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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관련 책을 읽을 때마다 조금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건 아난다 존자의 에피소드다. 그는 누구인가. 많은 불경은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데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의 ‘나’를 주로 담당하는 분이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석가모니의 가방모찌, 아니, 비서를 가장 오래 하며 가장 많은 말씀을 들었고 기억력이 인간 녹음기 수준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사후에 말씀을 모으고 정리하는 자리(나중에 1차 결집이라고 불리는 빅 이벤트)에 당연히 그가 빠질 수 없다. 문제는 주요 제자들은 모두 해탈하여 아라한과를 얻었지만 그는 아니었다는 점.

 

고참급에 중요한 직원 비구이기는 한데 직위 아라한과는 없다. 당시 최소 500명의 아라한이 있었는데 십대제자라는 자기는 아라한이 아니다. 본인은 얼마나 부담이 되고 자괴감이 들었겠는가. 당연히 용맹정진했을 것이다. 1차 결집 당일까지 밤을 새우며 수행했으나 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 '에라 ㅆㅂ… 잠깐 눈이나 붙이자' 하며 눕는 순간,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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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는 다르지만 누구나 비슷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문제가 샤워하다가 갑자기 답이 떠오른다. 죽어라 해도 안 되던 동작이 그냥 한번 툭 했는데 될 때가 있다. 긴장된 노력이 이완되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아난다 존자가 아라한이 되는 순간이 늦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생사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엄청난 부담감, 모두가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는 부담감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행에 즐거움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끝도 없이 많은 생각이 스쳐 가고 불안과 두려움이 끼어들어, 현재/여기에 머무른다는 수행의 기본 원칙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항상 가볍고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것.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누구나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를 짊어지고 있다. 주말에 허경영 씨 전화 오듯 예기치 않게 큰 어려움이 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큰 문제나 불행이 지금 당장은 없더라도 불만이나 초조함, 불안감 등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눈앞에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게 인생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문제들은 계속 생겨난다. 만약 '문제'들을 모두 없앨 수 없다면, 이걸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고쳐 보는 건 어떨까. 석가모니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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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분위기 석가모니? 겁먹을 필요 없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으니까. 모두 자기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 운동 후 샤워하기를 꼽는 사람들은 많고, 집 안 청소하기도 꽤 흔하다. 집안일은 거의 안 하시던 오리지날 경상도 싸나이 아버지는 다림질만은 좋아하셨는데, 그게 당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 중에 하나는 아니었을까 싶다.

 

노래 부르기·춤추기·판례 암기하기 등 대부분의 스트레스 해소법 공통점은 단순 작업에 가깝다는 점이다. 단순 작업하는 일은 왜 힐링이 되는가? 지금 하는 그 일, 그 순간에만 머물기 때문에 잡생각이 낄 틈이 적기 때문이다. 현재 이 순간에 머물기/지금에 집중하기 기술을 익히면 마음의 고통을 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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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칭을 하던 걸웨이 선생이란 분이 계셨다. 다음은 테니스를 해본 적 없는 여성에게 테니스를 가르치는 영상이다. 그녀는 금방 자연스럽게 랠리를 이어가게 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테니스공이 바닥을 치는 순간 "바운스"라고 외치게 하고 칠만한 공이 오면 "히트"라고 외치게 한 것 뿐이지만, 이 방식은 엄청나게 효율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깟 단순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 뭐가 그리 특별했을까? 걸웨이 선생의 탁월한 점은 이곳/이 순간에 마음을 붙잡아 두는 일종의 넛지를 개발했다는 점이다. 테니스공이 바닥을 치는 순간 "바운스"라고 외치게 해서 그곳에만 집중하게 해서 이곳/이 순간의 테니스공이라는 작은 점으로 주의력을 제한하게 했다.

 

테니스 코치는 가르칠 포인트가 너무 많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저런 지적을 할 수 밖에 없다. 배우는 사람은 생각이 복잡해진다. '아.. 자세가 틀렸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나는 재능이 없나 보다' 등등 온갖 불안의 목소리가 들리게 마련이다. 걸웨이 선생은 그 목소리의 볼륨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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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업계에선

으마으마하게 유명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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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는 일해라/절해라, 잘했다/못했다 1초도 쉬지 않고 통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 목소리의 볼륨을 줄이면 두려움과 불안함도 줄어든다. 걸웨이 선생은 이 목소리의 볼륨을 줄이는 아주 간단한 넛지를 개발했다. 1초도 쉬지 않고 통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그 목소리의 임무를 "바운스" 외치기라는 작은 점으로 제한해 버렸다. 나중에는 테니스 코칭 뿐 아니라 골프·스키 등 스포츠 분야 대부분에 효과적인 게 밝혀졌다. 더 확대되어 일이나 삶의 전 분야에도 적용 가능하다.

 

이 방법론은 어느 날 갑자기 걸웨이 선생이 혼자 창안해 낸 건 아니다. 이너게임은 궁도의 선이라는 책이 기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선불교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셈이다. 이 순간/현재에 마음을 잡아두면 불안과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게 일종의 꼼수, 넛지일지라도 이 순간/현재에 마음을 잠시 잡아둔 것만으로도 불안과 두려움이 즉각 줄어드는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꼼수가 아닌 정공법은 얼마나 더 효과가 클까?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 조금이라도 홀가분하게 살아간다면 인생이 훨씬 자유롭지 않을까? 물론 그걸 누가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방법을 모를 뿐이다. 훈련 없이 책만 읽고 바벨을 들려고 하면 실패한다. 돈지랄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지랄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랄까. 마음의 훈련과정 없이 마음만 고쳐먹는 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을 먹는 것은 좋은 시작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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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을 멈추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다. 과거 실수나 잘못에 대한 후회, 자책은 거의 풀 오토매틱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돌아보지 말자. 자책하지 말자. 비관하지 말자. 지금에 집중하고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 외쳐봐도 순간순간 문득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마음의 힘을 길러야 한다. 가장 검증된 방법은 명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명상이 조금 부담된다면, 이런저런 꼼수를 시도해 볼 수 있다. 꼼수를 발전시켜서 그 원리를 이해하고 좀 더 심화 코스로 옮겨가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마음의 자유를 찾는 여정에서 초보 여행자에 불과하다. 잘못된 길을 공유할까 봐 걱정도 된다. 하지만 최고의 셰프가 아니더라도 어떤 돈가스가 맛있는지 정도는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최고의 명상가는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지 팁 공유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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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다들 선거 땀시 마음이 복잡한 것 같길래! 우리 마음도 살피면서 가즈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