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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큐즈미”

 

“응? 어딘가 익숙한데.. 흠흠! 암튼 어쩐 일이시죠?”

 

코난 오브라이언.png

 

“Are you Londoner?” 

(당신은 런던사람인가요?) 

 

런던 시내에서 한창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아시아인과 흑인뿐 아니라 북미, 유럽의 관광객으로 유추되는 백인들에게도 자주 듣던 질문이다. 

 

분명 아시아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런던사람이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본인 관광객이 서울에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백인, 혹은 흑인에게 혹시 서울 사람이냐고 묻는 상황으로 볼 수 있는데,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영국은 다인종 국가이다

 

이민자의 나라 하면 흔히 미국을 떠올린다. 실제로 뉴욕에는 180여 다른 인종과 100개의 언어가 혼합되어 있다고 한다. 굉장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가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놀라운 점은 뉴욕보다 약 1.5배 더 다양성을 갖고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런던'이다. 

 

영국 런던대학의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런던의 대다수 초등학교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영어가 아닌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출처 링크)

 

영국에서는 10년마다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하는데, 지난 2011년에 조사된 발표에 따르면 (아래 보이는 지도에도 나타나 있다시피) 런던의 외곽 지역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다양한 인종 분포도를 보인다.  

 

지도1.PNG

파란색일수록 다양성이 높은 지역,

회색일수록 다양성이 낮은 지역이다.

 

런던 중북부에 위치한 킬번(Kilburn) 지역은 이슬람 혹은 중동지역에서 이민을 온 이들의 인구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실제로 가보면 여기가 중동인지 영국인지 헛갈릴 정도다. 뿐만 아니다. 킬번(Kilburn) 바로 위에 위치한 브렌튼 크로스(Brent Cross)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온 이들이 80% 이상이다. 아프리카라고 여겨도 무관할 정도로 아프리카 이주민들이 많다. 

 

킬번.jpg

킬번(Kilburn)

 

이외에도 런던의 수많은 지역에는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살기 때문에, 런던 자체만 보면 인터네셔널과 코스모폴리라는 수식어가 절묘하게 크로스 오버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떠오르는 차기 총리 후보, 인도계 섹시가이 ‘리시 수낙’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처음으로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데 큰 의의를 둔 바 있다. 과거 백인들의 우월주의 혹은 우선주의를 탈피하여 보다 다양한 이들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기회가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오바마는 완전한 이민자 혹은 타인종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프리카 출신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미국계 백인으로, 혼혈이다. 

 

최근 영국에서는 완전한 이민자 출신이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보리스 존슨이 사퇴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인데, 이전 영국 브리핑에서도 언급했지만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강력한 락다운 정책을 시행하며 전국에 봉쇄령을 내렸고,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려 같은 규칙을 국민들에게 적용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방역 수칙을 위반하고, ‘업무’(work event)라는 명목하에 장관들과 파티를 벌인 일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사퇴 위기에 놓여있다. 현재 여론 조사에서 총리가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70%에 육박하고 있고, 같은 당내에서도 강한 압박의 목소리가 있다. 현 상황이 쉽게 사그러들기는 힘들 전망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기 보수당 대표(총리)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 그 주인공이 인도 출신 섹시가이 ‘리시 수낙’(Rishi Sunak)이다. 

 

리시 수낙1.jpg

리시 수낙 (Rishi Sunak)

 

그는 잉글랜드 사우스햄튼에서 태어났다. 펀자브 브라만(카스트 중 제일 높은 계급)의 후예로, 부모님 모두 인도계 이민자들이다. 아버지는 NHS 소속 일반의로, 어머니는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로 근무했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긴 했지만, 전통적인 영국인인 앵글로색슨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 인도계이다.

 

리시 수낙은 현 재무부 장관인데, 전통적으로 영국에선 장관들을 임명할 때 이미 재무부 장관을 차기 총리로 염두해두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2020년 2월, 리시 수낙이 차관에서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굉장히 이슈가 되기도 했다. 헌데, 역대 다른 재무부 장관들과는 달리 리시 수낙에게 그 자리는 독이 든 성배와 같았던 면도 있다. 그가 장관에 임명될 당시는 코로나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이다. 국가 재난 사태를 대비해 국가 예산을 재정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재경부 장관은 잘해야 본전인 무덤과도 같은 자리였다. 

 

그런데 그는 골드만삭스와 헤지펀드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바탕으로 돈을 굴리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취임 후, 곧바로 추가지출 예산안을 발표했고, 코로나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개인과 기업에게 막대한 지원금을 쏟아냈다. Pay First, Tax Later라는 구호에 걸맞게 일단 지금 당장 어려운 상황이니 지원부터 하고, 재정난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것이 아주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특히, 각종 세금을 면제하거나 감면해 주고, 고용유지에 대한 지원금을 대폭 늘리면서 국가적으로 직면한 재난이 국민들 개개인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했다. 수 백만 명이 코로나에 감염되고 수십만 명이 생을 달리했음에도 보수당의 지지율이 굳건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브렉시트로 비판받는 영국의 다른 이면

 

국제화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는 한참 됐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용되기엔 너무나도 멀고 먼 이웃 나라의 슬로건인 것 같기만 하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처우와 이민자에 대한 낯선 감정, 차가운 시선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으로 남아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을 멈추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성 소수자 이슈로만 몰아붙이는 것을 목격할 때 여전히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과거 영국이 해 왔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악랄했고 교활했고,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들에 수조 원씩 지원금을 쏟아부어 가며 외교에 힘을 쏟고, 흑인을 노예로 팔았던 과오를 극복하고자 타인종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그래서 다시는 기사회생이 어려울 것만 같았던 과거의 대영제국이 여전히 국가 경쟁력 세계 5위를 유지하고, 식민지배에 대한 앙금으로 여러 나라가 영국과 쉽게 앙숙 관계가 될 수 있음에도 ‘브리티시 코먼웰스(The 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라는 국제기구에 속해 서로 친목을 유지하고 협력하며 지내는 것을 보면, 브렉시트로 비판받는 영국의 다른 이면에는 폭넓은 다름에 대한 수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커먼웰스.PNG

브리티시 코먼웰스(영연방)에 가입한 국가들.

영국을 중심으로 옛 영국 식민지 출신 국가들 위주로

결성된 국제기구다.

공식적으로 수장 역할을 하는 국가는 없지만,

영국이 사실상 영연방 기구를 주도하고 있다.

 

 

포용력 있는 사회가 탄생시킨 정치인들의 활약

 

인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1980년생의 젊은 재무부 장관 리시 수낙을 비롯해 현 런던 시장인 사디크 칸 역시도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 가정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정책들은 기존의 영국 백인들이 내놓았던, 자칭 국민들을 위해 만들어 냈다던 정책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띤다. 

 

런던의 경우, 땅값이 비싼 지역에 거대 공공주택단지를 만들어 보급하고 민영화로 인해 천정부지로 치솟은 대중교통 요금을 대폭 개혁해 우리와 같은 환승 시스템 도입했다. 또한 대기 오염을 막기 위해 대중교통을 전기차로 교체했고, 자전거 도로를 확대하는 등 균형 잡힌 발전과 동시에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제도들을 시행하고 있다. 

 

런던시장.jpg

사디크 칸 런던시장.

 

전술했듯 리시 수낙의 경우도, (물론 기업을 위한 지원이 막대한 측면이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당장 길거리로 내 몰린 영세업자를 비롯한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집세와 생활비 등을 지원해 생활고에 내몰리지 않도록 하는 Universal Credit 제도(구직, 주택, 근로, 소득, 아동 등에 관한 통합복지시스템)를 시행했고, 이로 인해 굉장히 많은 영국 국민들 특히 저소득층 생활권에 있는 시민들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보리스 존슨이 강력한 봉쇄령으로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수낙은 국가 재난의 상황에선 정부가 개개인의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자유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을 비추어보면, 분명 다양성이 더 좋은 방안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기간 골칫거리였던 저출산 문제도 유럽(영국)에서는 이민자에 대한 수용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의 전환을 통해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렇게 영국은 더욱 개방적이고 더욱 초국가적인 모습으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인재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보리스 존슨이 내려오고 리시 수낙이 영국 총리가 된다면, 추락해 간다는 평을 받는 영국이, 포용성을 기반으로 다시 재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미국과 같은 이민자들로 이뤄진 국가도 아닌 민족색이 강한 유럽, 그 중 영국에서 역사상 최초 이민자 가정 출신 총리이자 비백인계 총리가 탄생한다는 건 사회적 포용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진전되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능력만 있다면 출신 상관없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나로선 이러한 포용성을 기반으로 한, 리시 수낙의 행보와 그로 인한 영국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