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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vN 사랑의 불시착 공식 홈페이지

 

 

<사랑의 불시착>이 끝났다. ‘이건 판타지다.’라는 주문을 계속해서 되뇌지 않으면 드라마에 몰입하기 어려울 정도의 내용이긴 하지만 또 동시에 남과 북의 특출한 가문의 선남선녀를 제외하면 거기서 거기인 장삼이사들의 캐릭터들을 잘 구현해 내서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는 느낌을 심어 준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푸념한 대로 인간도 아닌 ‘늑대’였던 인민군 장교가 현빈같은 훈남으로 현신하는 데에도 40년 세월이 필요했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북한 출신 남주인공이 나 정도 수준으로 등장한 건 꽤 된다. 공유, 현빈, 정우성, 김수현 등이 그들이었으니까. 이를 두고 어느 덜떨어진 깃발부대원이 “왜 북한 놈들을 잘생긴 배우로 쓰느냐.”고 항변하는 것도 들었다.

 

기본적으로 로맨틱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지 않지만 남과 북이라는 무대가 설정되니 아무리 식상한 스토리라도 눈길이 갔다. 재벌 2세와 총정치국장의 아들 딸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뤄지지 않을 재회까지 하는 것이 좀 눈꼴시긴 했지만 그래도 둘의 알프스 키스 신을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짠해져 왔다.

 

남극도 가고 아프리카도 가는데 이 좁디 좁은 한반도를 관통할 수 없는 우리네 신세가 처량해지기도 하고, 또 “표치수도 남한 처자하고 짤막하게라도 연애하게 해 주지. 연애도 돈 있고 빽 있어야 하냐” 툴툴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손예진과 현빈의 물불 안가리는 사랑에도 미소가 지어지더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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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vN 사랑의 불시착 공식 홈페이지

 

드라마에선 억지로 이뤄주긴 했지만 시작했더라도 깨질 수 밖에 없고 아무리 깊어도 메워질 수 밖에 없는 북쪽 남자와 남쪽 여자의 사랑 이야기의 마지막회를 보노라니 문득 조선 시대에 있었던 남쪽 남자와 북쪽 여자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가 떠올라서 끄적이게 된다. 조선 선조 때 전라도 영암 사람 최경창과 함경도 홍원 기생 홍랑의 사연.

 

최경창은 당대에 이름 높은 시인이었다.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꼽혔고 성격은 지질했지만 머리 좋고 글도 잘했던 선조 임금 역시 그 재능을 아꼈다. 그런데 송강 정철이 그랬던 것처럼 이 사람도 주변머리는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서인(西人)으로 명확하게 입장 정리한 것도 아니었지만 동인들은 그를 미워했고 틈만 나면 그를 헐뜯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천재라 할 허균, 허난설헌의 동기였던 허봉 (동인이었다)이 최경창과 사귀기를 청했으나 뚝뚝하게 뿌리쳐 버릴 만큼 최경창도 센스가 없었다. 칼을 품은 허봉은 최경창의 벼슬길 고비 고비마다 고춧가루를 뿌렸고 시 읊는 재주에 비해 정치력은 현저히 부족했던 최경창은 늘 한직을 맴돌았다. 허봉같은 젊은이 뿐 아니라 이산해같은 고관대작이 잘 지내세 손을 내밀어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니 융통성은 제로였던 셈이다.

 

이러니 지방관직을 가도 물산 풍성하고 놀 것 많은 고장이 아니라 조선에서 가장 궁벽한 산골의 고장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함경도 병마평사, 즉 병마절도사의 보좌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런 케이스였다. 서울서 출발해서 철령 넘어 함흥에 들렀다가 홍원 지나 경성(鏡城)까지 가는 근 2천리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하지만 그 문명(文名) 덕분인지 각지의 사또들이 잔치를 열어주며 대접해 주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렇지 최경창은 매력남이었다. 글씨도 잘 쓰고 거문고도 잘 탔고 피리도 잘 불고 심지어 활도 무신보다 잘 쏘았다고 한다.

 

홍원에서 홍원 현감이 베푸는 잔치가 벌어졌다. 주안상이 차려지고 사대부들 잔치답게 시(詩)의 향연이 펼쳐졌다. 기생들 역시 기본적인 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들이 많았기에 장단을 맞춰 주었는데 한 기생이 읊어내리는 시가 글쎄 최경창의 시 아닌가.

 

최경창이 짐짓 너는 누구 시를 좋아하느냐 하니 기생은 ‘고죽 선생’을 댔다. 고죽(孤竹 : 참 호 한 번 자기 성격대로 지었다)은 다름아닌 최경창의 호였다. 그제야 최경창이 크게 웃으며 자기 신분을 밝히니 기생은 갑자기 친구 생파 자리에서 현빈을 만난 고딩 정도의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리고 이 만남을 계기로 홍랑은 고죽 최경창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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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도 마찬가지였다. “만력 계유년(1573)에 북도평사로 갈 때 홍랑이 따라와 부임지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관기가 누굴 맘대로 따라갈 수 있었겠는가. 홍원 현감에게 특별히 청을 넣었으리라. “아따 좀 부탁하요이.”

 

2년간 병마평사로 있으면서 꿈같은 세월을 보낸 두 연인이 헤어져야 할 때가 왔다. 서울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두만강에서 멀지 않은 경성에서 출발한 최경창을 홍랑은 울며 울며 따라왔다. 쌍성(쌍성총관부의 그 쌍성이니 함경남도 영흥)까지 왔으니 함경도를 종단한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쌍성에서 이별할 수 밖에 없었다.

 

홍원과 함흥·원산을 잇는 관북 중부해안지방의 중요한 종단교통로인 함관령을 홍랑은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홍랑의 위수지역(?)의 한계였다. 북도 주민들은 함부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없는 것이 국법이었다. “울지 말랑게.” “일 없슴다.” “인자 싸개 가더라고.” “조금만 더 있겠슴둥.” 뭐 이렇게 전라도 사내와 함경도 여자는 눈물의 이별을 했을 것이고 최경창은 함관령을 향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함관령 아래 거처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는데 종놈 한 명이 달려와 종이를 건넨다. 홍랑이 보내는 이별가였다. 우리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조 한 수.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대

(산버들 골라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자시난 窓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예 새 닙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밤비에 새잎 돋거든 나인듯 여기소서)

 

<사랑의 불시착>에서 현빈이 손예진에게 준 에델바이스 화분처럼 홍랑은 묏버들을 꺾었다. 이 절절한 시와 묏버들 앞에 최경창의 마음은 오죽 진동했으랴. 최경창은 이 시조를 한시로 번역해서 답한다.

 

折柳寄與千里人 버들 꺾어 천리 길 떠나는 님께 드리니

人爲試向庭前種 나를 위해 앞뜰에 심어두소서

須知一夜新生葉 하룻밤 새 새 잎이 돋거든

憔悴愁眉是妾身 사름어린 눈썹이 신첩인줄 아소서

 

그런데 서울에 돌아온 최경창이 덜컥 병이 났다. 과로도 했겠지만 상사병이 컸겠지. 병 안나면 이상하지.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목숨을 건 함경도 탈출을 감행한다. 남장을 하고서 함관령을 넘어 강원도 땅 경기도 고을을 거쳐 한양에 들어온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여자를 내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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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창은 홍랑을 첩으로 맞아들여 함께 했는데 이는 동인들의 맛좋은 먹잇감이 된다. “국상이 났는데 (명종비 인순대비의 사망 즈음이었다) 북도에서 기생을 데리고 와 첩으로 데리고 사는데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때쯤이면 최경창도 자신의 주변머리를 탓하며 “안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를 노래했을 것이다. 홍랑은 북도로 돌아가야 했다. 또 한 번의 이별. 이번에는 최경창이 먼저 이별가를 내민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운 난초를 건네노니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함관의 옛 노래는 부르지 마소

지금도 구름과 비에

푸른 산이 어둑하니

 

이 두 연인을 하늘도 동정했음인가. 최경창은 두만강가 종성 부사로 임명된다. 철령을 넘어 용흥강을 넘어 마천령을 넘어서라도 홍랑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달려갈 거야 부르며 한달음에 달려갔겠지만 하늘의 동정도 인간들의 적대감 앞에서는 무력했다. “종성부사면 종3품입니다. 최경창 따위가 그런 관직에 어울리기나 합니까?”

 

최경창은 부사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서울로 불려 올라오게 되는데 이별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일까 먼 거리의 여독 때문일가. 그만 상경길에 객사하고 말았다.

 

그 무덤 앞에 상복 입은 한 여자가 나타난다. 홍랑이었다. 얼굴에 상처가 두드러지는 흉측한 얼굴이었다. 홍랑은 행여 사내들의 눈길을 받을세라 스스로 얼굴을 망가뜨렸고 장장 9년 동안 그 묘를 지킨다. 이쯤 되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의 수준이 아닐까도 싶지만 홍랑은 더욱 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다.

 

온 나라를 뒤집은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그녀도 묘 앞을 떠났지만 그 험한 전란 기간 내내 최경창의 유고들을 간직했고 전쟁이 끝난 뒤 최경창의 가족들에게 전하고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반상의 질서가 마천령 산맥보다 높았을 때였으나 최경창의 해주 최씨 가문은 홍랑을 집안 사람으로 인정했고 최경창 부부 묘의 발치에 홍랑의 묘를 조성해 주었다. 아마 최경창 옆의 본부인도 그 정도는 눈 감아 주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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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링크

 

분단 시대 남과 북을 잇는 사랑이 없지는 않았다. 캄보디아 북한 식당에서 가이드와 눈 맞아 사랑하다가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는 아가씨도 지금 어딘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엮고 있을 것이고, 장기수 송환 때 생이별했던 부부는 지금도 묏버들을 꺾고 다니며 서로의 안부를 그릴 지도 모른다.

 

그 사랑들이 언젠가는 역사의 추억으로 남겠지만 웬만하면 ‘남극보다 아프리카보다’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연락도 하고 편지도 주고받고 전화도 하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통일이야 언감생심이더라도. 홍랑과 최경창처럼, 리 대위와 윤세리처럼 애절한 사랑의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