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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대략 이십년 전 일이다. 마포 노사모 오프 모임에 처음 나갔다. 공지를 읽고 찾아간 대낮 감자탕집엔 이삼십 명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며 왁자지껄하고 있었다.내가 쭈뼛쭈뼛 자기소개를 하고 앉아 자리에 녹아들 무렵, 저녁시간이 가까워오자 옆테이블엔 다른 손님들이 삼삼오오 채워졌고 마포 노사모 멤버들은 취기에 비례해 데시벨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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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마포 노사모에서

마사오를 만났던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재연한 느낌. 

실물은 너무 괴랄해서 쓸 수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옆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 중 하나가 시끄러웠는지 우리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나 보다. 우연히 그걸 본 멤버 중 한분이 얘기했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손님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딱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자리가 일순간에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속삭이듯 대화를 이어 갔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유난히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라거나 특별히 공공장소 매너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우리의 비매너로 행여 노무현이 욕을 먹으면 안되니까.

 

그 후 돼지저금통이 어쩌고, 민주당 경선 당시 호남 대의원들에게 수 천, 수 만장의 손편지를 써서 보냈네 저쨌네, 대선 선거일 당일 새벽 아파트 단지에 뿌려진 “정몽준도 노무현을 버렸다”는 조선일보를 수거하며 흘린 눈물들, 이런 걸 미주알고주알 떠들 필요는 없겠다.

 

그 당시 우린, 절박했다. 그리고, 이겼다.

 

장면 둘.

얼마 전 유시민이 <MBC 시선집중>에 나와 인터뷰했다. 유튜브로 이것 저것 보다가 우연히 해당 영상도 보게 됐다. 그 방송에서 유시민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이재명 후보의 ‘전과4범’ 내용에 대한 것이다. 내 귀를 의심했다. 고작 그런 내용인데 그 많은 사람들이 “전과4범”이라며 그렇게 욕을, 욕을 해댔다고? 팩트가 궁금해서 따로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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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병량 성남시장이 나중에 형사처분을 받게 된 분당 파크뷰 특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재명이 방송사 PD와 논의하다가 PD가 검사를 사칭했는데 옆에 있었단 이유로 공범으로 기소되어 공무원 자격 사칭(2003년, 벌금 150만원)

 

-성남의료원 짓게 해달라고 시민 2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시의회에 조례를 청구했는데 당시 한나라당 시의원이 장악하고 있던 성남시의회가 47초만에 기각을 때려서 그에 대해 거칠게 항의한 게 특수공무집행방해죄(2004년, 벌금 500만원)

 

-2010년 6월 지방선거 당시 지하철역 구내에서 명함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공직선거법 위반(2010년, 벌금 50만원)

 

-그리고 끝으로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비난의 여지가 큰 음주운전으로 도로교통법 위반(2004년, 벌금 150만원)

 

내가 이 자료를 찾아보고 적잖이 놀랐던 건, 다름 아닌 나의 ‘무관심’이었다. 난 이전까지 사람들이 ‘전과4범’이라 떠들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죄를 지었나 보지.” 그냥 그러고 말았다. 그 전과의 내용이 무엇인지 굳이 시간을 들여 찾아볼 생각조차 안 했다. 그만큼 이재명은 나에게 관심 밖이었단 얘기다.

 

이재명이 형수에게 했다는 욕설 녹음파일은 솔직히 지금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렇게 유복하고 단란한 가정 출신이 아니었기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법한 일가친척을 포함, 가족 간 온갖 욕설과 폭력을 두 눈으로 목도한 경험이 다수 있기 때문이다. 지우고 싶은 기억을 간접적으로나마 또 겪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다. 내 가족 간의 상처도 두 번 다시 마주하기 싫은데 남의 가족사 상처까지 내가 들을 필요가 무에 있을까.

 

어쨌거나, 난 이재명에게 참으로 무관심했다.

 

장면 셋.

며칠 전 저녁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재명이 성남 어느 재래시장에서 유세 연설 도중 눈물을 흘린 장면을 보면서였다. 손까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내 나이 이제 오십이다(놀라는 척 하지마라. 독자 너네도 나처럼 같이 늙어가고 있잖아). 갱년기 호르몬 때문인지 솔직히 드라마나 영화 보면서 눈물 질질 짜는 일이 잦다. 하지만 불혹도 지나 지천명에 이른 나이이고 다사다난하게 살면서 나름 산전수전 많이 겪었는데 정치인이 유세 도중 우는 걸 보면서 따라서 울컥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재명의 말이 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내 주위에 자수성가한 분들 많다. 우리가 다 같이 겪은 대표적 인물로는 이명박이 있겠다. 정치인 이명박이 했던 말들을 한번 상기해보자. 이명박은 입만 열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잘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재명도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검정고시로 대학을 가고 사법시험을 통과해 변호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치인 이재명은 “당신들도 나처럼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민들의 편에 서서, 서민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한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의 삶, 우리 서민들의 삶과 이재명의 참혹한 삶이 투영돼 있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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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실업 공장에서, 소년공으로 일하던 당시의 모습

 

이는 “여러분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드리겠다”는 말과는 철학적, 사상적, 현실적 측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늘과 땅 차이다. 정치란 말로 하는 거다. 이재명의 말들이 귀에 꽂혔다. 실제로 이재명이 걸어 온 길도 그랬다. 이재명은 공직에 있으면서 시민들이 원하는 바가 있으면 추진하고 안 되면 안 되는 이유를 파악하고, 그 장애물을 제거하고, 때론 엄혹한 현실과 타협하면서 반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도록 고군분투했다.

 

대장동 의혹만큼 같잖은 것도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지자체 재개발 사업에서 이재명만큼 공익환수를 한 사례 자체가 없다. 모두가 복마전인 거 뻔히 아는 토목사업에서 굿힘당 주장처럼 이재명이 크게 한탕 해먹으려 했다면 왜 그토록 기를 쓰고 공익환수를 하려 했겠는가. 게다가 성남시의회에서, 더 나아가 국회에서, 민간이 사업을 맡을 수 있도록 LH가 사업을 못하게 기를 쓰고 막은 건 외려 굿힘당이잖은가. 대체 뭘 어쩌란 말이냐.

 

오히려 세상은 상식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최은순은 사기꾼들에게 거액을 빌려줬지만 돈을 뜯기긴커녕 수십억 이익을 보고 나왔다. 김건희도 주가조작범들에게 이용당한 피해자인데 오히려 돈을 벌고 나왔다. 모녀가 허구헌 날 사기꾼 범죄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불쌍한 호구인데 용케도 그 앗싸리판에서 항상 돈을 벌고 나오는 기상천외한 피해자들이다.

 

이재명이 해먹은 게 아니냐고 가자미 눈을 뜨고 손가락질을 하는 애들의 수준이 대략 이렇다. 이 스토리를 지금 우리보고 믿으라고 한다.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고 올라온다. 하지만 아서라. 말아라. 분노는 저들의 것이다. 조국사태로 인해 ‘내로남불’이라며 침을 뱉고 등 돌리고 나서 삼시세끼 조선일보나 주워먹는 처지로 전락할 순 없다. 금도라는 게 있다. 맘에 안 들면 골백번이고 더 등을 돌린 순 있지, 하지만 조선일보를 주워먹을 정도로 바닥을 치진 말아야지. 이제까지 ‘비호감’ 선거라는 말들에 그냥저냥 수긍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선거는 일정 점수 이상을 따면 자격증을 주는 절대평가가 아니다. 상대와의 비교우위를 따져 표를 받는 상대평가다. 모든 선거는 태생적으로 도토리 키재기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오래 살아봤자 20년 이상 더 살겠는가. 당장 3차 세계대전이 터지거나 혜성이 날아와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그런가부다 하고 말 일이다.

 

하지만, 우리 애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척추기립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공정과 상식을 훼손한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며 공정과 상식을 훼손하는 게 삶의 방식인 자들이 주장할 때, 이걸 희극으로만 바라보고 있을만치 내 처지가 태평하지 못한 것도 큰 이유겠다.

 

이제 고작 40여일 남았다. 이재명 후보에게 미안하다. 남들이 비호감이라니까 그냥 비호감인 줄 알았다. 전과 4범이라니까 그냥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냥 무관심했다. 그러다가 꼴랑 40일 남겨놓고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신이 말이 내 귀에 박혔고 당신의 언어로 인해 당신의 삶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꺼이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나의 사령관, 나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길에 나서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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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뉴시스

 

절박하면 이긴다. 격세지감이다. ‘단일화’는 언제나 민주당의 화두였다. 단일화가 아니면 감히 비벼볼 수도 없는 처지인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은 변했고 우리는 강팀이 되었다. 너와 나, 역전의 용사들 아닌가. 내 안을 분노 대신 절박함으로 채운다.

 

겸손하게, 웃으면서, 난 오늘부터 절박하기로 했다. 같이 가자.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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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