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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집에 불이 난 이야기다. 술 먹고 라면 물 올려놓고 잠들어 집에 불이 날 '뻔'했다던가,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외출해서 불이 날 '뻔'했다는 그런 뻔한 경험담이 아니다. 진짜로 불이 났다. 집에.

 

때는 바야흐로.. 도 아니고 고작해서 며칠 전, 설 연휴 첫날이었더랬다. 대학 수강신청보다 어렵다는 ktx 취소표를 득템한 나는 이전에 잡아뒀던 밤기차를 반납하고 다음날 새벽 기차를 탈 예정이었다. 아무렴 늦은 밤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하나하나 다 찍고 가는 무궁화 열차보단, 이른 새벽이라도 시원하게 한 방에 가는 고속 열차가 훨씬 쾌적한 귀성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짐을 다 챙겨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다가 불현듯, 왜인지 제시간에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새벽 기차를 놓치면 다른 대안이 없었다. 명절 전에 기사를 몰아 쓰느라 피곤한 몸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때마침 동네 주민에게 전화가 왔다.

 

"작업실에 누가 발베니 한 병 두고 갔는데, 드시러 오세요~"

 

게임기에, 만화책에 놀 거리 가득한 그의 작업실에서 위스키를 홀짝이며 카드나 치다가 바로 용산역으로 가는 것도 꽤 괜찮은 명절의 시작 일 듯했다. 굉장히 솔깃했지만 왜인지 그냥 다음을 기약했다. 돌이켜보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는데 말이다. 인간의 육감이란 꽤 쓸만한가 보다.

 

그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날 시간을 어떻게 때우기로 작정을 했냐면, 어처구니없게도 찬장 속 그릇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갑자기 대강 쌓아져 있는 그것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왜인지 종류별로 크기별로 오와 열을 맞추고 싶어졌다. 10년 가까이 이 집에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고 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아무튼 묘한 날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달그락달그락 그릇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던 그때, '탁- 탁-'하는 낯선 소리가 들렸다. 마침 이어폰을 꽂고 <월말 김어준> 클래식 편을 듣고 있던 나는, '오, 파가니니 짱이네 바이올린으로 이런 소리를 낸다고?'하며 접시들을 포개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아까와는 달라진 소리가 이어폰 사이를 파고들어왔다.

 

"타닥- 타닥- 타닥-"

 

이건 때려죽여도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시벌 뭐지. 쎄한 기분이 꼬리뼈부터 머리끝까지 찡하게 몰려왔다. 당장 이어폰을 빼고 의자에서 내려와 집안을 돌아보았다. 형광등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어 거실과 침실 천장을 휙휙 돌아봤다. 아니었다.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아까보다 더 섬뜩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타다닥! 타다닥! 타다닥!"

 

옷가지와 손님용 이불, 그리고 냉장고 두 대가 있는 다용도실이었다.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갔다. 문턱을 밟은 그 순간, 바닥에서 주황색 불길이 화르륵- 치솟았다. 워매 시벌. 불이었다. 진짜 불. 아니 무슨 <고인돌가족 플린스톤>에나 나올법한 모닥불이 내집 다용도실 바닥에서 활활 타고 있었다. 바닥에 놓인 멀티탭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누전으로 인한 점화는 졸라 화끈하다. 뭐 연기 나고 불씨가 일어나고 그런 거 없다. 걍 타닥타닥 화르륵 이다. 처음 이상한 소리를 감지하고 다용도실까지 뛰어간 시간은 아마 5초도 안 걸렸을 것이다. 방 한가운데에서 캠프퐈이아가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닌 밤중에 방바닥에 불이 날 줄. 진정 '이거 실화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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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깡패와의 혈투

 

아무튼, 그건 실화. 레알 퐈이아였다. 당장 수습을 해야겠는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불길은 계속 치솟아 무릎 높이까지 넘실대고 있었고, 주변엔 온통 탈것들만 있었다. 좀 더 얼타고 있다간, 진짜 끔찍한 상황이 밀려올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 살고 싶었는지 저기다 물을 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전기+물=뒤짐> 여기까진 그래도 생존본능이 종을 쳐줬다. 헌데 다음 대안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저 시커먼 연기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시뻘건 불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손 닿는 곳에 개어진 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 커지는 불이 행거에 걸린 옷들에 옮겨붙기 일보 직전이었다. 일단 저 불길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건을 여러 장 포개어 불붙은 멀티탭을 꽉 눌렀다. 산소가 차단되자 불은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건 아래서 투둑- 투둑- 투둑-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수건 아래에서 스믈스믈 연기가 올라왔다. 아래에 깔린 수건이 타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수건 더미를 꽉 눌렀다. 연기는 멎었지만 누전은 계속되었다. 수금하러 온 깡패의 노크 소리마냥 둔탁하게 올라오는 스파크에서 다시 머리가 하얘졌다.

 

지금이라도 탈출해야 하나. 나만 살아도 되는 건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이 건물에서 쿨쿨 자고 있는 사람들을 다 어떻게 깨우지? 옆 건물 사람들은? 119에 먼저 전화를 하고 사람들 깨우러 가야 하나? 골목에 소방차는 들어올 수 있나?

 

울고 싶었다. 무너지는 방둑에 팔뚝을 집어넣은 네덜란드 소년의 심정이 이랬을까. 피가 솟구치는 환자의 동맥을 움켜쥐고 있는 마냥, 수건 더미를 눌렀다 뗐다 하는 바보짓을 반복하다가,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 코드를 뽑으면 되는구나.

 

전기를 끊으니 수건 아래 용트림이 멎었다. 분한 듯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옆에 거울을 보니 당장 비무장지대로 수색을 나가도 손색없는 숯검댕으로 위장한 멍청이가 넋 빠진 얼굴로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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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 어셈블

 

위 난리법석을 읽으며 '코드를 뽑으면 되자나 멍충아'라고 생각했을 독자들 마음, 잘 안다. 나라도 남 이야기 들으면 그랬을 거야.. 멍충 멍충.

 

인물퀴즈 풀 때 바들바들 떠는 강호동과 이수근이 그러더라. 집에서 볼 땐 쉬워 보여도 막상 나영석PD가 내민 사진을 보면 머릿속이 하얘져서 입이 안 떨어진다고. 나는 앞으로 신서유기 볼 때 연예인들을 비웃지 않기로 했다. 진짜 그렇다. 실전은 다르다. 불이 방바닥에서 화르륵 올라오는데 정신을 붙잡는 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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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 하나 해본다. 나는 숭고한 소방정신 최정예 의무소방 31기다. 맞다. 소방서에서 군 생활했다. 중앙소방학교에서 호스 전개, 속도 방수, 농연 훈련, 건물 레펠, 등등.. 소방관 아저씨들이 받는 훈련 대강 다 받았다. 일선 소방서에서 전역 전날까지 화재 출동 나가 불 끄다가 집에 갔다. 그럼 뭐 하나. 막상 처음 겪는 상황에 처하니, 다 무소용이다. 씌벌.. 며칠 전 일인데도 글 쓰면서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네.

 

새벽 1시 영하 10도의 날씨에 문을 열어두고 들어찬 연기를 뺐다. 패딩을 입고 거실에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방금 전 일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저녁에 취소표가 뜨지 않아 예정대로 전날에 출발했다면, 동네 친구 집에 놀러가 새벽에 집을 비웠다면, 아니면 그냥 세상모르고 침실에서 퍼질러자고 있었다면.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다. 명절을 맞이하여 양가 조상님들이 총출동 어셈블을 해주신 게 분명했다. 뻥 안치고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착하게 잘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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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퍼뜩. 한 가지 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저렇게 과전류가 미친듯이 펑펑 쏟아졌는데도 건물에 누전차단기가 내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이 트자마자 건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근병 : 안녕하세요. 주인님(진짜 이렇게 말함. 제정신이 아니었음). 000호인데요.

 

건물주 : 네 무슨 일이시죠?

 

근 : 예.. 뭐.. 저... 집에 일이 좀 생겨서요. 여차저차해서 났어요. 불이.

 

건 : 네에????

 

근 : 암튼 다행히 바로 끄긴 했는데요.. 건물 차단기가 안 내려갔더라고요.. 것 좀 빨리 점검을 해야 할 듯..

 

건 : 흐어어엉어어어얽엌러엌? 다친 덴 없어요?

 

근 : 마..마음?

 

인력 밖의 공간

 

불은 진짜 무서운 거라는 걸 다시 한번 똥꼬털이 서늘하게 깨닫는다. 길게 써봤지만, 위에 모든 것은 30초도 안되는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방안에 들어찬 연기는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봤다. 그 매캐한 냄새. 나무나 종이가 아닌 것들이 타는 냄새는 정말로 고약하다. 배치된 소방서에서 적응 기간이 지나고 출동 대기로 배정받은 펌프차에 내 보호장비를 싣던 날이 기억났다. 뒷좌석 문을 열었을 때 숨이 꽉 멎게 밀려오던 그 시커먼 불 냄새.

 

소방대원들이 아무리 신속하게 소방차에 올라타 장비를 챙겨매고 화재현장으로 달려가도 이미 올라온 불길을 끊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대원들은 밤을 내달리며, 방금 받은 출동지령이 차라리 오인신고나 장난전화이길 바란다. 일단 건물에 불이 붙으면 사실 방법이 없다. 곁에 다른 것들로 번지지 않도록 길목을 차단하는 게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불은 한번 집어삼킨 것을 결코 쉽게 뱉어내지 않는다. 거기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은 인력 범위 밖의 일이다. 전역한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소방공무원들의 순직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요구조자를 위해 헬멧 쓴 누군가가 빠루(화재진압용 손도끼) 한 자루만 들고 인간의 힘이 닿지 않는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떠올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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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천소방본부>

 

어쩌다 보니 불의 시작과 끝을 다 보게 되었다. 화재출동을 나갈 때마다, 솔직히 그런 생각 많이 했다. 대체 뭐 하다가 이렇게 큰불을 냈을까. 내가 발화의 현장을 목도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화마는 부지불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운명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정말 천운이었다. 이웃들이 간밤의 일을 모른 채 상쾌하게 잠에서 깰 수 있어서. 나도 일단 살아서.

 

잊지말자 사용연한 다시보자 허용전력

 

그날 이후로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일단 멀티탭에 꽂혀있는 검은 어댑터만 보면 식겁하게 되는 약한 외상 후 스트레스를 획득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줬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 약간의 불안증세도 느꼈다. 뭐 앞으로 더 조심하고 살자는 계기로 받아들이고 있다.

 

건물 누전 차단 시스템을 점검했다. 간밤의 이야기를 들은 건물주는 나보다 더 놀래 몇 번이고 안부를 물었다. 암튼 다들 살아있어 다행이다. 증말로. 누전 차단 기능이 있는 멀티탭으로 싹 다 교체했다. 앞으로 안전에 관해서는 최저가 검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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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에 멀티탭들을 전부 교체하긴 했는데, 쓰던 거 중 하나가 좀 멀쩡해 보이기도 하고 와이파이 공유기 어댑터 정도만 꼽아놓을 건데 괜찮겠지 했던 게 화근이었다.

 

오래된 멀티탭이 위험하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당연함은 안일함과 관성에 쉽게 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별일 없었다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위험한 생각을 쉽게 하게 된다. 애초에 멀티탭 사용연한도 제대로 몰랐다. 걍 뭔가 누래지고 먼지 끼면 찝찝해서 바꿀줄이나 알았지.. 멀티탭 사용연한은 종류에 따라 1년~2년이다. 혹시 모를 나 같은 안일함과 관성의 승리자들이여, 모두 다 같이 기억하자.

 

멀티탭마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허용 전력량이 있다. 미관을 위해 6구 7구 멀티탭에 뭔가를 주렁주렁 꽂아놓았다면 합계 용량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자. 암튼 조심해서 나쁠 건 아무것도 없으니.

 

어떤 사람들은 선이 너저분한 게  꼴베기 싫어, 선들을 케이블 타이로 묶어 케이블 박스에 넣어두기도 한다(그게 바로 접니다). 묶거나 구부러진 전선은 내부저항이 높아져 전선 및 본체에 화재가 날 수 있다하니, 이 역시 재고해보자. 내가 가카처럼 해봐서 아는데, 집에서 모닥불 피우는 것보단 줄 좀 나와있는 게 훨씬 보기 좋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은 뻔하지만 굉장히 무서운 말이라는 것을 똥꼬 깊숙이 깨달은 김에 함 주절주절 써봤다. 정권재창출도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뭣보다 일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게 우선이지 않겠는가.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주변에 뻔한 것들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시길. 이상 끄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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