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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5. 금요일

사회부장 산하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에게 주어지는 선거권이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하고도 또 당연한 권리다. 선거의 의미와 가치를 떠나서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시민은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이며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또 그 권리는 성별과 재산의 유무와 종교와 피부색에 따라 차별받지 아니하며, 자신의 의사에 따라 직접적으로 행사되고, 그 투표의 내용은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 권리는 별안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손오공처럼 바위산을 뚫고 나온 것이 아니다. “투표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정된 것은 100년도 되지 않는다. 투표하러 가는 자체가 죽을 죄일 수 있었던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에서, 투표라는 것을 구경조차 못해 봤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그리고 정작 세계를 지배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자부하던 영국에서. 한창 대영제국의 끗발을 날리던 1884년 투표권을 보유한 이는 전체 성인의 28.5 퍼센트에 불과했다. 183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이나 기타 피맺힌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이어졌는데도 그랬다. 그런데 그 28.5퍼센트의 ‘성인’은 죄다 남자였다. 여자에게는 아예 투표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한 인물이 우뚝 솟아난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라는 여인이다. 미국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는(또는 그렇게 비쳐졌던) 링컨의 열렬한 지지자이면서 그를 위해 모금운동까지 벌인 행동파 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파리의 기숙학교에서 파리 꼬뮨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평생 독일과 관계된 것을 미워했던 이 활달하고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에멀린은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여성의 종속’ 등 저서를 통해 여성의 예속을 비판했던 J.S 밀의 친구였던 리처드 팽크허스트와 결혼하면서 팽크허스트라는 성을 얻는다.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그녀는 남편의 정치 활동을 외조하면서 현실에 눈을 떴는데 남편은 이런 식으로 그녀의 잠자고 있던 저항의 영혼을 일깨웠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참고 있는 거요? 왜 남자의 눈을 손으로 할퀴면서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거요?” 이런 말들은 잠자고 있던 암호랑이의 코털을 뽑는 행위와 같았다. 에멀린은 점차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거대한 세력의 지도자로 성장해 간다. 남편이 죽은 뒤 다소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랑하던 맏딸 크리스터벨과 함께 여성 참정권 쟁취 대오에 뛰어든다.


 


1903년 에멀린은 여성사회정치연합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을 창설한다. WSPU. 이 이름은 기억해 둬도 좋을 것이다.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그 패러다임부터 조금 달랐다. 이전의 운동단체가 이미 선거권을 가진 남성들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는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정도의 “우리도 이만큼은 주세요”가 아니라 모든 여성의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는 요즘 한국 말로 하면 “닥치고 투표권!”을 내세운데다가 이전의 서명운동이나 청원같은 방식에서 벗어나 ‘전투적인’ 방식을 서슴없이 사용한 것이다.


 


1911년 정부가 “재산이 있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약속했다가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렸을 때 에멀린과 그 동지들은 분노한다. 그리고 1912년 3월 1일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여성들은 그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한다. 영국 피카딜리 광장 등 중심가의 모든 상점과 건물의 유리창이 박살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건물에 불을 질렀고 버킹검 궁전 난간에 몸을 묶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미친’ 여성들의 파괴 행위에 대해 개탄하는 이들에게 던진 에멀린의 한 마디. “...정부가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재산권이다. 우리는 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적을 분쇄하고자 한다.”


 


“폭력시위를 엄단하여 공공의 안정을 지키는” 것은 동서고금 정부의 공통된 수사, 정부는 당연히 수백 명의 여성들을 감옥에 처넣었다. 그러자 여성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부는 그 입을 벌리고 강제로 음식물을 흘려넣는 강제 급식을 실시했고,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지면 풀어줬다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잡아넣는 법까지 만들었다. 옥스퍼드 출신의 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한창 진행되던 경마장에 들어가 국왕 소유의 말을 막아서고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 부르짖다가 밟혀 죽은 것은 그 모든 부당한 억압과 질곡에 대한 저항의 절정이었다. 심지어 귀족 여성들이 노동자 복장으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몸을 상하는 일도 있었다. 쉰을 훌쩍 넘긴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 투쟁의 중심에 있었고 열두 번이나 되는 단식투쟁을 벌이며 ”Vote for Woman!"을 부르짖었다.


 



 


“우리들 여성 참정권운동가들은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그 임무란, 바로 인류의 절반을 해방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을 통해서 인류의 나머지 절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 난리굿판을 치르고, 또 전쟁까지 겪은 후에야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 그리고 21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보통 선거권이 주어진다. 가만 이상하다. 왜 30세일까. 이유는 “전쟁에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동일하게 선거권이 주어지면 여성 유권자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즉 멍청한 여자 유권자가 더 많아지면 곤란하다는 속셈이었다. 영국 남성들의 유전자는 한국 남성들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 그렇게 쪼잔하고 쩨쩨한지. 하긴 어느 나라 남자는 그렇지 않았겠냐마는.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조건의 보통선거가 실시된 것은 또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였다. 그 지난한 세월의 결실이 맺어지기 직전, 1928년 6월 14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얻는 교훈은 한 가지다. 세상에서 거저 얻어지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공짜로 이뤄지는 진보는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남편 리처드 팽크허스트의 말대로 “눈이라도 할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질주하는 말의 말고삐를 잡아채고 외치려는 노력이 없고서는 주어질 수 없던 권리였다. 어디 여성참정권뿐이랴. 우리들이 물처럼 마시고 공기처럼 들이키는 권리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찾아야 할 오아시스였고 화생방 훈련 후에 들이마시는 바깥 공기였던 것을.



 




 


 


산하칼럼, '산하의 오역' 출판


 


산하의 오역 1년치가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저 좋아서 끄적이기 시작한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쁘기도 뿌듯하기도 하고, 하여간 제가 했던 뻘짓 가운데에서는 개중에 꽤 괜찮은 뻘짓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은 출판사에서 정했는데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 그 서문입니다.


 










 


서문 수정


 


한 1년 8개월쯤 전이었을까요. 트위터를 뒤적이다가 이왕 끄적일 바에는 신변잡기 외에도 의미도 있고 제 스스로에게 남는 것도 있는 포스팅을 해 보자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보이려는 마음보다는 저 혼자 재미로 140자 트위터를 채운 일은 과거의 ‘오늘’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습관이 됐습니다.


 


우선 쉬웠습니다. 탁월하고도 성능 좋은 검색 엔진들은 정말 없는 게 없는 정보력을 가졌더군요. 과거 같으면 몇날 며칠 도서관 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수고가 스마트폰 클릭 몇 번으로 대체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자애로운 문명의 혜택인지요. 그에 더하여 매해 돌아오는 하루 하루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으며 이미 세월과 문자의 틀에 갇혀 버린 그날 하루 하루에 사람들의 피와 땀이, 눈물과 환호가 알알이 맺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쏠쏠한 재미였습니다. 꼭 공부 못하는 놈들이 쉬는 시간에 공부한다고, 대학 때에는 제대로 전공 (사학) 공부하지도 않은 녀석이 느지막히 역사의 잔재미를 즐기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페이스북에서는 트위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요약, 생략해야 했던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자세히 올리게 됐고, 어영부영 그것이 1년을 채웠습니다. 글을 올리면서 나름 글들을 묶을 제목을 고민했었습니다. 그게 ‘산하의 오역’이었습니다. 그 동안 “산하는 네 닉넴이라고 치고, 오역은 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간단하게 답변하자면 ‘오늘의 역사’의 준말입니다. 그렇게 별 뜻 없는 말줄임이었지만 시간을 쌓아 나가다보니 부수적인 뜻이 첨가됐던 것 같습니다.우선 오늘의 역사이기도 하며 둘째로는 나만의 역사를 뜻하는 ‘오역’(吾歷)이고 그러하다하보니 당연하게 발생할 수 있고 경계해야 하는 오역(誤歷)일 수도 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이야기하는 사람의 시각과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 객관’은 없을 테고, 그 와중에 당연히 발생할 것이니까요.


 


그 다음으로 받은 질문은 “왜 조선 시대나 그 이전의 얘기는 거의 없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설명드리자면 제가 정했던 몇 가지 기준을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양력 날짜 우선입니다. 트위터에서 짤막하게 올릴 때 충무공 이순신을 두 번 죽인 (그분의 전사 날짜를 양력, 음력 모두 기록한 통에) 이후 양력을 고수하기로 했고, 그래서 간혹 서양 얘기는 과거로 거슬러 오르지만 우리를 비롯한 동양쪽 역사는 근현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 겁니다.


 


둘째 아이들 위인전들에 등장하는 큰 위인들이나 역사를 직접적으로 바꾼 대사건보다는 미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쉽게 잊혀지고 있는 듯한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자 했습니다. 역사란 “특별하게 빛나는” 사람들의 기록이면서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이들의 삶의 총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는 옛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되새길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는체 하실만한 은사님도 하나 없이 전공과 담을 쌓았던 처지에 감히 ‘역사’를 들먹이는 것은 솔직히 면구스러운 일이었지만, 하나 또렷이 기억하는 경구가 있다면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크로체의 말을 들겠습니다. 오늘 일어났던 일은 어제 일어났던 일이고, 결국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역사, 그리고 나만의 역사, 그래서 틀릴 수도 있는 사연들을 ‘과거의 오늘’에 빗대어 얘기하면서 저는 그들이 살았던 오늘 역시 땀 냄새와 발고린내와 거친 숨결이 생생하게 배어 있는 ‘오늘’임을 깨달았습니다. 제 눈길에 채였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역시 결국 ‘역사’가 아니라 ‘오늘’이기도 했던 겁니다. 역사라는 것이 교과서속의 글줄만도 아니고 무덤 속의 먼지만이 아닌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작년 12월 31일,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장탄식을 하며 신문을 뒤적이던 저는 한 기사에 눈이 못박혀야 했습니다. 어느 대학의 청소부 아주머니들의 송년회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였습니다.


 


차비가 없어서, 정말로 차비가 아까와서 먼 거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형편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그 처지에 누구를 돕는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겁니다. ‘제 코가 석 자’인 처지에 누가 누굴 돕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역시 신문에 나올만 했습니다. 자신의 학교 청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3년간이나 노력해 왔던 것입니다. 아주머니들을 도와 학교 당국과 싸움도 하고 협상도 도왔던 그는 마침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는 길어질 대로 길어진 자신의 코 앞에서 좌절하게 됩니다. 도무지 등록금을 내지 못할 처지임을 깨달은 겁니다. 백방으로 뛰어봤지만 돈 나올 구멍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나섰습니다. 그 박봉을 쪼개고 파지 팔아 모은 돈을 보태어 1백만원을 마련했고, 아주머니들이 막간을 이용해 차린 송년회 자리에 문제의 학생을 초대하여 전달했다고 합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학생은 제가 이 돈을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이고, 박수를 치는 노동자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학생에게 아주머니들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더 고맙다.”


 


이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자신의 어려움만큼이나 남의 어려움을 살필 줄 알았던 한 아름다운 청년을 통해서, 자신들을 도왔던 이의 어려움을 저버릴 수 없었던 아주머니들을 통해서, 저는 이런 식으로 역사의 퍼즐들이 맞춰져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맥이 끊기지 않고 흘러온 역사의 물줄기의 물방울들이란 바로 이런 모습들이겠거니 하는 상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청년은 평생 오늘을 잊지 않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그와 함께 했던 3년을 망각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 작은 개인의 기억들은 사회적 기억으로 승화될 것이고, 때로는 좌절하고 더러는 기념되면서 역사라는 거대한 돌탑의 일부를 이루겠지요.


 


21세기 한국 어느 대학교의 고학 청년과 같았던, 또 그와 함께 눈물 흘렸던 아주머니들과 비슷했던 수많은 이들, 평범하지만 위대하기도 했던 이들, 또 반대로 탁월하지만 사악했던 이들, 그들이 얼키고 설켜낸 역사 속 오늘, ‘그들이 살았던 오늘’들을 이렇게 모아 봅니다. 또한 우리의 오늘도 언젠가는 ‘그들이 살았던 오늘’로 남을 것임을 되새겨 봅니다.


 


그렇게 내세울 것도 없는 책으로 묶을 결심을 해 주신 도서출판 웅진지식하우스 보경님과 보잘것 없는 원고를 갈고 닦아 환골탈태하도록 도움 주신 편집자 공성아님, 그리고 멋진 디자인으로 책의 품위를 열 곱은 더해 주신 디자이너 000님, ‘내가 살았던 오늘’들을 함께 했던 직장의 선후배, 그리고 동료 여러분, 그리고 별 것 아닌 이야기에 웃어 주시고 맞장구쳐주셨던 트친과 페친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의 가장 중요한 부분,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부모님들께도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사를 빼놓을 수 없겠지요. 특히 사춘기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아들 녀석이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면 정말로 기쁘기 한량이 없겠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을 뒤적이다 보니 1년 365일 의미 없는 날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365일도 그러하겠지요. 아무리 허투루 보낸 날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오늘이겠지요. 그리고 그날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역사를 만들고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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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장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