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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뷰] 무붕 2003 두 번째 빠따-이승환 편

2003.6.9.월요일

딴지일보 콘서트 "무붕 2003" 조직위원회
 

 

 

모든 준비는 끝났다.

 

딴따라판을 거의 점거한 우끼고 자빠진 붕어떼 앞에 안 우끼고 빨딱 선 진짜 아뤼스트의 반듯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짐한 콘서르.

 

우렁찬 목청과 땀내 나는 호흡의 고강도 라이부 싸운드로 한 쌍의 초라한 아가미만 뻐꿈거리는 사파 무리들의 고강도 사정작업에 나선 그 이름,    

 

"무붕 2003"

 

 

 

 

지난한 장도에 오른지 어언 한 달여, 이제 모든 준비 작업은 종료되었다.

 

오는 6월 16일 17일 당 행사의 화려한 막을 올리기에 앞서 범국민적 붐 조성에 맞장구치며 기획된 본 시리즈 기사의 마지막, 공장장 이승환의 뽕빨 이너뷰를 공개하는 바이니 똥꼬털 가지런히 빗어넘기고 당 기사를 영접하라.

 
 

본 이너뷰는 강동구에 위치한 드림팩토리 스튜디오에서 1시간 반 가량 이루어졌다. 대중 스타로서의 고뇌와 뮤지션으로서 지닌 음악적 고민, 드림팩토리라는 기획사의 대표 운영자로서 갖는 음악시장에 대한 진지한 탐색 등 다채로븐 그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으시겠다.

 

 

 

 전인권의 노래에 경악하다

 

 

 

 

딴지일보는 자주 보는 편이신가요

 

가끔 보죠. 남로당에서 메일 오면요. 자주는 못 봐요.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웃음)..

 

 

 

한국외대 록 그룹인 아웃사이더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를 비롯해서 데뷔 이전의 음악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음악하는 건 물론이고 음악 듣는 것도 워낙에 싫어 하셨어요. 중 2때 첨 기타를 샀는데 아버지가 기타를 갖다 버리셨어요. 그래 가지고 맨날 음악 듣기만 하다가 훗날 팝칼럼니스트가 되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그냥 있었는데 대학교 들어가니깐 그래두 취미로는 괜찮다.. 이렇게 허락을 해주셔서 그때 이제 첨 기타배우고 건반배우고 하면서 시작했던 거죠.

 

학내 밴드였던 아웃사이더가 1기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오디션을 봤어요. 근데 떨어졌어요. 할줄 아는 게 없으니까 당연히 보칼로 갔던 건데.. 근데 그나마 떨어져버려서 생애 첨이자 마지막으로 뇌물을 썼죠. 종로 낙원상가에 가서 그때 흔히 말하던 꾹꾹이(-편집자주: 기타 이펙터), 당시는 다 경남디스토션 이런 거였는데 제가 보스를 사서 줬어요. 당시에 5-6만원 했던 엄청나게 비싼 거였는데 그걸 줘서 결국 뒤로 들어간 거죠, 보칼로. 그래서 그 밴드 1기는 보칼이 두 명이었어요(웃음). 원래 뽑혔던 애가 있는데 제가 그거 주니까 쟤도 뽑자 그래 가지구.

 

그렇게 좀 이상하게 시작하다보니깐 오히려 상대적으로 피해의식 때문에 굉장히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나요. 근데 주위의 다른 멤버들은 별로 연습을 열심히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음악하는 거는 사실 여자한테 잘 보일라고 하는 건데.. 저도 물론 그런 맘이 있었지만,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하고 그러다 보니까 제가 좀 미운 오리새끼 같이 취급받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사실 팀 생활에 적응을 잘 못 했고요 계속 겉돌았던 것 같아요.

 

원래 음악 첨 시작하고 1-2년 때가 젤 위험한 시긴데, 우리가 최고야 이렇게 생각하는 시기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왜, 하는 실력만큼 음악이 들린다고 하잖아요, 듣는 귀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당시는 저두 그런 상황이었고 밴드도 다 그런 수준이었죠. 그러다 85년도에 아웃사이더를 관두고 밖에서 SS라는 팀을 했었어요.

 

당시 파고다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메탈 프로젝트라는 모임에 속해 있을 때죠. 거기 함게 활동하던 밴드가 셀프 서비스라고 손무현이네 팀, 디자드라고 오태호하고 신윤철이 있던 팀이 있었죠. 근데 그 소속이래봤자 연습실 갈 돈이 없어서 한 두번 연습하고 공연하고 이런 식이었고..

 

86년도에는 아카시아라고 오태호랑 팀을 했었고 또 손무현이랑 팀을 딱 하루 같이 한 적이 있었어요. 제가 노래 못 한다고 무현이가 팀을 하루만에 깼던(웃음)... 하루 연습을 같이 해보더니 연락을 안 해요(일동 웃음).

 

그때 당시엔 사람들이 저한테 되게 뻥스럽다고 말 했어요. 너무 가요스럽게 노래 한다고. 사실은 그때부터 콧소리가 있어 가지고.. 그래서 딴 팀이 막 블랙 새버스 이런 거 할 때 저희팀은 건반이 위주가 되는 음악을 하거나 아니면 제가 소화할 수 있는 UFO정도.. 머 그런 쪽 음악을 많이 했었죠.

 

 

 

데뷔 음반을 낸 것은 그 89년도 인데요, 그때는 이미 음악색이 록하고는 거리가 먼 가요 스타일이었는데요. 그 공백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저도 그 전까지는 가요음반을 잘 안 들었어요. 동서남북이나 듣고 김수철이나 듣고.. 사실 작은거인도 고등학교 때 첨 들었는데 저만 왕따였어요. 다 송골매 팬이었는데 나만 작은거인 듣는 다고..

 

그런데 86년도에 이문세씨의 앨범이 나왔지요. [소녀]하고 [휘파람]있던 그 음반. 제가 원래 발라드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 음반을 듣고 좀 바뀐 거죠. 또 태호가 86년 그때 첨 발라드를 듣기 시작했던 거죠. 걔는 사실 저랑 첨 연습하고 그럴 때 엘튼 존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둘다 아마 이문세씨 음반을 듣고 좀 감화가 된 거 같아요.

 

그래서 태호도 곡을 그런 식으로 쓰고, 태호가 먼저 공중전화라는 팀을 했는데요. 거기서 이제 완전히 그런 곡들을 쓰기 시작했고 태호가 먼저 앨범을 내니까 저도 되게 앨범을 내고 싶다는 충동이 마구마구 일었을 때였죠. 그러다보니 이제 저도 곡을 쓰는데 자연스럽게 발라드 밖에 안 쓰고 있더라고요.

 

첨 곡을 쓴 건 88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쓰자마자 데모 테입을 갖고 수십 군데 기획사를 전전했죠. 그때 어느 기획사에서는 지켜보겠다고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거기 출근하다시피 해서 매번 가서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오고.. 머 그런 생활을 1년 정도 했어요.

 

원래 오태호씨도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였지요  

 

예. 정말 아까운.. 라이트핸드는 걔가 최고였다고 당시에 그랬었어요(웃음).

 

 

 

그러면 이문세씨 음반의 영향으로 음악 색이 그렇게 변한 것입니까?

 

글쎄요 그렇다기 보다는, 저는 취향이 이전부터 발라드 쪽에 가까웠어요. 일단 동아기획에서 나오는 음반은 다 샀었고. 어떤날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게 조금씩 쌓여왔던 거고 결정타를 맞은 거는.. 오히려 태호가 바뀌었던 계기였을 거예요, 그 이문세씨 음반이. 이문세씨라기 보다는 이영훈씨.

 

저는 태호가 그렇게 바뀌고 판을 내는 걸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부러웠던 맘이 더 컸지요. 사실 저의 경우는 그때 86년까지만 해도 프로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전에 메탈 밴드를 하고 그럴 때도 프로로 해야겠단 생각은 없었어요. 태호가 자기 앨범을 저한테 갖다 주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은 거죠. 앗, 나도 가수 해야지. 그냥 앨범이라도 하나 갖고 있으면 좋겠다.... 이 정도 생각이었던 거죠, 되게 막연하게. 앨범 딱 하나 만들고 학교가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머 이런 생각(웃음)

 

 

 

그보다 더 이전, 그러니까 누구나 아주 어릴 때 뭔가를 듣고 딱 꽂혔다,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첨 중 2때 아버지가 전축을 사오셨는데 그때 들었던 음악이 빌리지피플의 [와이엠씨에이]였어요. 너무 멋있었어요. 그래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어릴 때니까 자연스럽게 이제 비쥬얼 쪽으로 좀 더 나은 게 더 좋잖아요? 그래서 키스를 되게 좋아했어요.

 

제가 요즘에 한 2년 전부터 공연 할 때 혀를 낼름거리는데..

 

 

 

진 시몬스(키스의 베이시스트)처럼 말입니까

 

예. 그러니까 어렸을때 키스의 그 공연 모습을 너무 동경한 거예요. 피 막 뿌려대고, 기타에서 불 나가고....

 

키스의 일본 공연테입을 구할라고 명동 지하상가를 돌아다니고 외국책 파는 데서 키스가 관련된 책은 다 사고 그랬어요. 헌책방도 다니고. 지금까지도 공연의 이벤트적인 연출이라든지 그런 부분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머 그렇게 자연스럽게 록을 들었던 거고, 그러다보니 딥 퍼플을 알게 되고.. 아, 레드 제플린은 안 들었어요. 제 취향에 안 맞았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레드 제플린을 들었다면 좀 더 음악성이 좋아지지 않았을까, 제가.

 

그 다음에 좋아했던 건 데이빗 보위였죠. 어릴 때는 그 사람이 머 글램 록의 선구자고 사상이 어떻고 이러는 게 되게 좋아 보이잖아요. 그래서 데이빗 보위 판을 다 사모았죠. 근데 사실 그때는 그 음악을 이해 못 했어요, 들으면서도. 사운드가 너무 이상해서(웃음). 이거 뭐지? 이러면서 들었는데 요즘에 들으면 알겠더라고요. 굉장히 시대를 앞서 갔던 사람이었고 그떄는 참 무지몽매하게 음악을 들었구나 이런 생각도 하죠.

 

누구나 그런 게 있잖아요. 되게 난 척하고 싶은 그런 마음요. 그래서 재즈 동호회까지 들어가기도 했어요. 월간팝송에 난 모집광고를 보고. 그 모임에 딱 나갔는데, 누가 노래를 젤 잘하는 것 같냐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이클잭슨이랬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절 완전 버러지 취급...(웃음)

 

머... 어릴 때 부터 음악을 그렇게 깊게 듣고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아요. 아, 맞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계기가 됐던 거는 84년인가 85년인가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거기서 들국화와 무당의 공연을 봤는데. 전인권 형님의 보컬을 듣는 순간이었어요. 앗, 저거다..

 

 

 

흉내를 내보신 적이 있겠군요

 

당연히 많이 따라 했었죠. 연습을 가장 많이 했던 게 김현식 선배님하고, 전인권 선배님하고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예요. 음반 틀어놓고 카피를 했었죠. 오지 오스본도.

 

근데 전혀 안 나오더라고요. 사실 전인권 선배님같은 경우 노래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잘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사실은. 건강이 안 좋으셔서 그러셨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때가 있었고.. 근데 제가 트리뷰트 앨범을 하면서, 사실은 [사랑한 후에]를 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저 한테 배당된 곡이. 근데 도저히 못 하겠다라고요. 너무 원곡하고 비교가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잽싸게 전화를 해서 [사랑일 뿐이야]로 바꾸겠다고 했죠. 그 노래가 최성원 선배님이 부르는 부분이 많잖아요? 그래서 전인권 선배님이 하는 부분은 아주 잠깐만 부르고 나머지는 합창으로 메꾸고 뭐 그렇게 하기도 했죠.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말 하면 좀 죄송스러울 수도 있겠는데 김현식 선배님 트리뷰트할 때는 그런 거 못 느꼈거든요. 큰 부담감 없이 했는데.

 

전인권 선배님이 공연 때 나오셔서 [사랑일 뿐이야]를 같이 불러주셨는데 모든 멤버가 완전 경악하는 상황이..

 

(웃음) 옆에서 듣고 있는 제 이어폰으로 울리는 그.. 그냥 부르시는 데도 절절한 삘하며 빠워가 정말 장난이 아닌 거예요. 그 공연하다가 다시 한번 감동받아서, 아, 나는 발톱의 때다.(웃음)

 

 

 

 누가 뭐래도 나는 가수




 
 

 

뮤지션으로서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보칼리스트, 작곡가 또는 음악 감독 등등.. 또 그것들 가운데 활동하면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는 어느 쪽입니까

 

뭐 그냥 가수죠.

 

지나친 겸손은 세련된 거만과 다르지 않슴다(웃음)

 

아니죠.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제가 운이 참 좋았다란 생각을 하는 거죠. 우리나라의 음악인들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고요 한국에서 태어나길 참 잘했다라는, 다행이다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국에서 많이 작업을 하는 편인데요. 물론 우리 국악을 걔네들이 한다면 우릴 따라잡기는 힘들겠지만 우리가 어차피 그네들의 형식을 빌려서 음악을 하고 있는 게 지금 대중음악의 모습이니까 그네들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지요. 하지만 거기 들락거리면서 제가 우물안의 개구리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예요.

 

제가 싫어하는 사자성어가 두 개 있는데요 배은망덕하고 오합지졸. 근데 그 중에 하나에 제가 해당이 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같다 올 때마다 자극받고, 충격받고, 좌절하고 오거든요.

 

 

 

이전에 어느 뮤지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천일동안]의 드럼파트를 미국 최고의 세션맨(비니 콜라타)에게 맡겨뒀다가 나중에 그걸 덜어내 버리고 딴 사람 걸로 교체했다고 들었는데요. 머 그 정도 안목이면..

 

예. 그랬어요. 뒤에 딴 사람 연주로 바꿨는데, 그거야 뭐 세션맨이라고 해서 모든 장르의 음악을 다 소화할 수는 없는 거고, 특히나 동양의 감성하고 서양의 감성은 너무 틀리니까.

 

첨에 4집 녹음하러 갔을 때 생각하고 있었던 거는, 이전에 외국에서 작업한 부분들이 제 음악의 정서와 서로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연주와 노래가 따로 놀고 믹싱하는 방식도 틀려서 나오는 그런 오류 말이죠. 그런 교훈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많이 희석시키고 가자.. 하는 전략이었어요.

 

그때 (정)석원이하고 저하고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었는데요. 플레이어를 고를때 부터 동양 걸 많이 한 사람을 골랐구요 세션맨들 가운데 아주 많은 수가 우리 쪽 감성하고 안 맞았어요. 시행착오가 엄청 많았었고 이걸 할 수 있겠지라고 예상하고 맡기면 이상하게 못 해내더라고요.

 

비니 콜라타는 그루브가 너무 심했어요. 그래서 뺄 수 밖에 없었어요. 계속 그게 아니라고 했는 데도 하질 못 하더라고요. 그 양반이 너무 스팅 음악에 익숙해 있던 시절이라서(웃음). 그때 당시 스팅의 드러머였거든요.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음악해오면서 보칼리스트이기도 하시고 작곡도 하시고 프로듀서도, 공연 연출도 직접 해오셨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분야가 있을 것 같은데요

 

신경쓰는 분야는 역시 가수죠. 제가 책임지고 제 목소리를 들려줘야하는 거니까. 그래도 가장 애착을 갖는 분야는 오히려 공연 연출 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그리고 가수라고 딱 이야기하고 나면 겪는 애환이 나름대로 굉장히 많거든요. 공연같은 경우는 드러나지 않고 뒤에서 움직이는 장점이 있죠.

 

또 제가 첨 데뷔할 때의 마음가짐은 대중들 앞에 별로 드러나고 싶은 욕구가 없었어요. 첨에 1집을 냈을 때는 들국화 선배님들 같은 경로로 성공하겠다, 공연만 해서 활동을 이어가는 그런 방식 말예요.

 

대중들한테 많이 안 드러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 거는 내가 누구한테 칭찬받을 일도 없지만 욕 안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런 맘이었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그러다 보니까 뒤에 숨어있는 그런 일에 더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내가 내 공연을 연출하고 남 것도 연출해 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가수로서의 애환이라고 한다면 다수 대중들에게 노출될 때 느끼는 인간적인 부담감 같은 것입니까

 

부담감이기도 하고 혹은 머 비난을 받을 때의 괴로움이기도 하죠. 제가 워낙 그런 거에 익숙하지 않고 익숙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에. 또 공장장으로서 받는 비난이 실제 크지만, 가수로서 받는 경우는 리뷰나 그런 평들이 왜곡되서 나가고 열심히 만든 음악인데 욕 먹고 그럴때 사실은 굉장히 힘들 거든요.

 

오히려 평하시는 분들은 잘 하는 사람 도닥여주기보다는 잘 하는 사람 눌러서 자기가 더 돋보이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나라 분위기에서 이쯤하면 참 열심히 하는 거고, 제 주위의 음악인들도 잘 해보려고 하는 건데 그게 오히려 더 욕을 먹을 때 의욕을 잃게 되거든요. 공연 연출은 그럴 일이 없잖아요(웃음). 물론 이게 비겁한 자세이긴 한데 이유없이 욕먹을 땐 좀 그래요.

 

꼭 그렇게 비난을 받는 것 말고도 대중들에게 드러나기 때문에 제가 희화화 될 수도 있고 정말 얼토당토 않은 가십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그런 거 사실 좀 그래요. 좀 조용히 음악했으면 하는 그런 생각. 물론 지금에 와서 이런 이야기하는 건 이율배반이지만, 알려질 대로 알려져 놓고(웃음). 근데 첨부터 마인드 자체가 그랬어요.

 

 

 

 MR로 공연해도 밴드가 있어야

 

초기에 올웨이즈라는 고정된 밴드를 오랫동안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밴드에서 배출된 훌륭한 뮤지션도 많고요. 밴드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또 현재도 공연시 전담 밴드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밴드를 고집하는 이유도 말씀 해주십시오

 

밴드를 꾸리면 인간적인 갈등도 많고 경제적인 출혈도 크고 그런 게 사실인데 밴드를 놓을 수가 없는 이유는 때때로 동지 같고 가족같은 걸 서로 느끼면서 공연을 하면 보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더 큰 기를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제 공연의 특징이라고 하면 밴드도 전면에 나서서 저와 똑같은 위치에 서는 거니까. 그렇게 어우러져서 하는 게 너무 좋고 일단 혼자하면 불안하기도 해요. MR로 노래하는 게 1년에 3번 정돈데 하다 못 해 MR로 하더라도 뒤에 밴드가 있으면 좀 안정되고 기분이 편안하고 그래요.

 

저에게 밴드는 버팀목 같은 존재지요.

 

 

 

물론 이승환씨는 솔로 작곡가이기도 하지만 파트너와 함께 작업하는 걸 즐겨하시고 또 그 결과물이 상대적으로 좋았습니다. 초기엔 오태호, 중기엔 정석원 등여러 작곡가들. 5집에서 유희열과 함께 한 이후 쭉 오고 있는데요, 작업 파트너와의 관계는 어떠한 음악적 동기에서 오는 것입니까. 즉 누군가를 선택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 누구와 더 이상 같이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음악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말씀 해주십시오

 

사실 많은 분들이 제가 혼자 곡쓰고 한 1집을 바라는 측면도 있어요. 또 1집처럼 하면 지금보다 더 높은 판매고를 올릴지도 몰라요. 그게 진짜 제 감성인지도 모르고.

 

근데 사실 좀 폼나는 걸 하고 싶었어요. 그러다보니까 혼자로는 한계에 부딪혔고, 아마 석원이하고는 공동작업을 한 게 거의 없을 거예요. 둘이 만나면 티격태격하니까. 젤 친한 뮤지션이기는 하지만 그냥 같이 공동프로듀서를 한 정도지 같이 작곡을 하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희열이 같은 경우는 되게 남의 걸 잘 흡수하고 배려도 잘 하고 이런 스타일이라서 자기가 고집을 잘 안 해요. 제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같이 가는 편이 거든요. 태호도 따로따로 작곡하는 스타일이었고 곡을 받아서 제가 추려서 그 중에 하나를 뽑는 쪽이었어요.

 

4집을 지나면서, 사실상 그 앨범이 제 나름대로는 음악적으로 한 단계 뛰어오른 앨범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5집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컸던 거예요. 그러면서 그 한계를 느낀 거고.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공동작곡은 거의 없었는데 희열이의 능력이 필요했던 거죠.

 

그런데도 희열이와 제가 그때 가지고 있던 생각은 한편으로 쉽게 만들자.. 너무너무 쉽게 만들자.. 그런 거였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가장 힘들어 했던 앨범이에요. 그 앨범이.. 그래서 앗 이게 아닌개벼 했죠(웃음)

 

그때부터 사실 앨범 판매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죠. 4집이 한 90만장 나갔는데 5집이 한 65만장? 그렇게 추락을 한 거죠. 6집은 40 몇 만장?... 계속 떨어졌죠. 왜냐면 사람들이 보기에 제 음악에 대한 인식이 바꿨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이 들을 게 없다는 거예요. 근데 4집이 나왔을 때도 기사를 보면 "[천일동안]하나를 빼면 들을 게 없는 음반" 이렇게 평이 나오기도 했거든요. 호불호가 너무 명확하게 돼버리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담에 남게 되는 거는 이제 매니아 층인데 그들이 바라는 거는 좀 더 완성도 있고 잘 만든 그런 음악을 원하니까요. 지금까지 사실상 그런 측면을 바라고 공동작업을 해왔다고 할 수 있어요.

 

 

 

공동작업시 구체적인 방식은 어떻게 됩니까

 

일단 두가지 정도가 있는데요, 제가 테마를 잡아가서 그거를 서로 붙이는 작업을 할 때가 있고, 아니면 아예 아무 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저는 멜로디만을 하고 희열이가 코드를 잡기도 하고. 제가 원하는 진행을 어느정도 길을 잡아주면 구체적인 부분은 희열이가 나가기도 하고.

 

 

 

작곡은 건반으로 하십니까

 

예, 피아노로 하죠

 

 

 

6집의 [당부] 등 발라드 곡에서 들리는 차이나 풍 편곡은 대체로 국내선 처음이었는데요 이런 발상은 어떻게 나왔는지요. 이후 이소은이나 이수영도 이런 편곡법을 채택해서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아이디어는 발등에 불 떨어지면 하는 편이예요. 전체적인 컨셉을 먼저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막연히 여러 생각을 하다보면 그냥 오리엔탈한 그런 색깔과 머 세계가 아시아로.. 어쩌고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냥 떠오른 거죠. 사실은 굉장히 단순한 건데..

 

이거 밝히면 안 되는데.. 사실은 전에 친구한테 장난 친다고 이거 새로 만든 곡이라면서 들려 줬는데요. 뽕짝 곡을 만든 거예요. 장난으로 만들어서 들려 주면서 막 놀리고 그랬는데 그걸 희열이한테 쳐 보라고 줬었요. 근데 그걸 희열이가 코드를 막 꼬면서 치니까 또 굉장히 좋게 들리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와 이거 요번엔 이렇게 가자라고 했던 게 발단이었던 거예요.

 

 

 

 좀 더 쉬운 음악을 해야되지 않을까

 

어린왕자라는 별명 말인데요, 이게 공장장으로 바뀌었는데요

 

 

아휴 그거 안 하겠다는 말은 제가 한 10년 전부터 해왔고요, 그 이름이 제 음악에도 발목을 많이 잡았었죠. 어린왕자가 무슨 락? 발라드 해야지.. [플란다스의 개] 불러야지.. 그런 분위기가 있었는데 4집, 5집부터 음악이 좀 시니컬해지면서 거기에 실망해서 떠난 팬들도 있어요.

 

저에 대해 순수함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근데 순수할 수 있겠어요? 서른 아홉에?(웃음) 때도 좀 많이 묻고 그런 거죠. 공장장이라는 별명은 나름대로 무난하고 좋은 것같아요. 어린왕자는 너무 송구스럽고 민망해요.

 

 

 

왜 이런 이야기를 드렸나면 그게 단순히 팬들이 지어준 애칭의 차원 뿐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에 까지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역으로 음악에서 연상되어진 거란 말인데요. 예를 들어 뮤직비디오에 들어 간 동화적인 감성과 소녀가 등장하는 환타지 등이 어린왕자라는 말과 잘 맞았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게 공장장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면서 음악적인 부분도 변화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음... 제가 원래 좋아하는 분위기는 바뀌지 않을 거예요. 사실은 늘 발라드가 타이틀이 되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아요.

 

엽기스런 것도 제가 추구하는 것 중 하나이고, 공연이나 드림팩토리의 다른 뮤비같은 것도 보면 그런 게 많은데요. 그게 많이 알려지지 않다보니깐 그런 건데 저는 오히려 뭐 마릴린 맨슨도 좋아하고 그로테스크한 걸 되게 좋아하거든요. 근데 실제로 그런 걸 하면 사람들은 또 경악하면서 등을 돌릴수도 있겠죠?(웃음).

 

실제 라이브에서도 저희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어요. 지난 번 어떤 공연에선 무대 뒤쪽에 커다란 눈 모형에서 피가 새어 나오는 연출, 또 제가 총을 맞고 피를 터뜨리는 퍼포먼스도 했었죠. 사실은 그런 식으로 계속 나름대로 강도 높은 모습을 보여왔었는데.. 공연 보러오는 사람들이나 알지, 머..  

 

 

 

갈수록 음악이 록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록 뮤지션이라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 록커는 아니고요. 록커라 그러면 생활도 록커인 친구들이 진짜 록커고.. 그냥 록을 하는 뮤지션이죠. 근데 저번 7집이 특히 그랬고 다음 앨범은 안 그럴수도 있어요.

 

 

 

최근에 가장 관심을 갖고있는 음악은 어떤 쪽입니까

 

저번에도 어디선가 말했지만 린킨 파크를 많이 들었어요. 이번 앨범도 맘에 들고. 또 케니 로긴스도 다시 듣고 있고요. 케니로긴스는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저번 앨범은 케니 로긴스 레드우드 라이브 앨범(<Outside: From the Redwoods>)에 참여한 기타리스트하고 같이 작업했어요. 그래서 케니 아저씨한테 한국에 팬이있는데 가수라고.. 좀 전해달라고 할 정도였어요. 케니로긴스 같이 포근하고 잔잔한 그런 스타일이 맘에 들어요. 케니 로긴스도 락도 하고 포크도 하고 굉장히 블루지한 것도 하고 그랬어요.

 

앨범에서 어쿠스틱 기타 편곡이 들어갈 때는 케니 로긴스의 음악을 염두에 둔 경우가 좀 있었던 것 같아요.

 

 




 
 

 

5집을 분기점으로 음악이 무겁고 진지해졌고 보다 앨범 자체의 완성도에 집중하는 쪽으로 전환했다고 보는데요 자신의 스타일이 작가주의 지향이라고 보십니까

 

그럼으로써 대중들과 좀 멀어진 것도 사실이지요. 사실 드림팩토리의 힘이란 게 많은 대중들의 지지로 가능한 건데 최근 저의 지명도로 볼 때나..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거지요. 결과적으로. 그게 제 꾀였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어요. 대곡지향이었고..

 

갈등이 굉장히 많았어요. 드림팩토리가 아직은 그나마 살아있는 이유에 대해 그래도 제가 마지막 보루같은 존재라고 스스로 착각도 하고 있는 편인데, 그러려면 사실은 좀 더 쉬운 음악을 해야되고 무게감을 덜어버려야 하는 건데 그래서 굉장히 갈등이 많죠.

 

생각하시는 것보다 제가 영향력이 없어요(웃음). 사실은 드림팩토리가 언론이나 방송하고 친한 기획사가 절대 아니고 제가 한번도 제 음악으로 언론에서 조명받아 본적도 없고.. 머..

 

 

 

지금 본지의 조명을 받고 계십니다(웃음)

 

대중들이 알기에는 그냥 이 사람은 방송 안 하는 사람이다 이 정도도 아니고 요즘에는 방송 못 나오는 사람이라고 알아요.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절 모른다고 이야기하면 에이 정말 그럴까?하는데 실제로 몰라요. 하다 못해 제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조차도 잊어가는 거지요.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까.

 

용산에서 뭘 사는데 얼핏보니깐 가수 같았나봐요. 그래서 가수죠? 그러더니 나중에 계산서 날아 온 것 보니깐 이승철로 나온 거예요(웃음).

 

드림팩토리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사실 저의 지명도가 큰 건데 그게 이제 미약해졌기 때문에.. 조금 위기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죠. 딴지일보도 마찬가지겠지만 사실 저도 비주류잖아요.

 

네티즌들이 너희가 음악을 못 만드니까 우리는 엠피쓰리를 듣는다..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가장 충격받은 건 작년에 가장 많이 팔린 음반 2위가 코요태였다는 거고고.. 지금 코요태 음반이 일주일에 7만 장을 파는 기염을 토하는(웃음).. 아..이거 코요태 사장님한테 욕 먹겠네...

 

 

 

실제로 이승환씨나 드림팩토리의 영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은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른데요

 

아니예요. 절대 안 그래요. 방송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거대 기획사들이고, 혹은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고 있는 곳들이고, 언론도 마찬가지죠. 인터넷? 인터넷도 마찬가지지요.

 

한때 드림팩토리 회원 수가 10만 명이 넘어 갔었고 그들이 다 골수일 거라고 생각들을 했었죠. 지금은 6만  2천 명 정도 되는데 그들도 다 골수일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근데 막상 뭔가를 했을때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한 5천명? 그정도예요.

 

사실 지금은 이승환의 드림팩토리가 아니라 김정화의 드림팩토리죠(웃음). 어린 친구들이 많이 가입을 하고 그러는 상황이기도 하고. 솔직하게 말씀 드려 어디가서 우리가 드림팩토리라고 통해 본 적이 없어요.

 

 

 

 드림팩토리의 목표는 5만장 팔리는 가수를 꾸준히 생산하는 것

 

 

 

 

89년 데뷔했으니 15년 되었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풍토에 대해 나름대로 느낀 문제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예전에 연예비리가 터졌을 때도 굉장히 인터뷰 요청을 많이 받았어요. 회사나 저나.. 물론 비리를 저지른 사람은 많았지만 그때도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았고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워하던 사람도 많은데 그걸 모두 한꺼번에 싸 잡아서 이야기하는게 별로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어요.

 

가요는 다 나뻐. 오락프로는 다 나뻐. 이런 식으로 가는 것에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아꼈어요. 사실 저는 촌지 주는 사람들 정말 나쁘다고 생각해요. 정당하게 경쟁하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것이기는 한데 그쪽 방면에 있는 모두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많은 문제점이 있지만 결국엔 방송사와 언론이 승리자겠죠.

 

그래도 14년 전 데뷔했을 때보다는 좋아졌다고봐요. 피디들의 마인드도 예전과는 다르고, 연예인들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던 시절과도 다르고. 방송의 책임도 있겠지만 그걸 받아들였던 대중들의 책임도 있지요. 음악프로는 시청률 떨어지고 오락프로는 맨날 시청률 올라가고. 그러면 음악 프로그램을 많이 봐주시던지. 음악 프로보다 토크쇼를 더 좋아하잖아요 대중들은. 저는 전적으로 음악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고 보지는 않아요.

 

 

 

대중음악의 매래와 음반산업의 미래가 어둡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어느 방송에서 하셨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저희 같은 경우 음반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다음 음반에 재투자를 해왔다고 자부해요. 더 양질의 싸운드를 위해, 뮤직비디오도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었고.

 

근데 전반적으로 음반이 안 팔리면서 일단 투자할 비용이 없어지니까요. 맨땅에 헤딩할 수는 없고. 투자비용을 줄이려면 결국 녹음비용을 줄여야 하는 건데 녹음비를 줄인다는 것은 세션을 쓰지않고, 리얼녹음 없이 가겠다는 이야기고.. 좋은 어쿠스틱 환경을 지닌 부쓰에서 녹음하기도 힘들어 지는 거고.

 

또 6월부터 신보 인세제가 시행이 되거든요. 그렇다면 작곡가들이 사실은 자기가 아주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잃는 거죠. 신인가수 음반에 곡을 줬다가 안 팔리면 자기가 받는 곡비가 2만원 3만원도 안 될 수 있는 상황이 오는 거죠. 이런 정책 같은 경우 너무 시기상조였지 않았나 해요. 셰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음반시장의 불황을 지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 아래서 선진국에서 그걸 시행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작권협회는 그걸 시행했다는 것이죠.

 

오히려 제작자 입장에선 좋을 수도 있죠, 저는 제작자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음악동료 입장에서 보면 되게 부정적인 상황으로 가고 있는 거지요. 그런 요소들이 계속 가다보면 총제적으로 음악산업이나 음악의 퀄러티라는 측면에서 장기적으로 나빠질 거라 본 거지요.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공연문화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콘서트란 이름이 붙는 걸 보면 전혀 콘서트가 아니죠. 모든 사람들이 다 무료로 볼 수 있고 방송을 빌미로 무슨 게릴라형식하면서 보여주는 게 그건데, 그렇게 되면서 공연이란 건 돈 내고 보는 게 아니라는 마인드가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거죠.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어린 팬이랑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어서 콘서트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드림콘서트요.. 이러는 거예요.

 

립싱크냐 아니냐 논란도 한 때 있곤 했었지만 이젠 그런 것 자체를 따지지도 않고, 사실상 그게 무의미한 시대를 지나고 있는 거예요.

 

라이브란 게 가수 얼굴 보러가는 게 아니잖아요. 뭔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감정을 공유하면서 하나가 되는 느낌을 맛 보는 거 아니겠어요? 물론 전당대회도 그렇지만(일동 웃음). 근데 요즘엔 가수 얼굴만 보는 게 추세인 것 같아서.. 그런 식으로 콘서트에 대한 개념자체가 왜곡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은 저도 홍보를 해야겠기에 예전에 게릴라 콘서트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엠비씨에서 돌아온 이야기가 뭐냐면 게릴라 콘서트는 방송을 위한 것이지 콘서트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단적으로, 제가 요구한 거는 리허설 할 시간을 달라라는 것이었는데 그 시간에 홍보를 해야한다는 것이죠. 차타고 시내 돌면서.

 

공연 산업적인 측면을 보면 제도적으로 공연업자가 수익을 낼 만한 그런 상황은 아직 아니구요. 문제라면 일단 가장 흔 한게 중간에 업자들이 돈 들고 튀는 건데.. 그런 상황이 오면 죄다 욕먹는 건 가수죠. 정작 사기치고 날랐던 사람은 1-2년뒤에 똑같은 곳에서  계속 그 일을 하고 있고.

 

저희같은 경우도 그런 일을 당해서 검찰에 고소를 했더니 그냥 그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중지가 되었고.. 근데 얘기를 들어보면 그 분들은 연예인들의 일에 대해 잘 이해를 못 하세요. 매년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그렇게 되면 사실상 저희가 다 물어주죠.

 

 

 

드림팩토리의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4년 전 부터 투자를 유치해 왔어요. 그때부터 도산위기였으니까요. 합병도 받고요. 홀라당 넘기는 것도 고려하고 있어요. 제가 공장장 자리를 내 놓아도 드림 팩토리를 지킬 수 있으면 제가 그 밑으로 들어갈 용의가 있어요.

 

첨 드림팩토리를 설립할 때의 목표는 예전 동아기획처럼 좋은 뮤지션들이 많이 모여서 음악계에서 어떤 구심점을 이루는 거였어요. 예전에 제가 동아기획에서 나오는 음반들은 무조건 샀듯이 드림팩토리에서 나오는 음반들은 산다라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어떤 퀄러티를 유지하는 게 목표였죠.

 

지금 사람들은 드림팩토리에서 왜 연기자를 키우느냐고 비난을 하지만 연기자로 번 돈을 고스란히 음악에 투자 하거든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게 하루였는데 머 외면당했고, 지누 때도 그랬고요. 지누도 1,2집 다 망했지요. 정말 좋은 음악 만들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5만장 급의 가수들을 많이 생산하는 걸 꿈꿔왔던 거지요. 현재 상황이 안 좋기는 한데 작년에 좀 좋았죠. 정화가 CF를 많이 했기 때문에(웃음). 2000년부터 처음으로 흑자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 이전에는 맹세코 공연을 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요. 드림팩토리 같은 경우도 제 아버지의 사재를 털어서 지금까지 꾸려 왔거든요.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공연활동은 내년 투어를 마지막으로 끝내려고 해요.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겨서 그런 건 아니고요. 대중들이 원하는 기대치를 하려면 정말 그거야 말로 지명도가 있고 사람들이 그만큼 모여줘야 가능 한 건데. 설사 소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더라도.

 

머 저번에 조선일보에서는 만 명 모아놓고 공연하다가 갑자기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한물 간 가수처럼 표현을 했는데 그런 걸 보고 싶지가 않아요. 가수의 말로가 가장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 용 선배님이 제 고등학교 선배이신데 동창회에서 저를 붙잡고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너 XXX 꼴 난다.."이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왜요?" 이랬더니 "야 걔는 다 노래가 애들 취향이라서 이제 나이 먹으니깐 스탠드바도 못 서잖아. 일거리가 없다니까 걔는?..." (웃음)

 

가수들은 늙으면 스탠드바 서야되고 나이트 서야 되고 그렇게 되는 게 싫어요, 개인적으로. 그래서 그냥 깨끗하게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또 지금처럼 웅장하고 버라이어티한 공연이 상황이 안 되어 불가능 하거나 안 하게 되었을 경우에 그 부담감도 크고 해서요. 완전 은퇴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공연만 안 한다는 거지요. 차라리 훌륭한 후배를 찾아서 뒤에서 제가 공연연출을 해주고 하는 방식으로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거죠.

 

 

라이브의 퀄러티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데요 전반적인 진행은 어떻게 됩니까

 

일단 6개월 전에 공연에 관계된 모든 스텝진에 통보를 해서 딴데 신경쓰지 못 하게 하고 철저히 준비하죠. 대체로 저 혼자서 구상하는 편이죠, 거의 대부분을. 근데 그걸 구체화시키는 작업들을 스텝들이 해주는 거죠.

 

지방공연인 경우 4개월 전부터는 지방업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죠. 음향 오퍼레이팅 같은 경우도 담당자 분이 공연 연습 때 참여하셔서 짧게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지켜보시고 일일히 체크를 하시고. 예를 들어 세세한 딜레이 타이밍같은 부분까지도 협의할 때가 많죠.

 

대부분 현재 같이 활동하시는 스텝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같이 해온 분들이예요. 공연스텝 가운데 97년부터 같이 한 분이 가장 짧은 분이죠. 그래서 서로에 대해서 잘 알아요. 저 같은 경우 전반적인 연주나 편곡, 선곡에 주로 신경을 쓰는 거고.

 

 

 

끝으로 당해 무붕 콘서트에 대한 출사표 한 방 쏴주시죠

 

팬들이나 저나 착하게 살자 공연 컨셉을 젤 좋아해요. 굉장히 자유스럽고 에너지가 넘칠 것이므로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완전 똑같이 하나가 된 기분을 맛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딴지일보 콘서트 무붕 2003 조직위원회 (entbiz@ddanzi.com)
아이 제인 (ijane@ddanzi.com)
쪼인트 (kyeongcheol@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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