입니다만 1년에 거두어들이는 어리(漁利) 4,5 냥에 가까워서  재력이 호곤() 견줄 바가 아닙니다."(하략)

- 조선왕조실록 영조 20(1744) 2 27일의 기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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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지만, 이때는 황해 수사로 바다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부임지를 살펴보니 라가 금한 밀무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를 막을 방도를 백방으로 알아보다 '경비함 20척을 만들어서 집중 단속을 하면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문제는 배를 찍어낼 예산이 없었다는 거다. 박문수는 중앙정부에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400 정도만 내려 보내주면, 경비함 20척을 만들어서 밀수를 막아보겠다."

 

영조는 불쾌했던  같다.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은 알아서 전함을 건조하고, 대포를 만들고, 화약을 만들었다.  와중에 정부에 세금도 보냈는데  그것도 못하냐? 네가 이순신 장군보다  힘드냐?”

 

라고 타박을  거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충당했고, 나무를 잘라 판옥선과 거북선을 건조했으며, 틈틈이 중앙정부에 세금도 보냈다. 이순신이 중앙정부에 요청했던  화약을 만들기 위한 유황과 의원(전염병이 돌았다)이 전부였다.

 

박문수란 녀석이 나름 유능한 놈인  알았는데 겨우 이런 일로 지원요청을 ? 실망인데?”

 

영조의 심기를 살피던 형조 참판 이주진이 슬쩍 박문수를 변호하면서 사안의 본질을 말한다.

 

박문수가 부임한 지 얼마   상태라 아직 업무파악을    같습니다. 그쪽 함대가 시간  때마다 고기잡이를 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연간 4~5천 냥은 되니 이걸 쓰면  건데... 아직 업무파악이  돼서 그런 거니  알려주면   같습니다.”

 

조선시대엔 지방에서 필요한 예산 같은 건 어지간하면 지방 내에서 해결했. 자체 수익 사업을 통해서 예산을 확보하든가 아니면 다른 방도를 찾았.

 

어딘 ‘애잔한 감정 느낄 수도 있겠지만, 조선은 '적게 거두고 적게 쓰는' 방식으로 운용하던 나라였다. 또 지방관청에겐 자체적으로 예산을 조달할 방법이 많이 있었다.

 

군함까지 알아서 만들라는  심한  아닌가?”

 

라고 말할  있겠지만, 조선은 그게 가능하도록 예산확보의 수많은 방법을 생각하고 시행했다. 작은 정부지만 있어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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