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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정국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헌데, 자꾸 이번 대선에서 묘한 데자뷔가 느껴진다. 왜 그럴까. 미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는 몇 년 전의 대선과 무척이나 오버랩 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 대선은 <트럼프 vs 힐러리>의 대결이었던 2016년 미 대선과 흡사한 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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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계신 분들은 덜 느꼈을지 모르나 미국에 사는 나로선 트럼프가 당선된 뒤로 4년간 미국 사회가 얼마나 지독하게 망가졌는지를 몸소 느꼈기에,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떠올리게 만드는 누군가 당선됐을 경우, 향후 5년 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어떤 후폭풍을 얼마나 겪게 될지 생생하게 그려진다.       

 

대선 전까지 연재될 이 시리즈는 그런 목적에서 쓴 글이다. 간접체험을 함으로써 일종의 반면교사를 삼기 위함이랄까. 본 시리즈에선 미국에서 트럼프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사회가 어떤 후폭풍을 겪었는지 현장 경험자로(?)로서 말할 것이다.  

   

 

트럼프의 당선과 문제의 핵심

 

2016년 11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재임 2017년 1월 20일 ~ 2021년 1월 20일)의 당선은 미국 내부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CNN 보도 내용이 KBS나 MBC 뉴스에 몇 분 만에 인용되어 나가는 정도이니 한국에서도 미국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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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아무리 유명한 맛집이라도, 식당 안의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구석구석 베어 있는 냄새 및 여러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즐길 때와 집으로 배달시켜서 혼자 먹을 때 맛이 같을 수가 없는 법이다. 

 

트럼프가 광인(일명 ㅁㅊㄴ. 민족정론지 딴지일보의 품격을 생각해서 상당히 절제된 표현을 사용한다)이란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도 대략 감을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미국 소식이 전달될 때 아무래도 태평양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니 관조적으로 쿨~한 자세를 보일 수 있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사건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 충격이 덜하다. 하지만 전술했던 이유로 이젠 한국에서도 디테일을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트럼프 문제의 핵심은 트럼프 개인이 보인 일탈을 벗어나서 그것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도록 가능하게끔 한 사회병리에 있다. 히틀러가 아무리 악마라 하더라도 그 개인에게만 화살을 돌릴 순 없다. 악마성을 발현하게 한 당시 독일 사회 전체의 문제를 파헤쳐야 한다. 그래야 독일 사회가 왜 극단적 파시즘에 빠지게 되었는지, 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21세기의 미국 사회, 그리고 세계 사회의 흐름을 암울한 방향으로 틀어 놓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 사회도 지난 4-5년 사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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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가짜뉴스 범람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 언론 본연의 기능 약화, 사회적 갈등 심화(진보, 보수 간 갈등뿐 아니라 계층 간, 세대 간 갈등 등), 보편적 가치나 과학 혹은 객관적 진실에 대한 근거와 논리 없는 맹목적인 도전... 이렇게 나열하다 보니, 지금 한국 이야기를 하는지 미국 이야기를 하는지 헷갈린다. 두 나라의 현상들은 상당히 비슷하게 궤를 같이하고 있다. 

 

 

트럼프가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와 버린 이유

 

벌써 눈치챘겠지만, 이 연재는 반(反) 트럼프 정서로 쓰여진 글이다. 한국에서는 트럼프에 대해 우호적으로 느끼는 분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진보, 보수, 평소 성향과 상관없이 말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트럼프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한반도 통일을 위해 가장 애쓴 인물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존 정치 질서에 얽매이거나 남 눈치 보지 않고 대승적인 진전을 이룰 수 있었던 대통령으로 보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우리 민족의 문제이지만, 주변국들에는 지정학적, 세계정세의 문제이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 우리 의지만으로 풀기 힘든 부분이 있다. 이때 힘이 있는 자가 나서서, ‘내가 책임질게’하고 추진하여 돌파구가 마련되면, 주변국들은 초기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은 아주 이상적인 시나리오로 우리만의 바람이었다. 트럼프는 그러한 리더십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비즈니스맨이고 손익계산에 철저한 사람이다. 무언가 자기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그 일이 되겠다 싶으면, 법과 기존 질서나 상식적 절차를 적당히 무시해서라도 추진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이란, 금전적 이익뿐 아니고 그 일을 통해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구 충족이 가능한가도 포함된다. 언제 어디서나 쇼맨십에 가득 차 있고, 뉴스거리를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란다(쉽게 말해 관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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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문제는 뉴스거리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구미가 당기는 주제였고, 부동산 개발, 리조트 건설을 주요 사업으로 해온 그로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북한의 관광자원은 놓치기 아까운 노다지로 보였을 것이다. 거기에 노벨평화상 이야기까지 모락모락 나오는데, 한번 욕심 내 볼 만했다. 

 

하지만 일단 발을 담가 보니, 엉킨 실타래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정은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트럼프의 성격상 모든 일은 그가 중심이 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진행돼야 하는데, 그렇게 될 “각”이 안 나왔다. 주판알을 튕겨가며 뭘 어떻게 뜯어먹을까 계산하면서 들어왔는데, 가만히 보니 이건 더럽게 손은 많이 가면서 그에 비해 돈은 별로 안되는 사업인 것이다. 그래서 대략 간만 보고 슬그머니 발을 빼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김정은-트럼프의 두 번에 걸친 만남과 문재인-트럼프 판문점 회담 등 소식을 접하면서 몹시 흥분되었고, 만약 일이 잘 진행된다면 그동안 트럼프에 대해 무수히 쏟아부었던 비난을 내리고 친트럼프로 전환할 용의도 충분히 있었다. 허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 없고, 최소한 트럼프 정부 때 남북 관계가 이전보다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진 건 없지 않느냐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노벨 평화상은 트럼프가 받아도 좋습니다. 저는 한민족에게 돌아올 평화통일이란 선물이면 족합니다.”

 

라는 우리의 가슴 울리는 말과 함께 백방으로 노력한 미들맨 문재인 대통령에게로 돌아갈 공이지, 트럼프에게 공을 돌리는 것은 가당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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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트럼프가 공식,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한반도 문제에 진정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조금이라도 표현했었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한국인으로서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도 있었을 텐데(설사 빈말이라도 말이다),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한번 잘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여의치 않았어. 다음에 누가 다시 시도한다면 연락해, 힘닿는 대로 도와줄게. 내가 김정은 만나봐서 쫌 알아.” 

 

이런 정상적인 인간의 멘트를 기대한 내가 염병이다. 

 

그 후 그가 한반도에 대해 발언한 횟수는 급격히 줄었고, 브루킹스 연구소 (Brookings Institution)의 Sheena Greiten 박사가 지적했듯, 2020년 들어서 북한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심 밖으로 멀어지고 있었다(출처 링크).

 

트럼프는 한국에 대해 가끔 뻘소리도 했다(2020/2/20). 

 

"And the winner is a movie from South Korea. What the hell was that all about?" 

(아카데미 작품상에 한국 영화라고? 씨팡,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팬데믹 초기엔 한국이 방역 모범 국가로 떠오르자, 한국 정부의 발표를 어떻게 믿느냐고 발언했다(HBO-Axios 인터뷰, 2020/8/3). 이런 인사를 친한파로 보고 호감을 느낄 수 있을까?

 

2020년 대선에서 그가 바이든에게 여론조사에서 밀리자, 한국의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정은이하고 판문점에서 다시 만나 종전 선언하고, 재선 성공하고, 노벨 평화상 가즈아~~” 

 

라는 발언도 있었고 호응도 괜찮았던 것 같다. 남북 관계의 정상화와 통일에 대한 염원은 이해하지만,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몰라도 참 모른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 트럼프가 미국뿐 아니고 인류 전체에 끼친 해악은 명백하고 현재도 진행 중인데, 계속 그와 손을 잡아야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에 다행이다. 

 

 

트럼프가 끌어모은 혐오의 실체

 

한국에선 트럼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술했듯, 뉴스가 바다를 건너는 것은 사람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몇 천배는 쉬우니 정보가 오는 건 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그게 너무 많고 복잡하다는 것이다. 정보의 공해다. 가짜뉴스가 마구잡이로 전달되고, 사실인 뉴스라도 전달하기에 따라 ‘아’ 다르고 ‘어’ 다르기 때문에 전달되는 목소리(뉘앙스)도 갖가지다. 대체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다.

 

미국 사회와 문화는 더럽고 추악한 부분이 많다. 친미 사대주의자는 물론, 평소 미 제국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이라도, 바다 건너 미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설사 그것이 정론이 아니고 찌라시라 하더라도) 자기주장이나 입지를 강화할 부분이 있으면 재빠르게 차용한다.

 

잘 알아야 당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김정은과 악수를 했었다는 이유로 생긴 은근한 호감 때문인지, 그의 악행이 한국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감이 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이나 그가 일으켰던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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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여러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되는, 반 PC(Politically Correct) 운동은 미국에서는 주로 보수적이고 소득과 교육수준이 높지 않은 백인계층에 퍼져 있는 정서이다. 한국에선 미국 정도의 반 PC 운동이 전개되는 것 같진 않으나 최근 대선판에서 한 후보가 외국인에 대한 혐오 등 각종 혐오 정서를 끌어모으며 미국과 같은 반 PC 운동을 불러일으키려는 모습이 보인다.

 

반 PC 운동은 아무리 미사여구로 치장을 해도 근본적으로는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타인에 대한 존중, 관용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사회를 설계하자는 것에 반대하며, 옛날처럼 내 하고 싶은 대로, 나보다 좀 못나 보이거나 소수계층이면 깔아뭉개며 살고 싶다는 얘기다. 

 

(미국에서) 이들이 원하는 건, '피부가 검은 이들을 껌둥이'라 마음 놓고 부르고, '여자는 쭉쭉빵빵녀이거나 아니면 못생긴 년', 이렇게 두 가지 종류밖에 없고, '장애인은 병신'이라 불러야 제맛이 나는 사회다.  

 

중남미계로 보이면 다짜고짜 "너 같은 불법체류자들은 다 멕시코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한다. 도대체 왜, 복잡하게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어쩌고 하냐, 뭐가 겁난다고 걔네들 눈치를 보냐? 이것이 반 PC 운동의 실체이다. 

 

물론 진보 측에서 주장하는 PC 운동이 전적으로 옳다는 건 아니다.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오용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고 고민해봐야 한다. 극단적 PC주의가 오히려 사회적 파시즘이 되어 건전한 자유를 억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사회적 토론으로 차분히 하나씩 풀어가면 좋을 텐데, 트럼프가 나와서 “다 집어치우고, 옛날로 돌아가자”고 했고, 지지자들은 “그래! 그거 좋겠다”며 좋아했다. 

 

트럼프가 그동안 미국에서 벌였던 진상과 미국인들이 거기에 넘어가는 것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몇 년 전 미국 대선과 비슷한 선거판을 치르고 있는 한국 국민들도 섬뜩해 할 것이다.

 

<계속>

 

 

소리는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