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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0. 금요일

너클볼러


 


**지난 ‘신돈’편을 읽고 넘어오믄 더 재미질지도 모름. 아님 말고…


 


포은 정몽주


 


 


The Politician.


 


1392년 어느 날.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포은 정몽주에게서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이성계가 개성에 컴백했다는 것은 루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전치 30주의 중상을 입었다는 첩보를 접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부상을 입은 ‘혁명파’의 수장 이성계는 버젓이 개성에 입성해 있었다. 정몽주는 보좌진에게 ‘이성계가 어떻게 개성에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 있느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성계의 개성 컴백과 함께 ‘정몽주 제거설’이 프락치를 통해 입수되었지만 당사자인 정몽주는 그리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뜻을 같이했던, 무인이지만 문인을 아끼고 따랐던 이성계가 뒤에서 칼을 꽂을 것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등에 칼을 쑤셔 넣었다간, 그들이 꿈꾸는 혁명의 정당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믿음도 살짝 있었다. 불안해 한 건 정몽주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보좌진들이었다.


 


정몽주에게 일정을 전해 받은 보좌진들은 정몽주를 만류했다. 정몽주가 제시한 일정은 두 가지였다. 오전엔 이성계 문병 및 독대 일정, 오후엔 절친이었던 전 판개병부사(현재의 서울시장) 유원의 문상일정이었다. 당연히 보좌진들은 오전 일정을 취소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취소하지 않았다. 공양왕을 우습게 보는 이는 있어도, 자신을 우습게 보는 이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이성계의 옆에는 그의 ‘원 투 펀치’ 삼봉 정도전과 조준도 없는 터였다. 차림을 마친 정몽주는 차분하게 사택을 나서 이성계에게로 향했다. 허나 정몽주가 잊고 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돌아가는 판세를 읽고는 중상을 입고 벽란도의 응급실에서 링거를 꽂고 있던 이성계를 개성으로 긴급 호송한 이, 26세의 이방원이었다.


 


가장 최근의 이방원

 


이성계의 사저에 도착한 정몽주는 이성계와 독대했다. 그러나 그 둘은 별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 둘은 각각 열쇠를 쥐고 있었다. 고려라는 현재의 왕국의 열쇠를 지닌 정몽주, 그리고 '새 나라'라는 혁명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성계. 그들은 말없이 자신들이 쥐고 있는 열쇠만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뿐이었다. 자리를 뜬 정몽주를 잡아 세운 건 다름 아닌 이방원이었다. 이성계의 사택에서 불꽃이 튀었던 곳은 이성계와 정몽주가 독대했던 안채가 아니라, 이방원과 정몽주가 마주하고 있던 사랑채였다. 이방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여차역하여 여피역하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성황당후단 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긔 엇더리, 뎌런들 긔 엇더하리

성황당 뒤담이 해인들 긔 엇더하리

우리도 이러히여 살어이신들 긔 엇더하리




 26세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도발적이나 정중한 노래 ‘하여가(何如歌)’를 이방원이 먼저 읊었다. 고려를 대표하는 학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다름 아닌 ‘뭐 볼 거 있다고 거기서 그러고 있냐’는 것이었다. 에둘러 가지 않는, 다분히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정몽주는 자신의 제거하려는 장본인은 이성계가 아닌 이방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속으론 ‘이런 어린 좆밥 쉐이가 어른들의 싸움에 건방지게 낑기려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하여가를 듣고는 만만한 놈이 아님을, 잘못 건드렸단 조 땔 수 있음을 느꼈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방원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이 친구 이게 바로 진정한 프리스타일이야’라는 표정이었다.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지여)


 


이 몸이 주거 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없고

님 향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정몽주의 답가는 ‘단심가(丹心歌)’였다. 정몽주가 풋내기인 줄만 알았던 이방원에게 답한 메시지는 ‘여기 볼 거 없어도 너한테는 안가 이 쉐이야’였다. 쿨 하게 한 곡 프리스타일로 읊어 준 정몽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대문인다운 답가로다. 그것도 프리스타일로 거침없이 쏟아내다니’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정몽주의 제거를 주저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방원의 옆에는 수하 조영규가 투엑스라지급 오함마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은 쉽게 지시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애초 일정대로 절친 유원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한 시대가 저물지도 모를 역사적인 순간, 긴히 상의할 친구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쉽고, 고독한 그런 순간이었다. 술 몇 잔으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후, 정몽주의 눈앞에 선지교가 들어왔다. 문득 스승이었던 이색과, 후배인 정도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눈앞에는 등장한 건 시커먼 장수 한 놈이었다. 한 손에는 오함마가 들려 있었다. 오함마는 주저 없이 정몽주에게 향했다.


그가 죽던 날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 낫다고 하여 선지교는 선죽교로 불리기 시작했다. 자식을 잊지 못한 노모의 비석은 다리 옆에 세워졌는데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 눈물로 늘 젖어있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유원의 문상을 마치고 돌아가던 정몽주가 죽음을 예상하고 말을 거꾸로 타고 갔다는 설도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 한 장면으로 인해 정몽주는 ‘지조의 아이콘’이 되었다.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신념을 지킨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다. 정몽주가 세상을 떠나던 날. 정몽주에 의해 유배에 처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조선건국의 프로듀서 정도전은 새 나라를 반대한 간신 정몽주가 ‘지조의 아이콘’이 될 거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단심가의 원작자가 정몽주라는 확증도 없었다.(1)


정몽주가 살해되고 3개월이 지나 고려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500년의 왕조, 조선이 건국되었다. 정몽주가 죽은 지 6년 뒤 정도전은 정몽주를 보낸 이방원에 의해 참수 당한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를 지조를 지킨 학자로 복권했다. 정몽주의 지조를 기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신하들을 향해 자신에게 ‘지조’를 조공하라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정몽주가 ‘지조의 아이콘’이 되는 데에는 그를 죽이고, 그를 복권한 이방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정몽주는 성리학자의 창시자라 불리는 학자 중의 학자였다. 동시에 이성계, 정도전의 태그팀과 스틸케이지 매치가 가능한 유일한 정치인이었다. 정. 치. 인.

 


스틸케이지매치




WELLCOME.


1337년. 성균관 재생인 아버지 정운관과 어머니 이 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유복한 환경에서 아무런 모자람, 걱정 없이 자랐다. 화분을 떨어뜨리는 태몽을 꾸고 나았다고 해서 ‘몽란’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나 이름은 몽란에서 몽룡으로, 최종적으로 아버지가 중국의 주공(주나라 문왕의 아들)을 만나는 태몽을 꾸었다는 이유로 ‘몽주’로 바뀌었다. 동생이 셋이 더 있었지만 사는 데는 문제 없었다. 아버지가 성균관 재생으로 살짝 박봉이었으나 집안은 제법 명문 있는 양반가였던 탓에 동생이 열이 더 있다고 해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머니 이 씨는 형제 중 정몽주를 유독 아꼈다. 장남인 데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총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씨에 눈에는 미친 듯이 총명한 정몽주의 미래가 불안해 보였다. ‘백로가’(白鷺歌)(2)를 지어 정몽주에게 선물하며, 명심 또 명심케 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희 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어머니가 그토록 까마귀덜, 그러니까 간신(奸臣), 역신(逆臣) 무리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너는 내 인생의 백로(You Are The 백로 Of My Life)라고 그리 노래를 부르며 당부했건만, 정몽주를 이를 어기고 혁명의 수괴 이성계와 수괴의 브레인 정도전 등과 무려 일촌 같은 것을 맺으며 어울렸다. 예나 지금이나 하지 말라는 게 더 꼴리는 법이다.


아버지 정운관과 당시 잘나가던 유학자인 이색(3)은 맞팔하는 사이였다. 자연스럽게 이색의 문하생이 되어 엘리트코스를 밟아 장원급제하게 된 정몽주는 어느 날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건장한 사내를 마주하게 된다. 조선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스승 이색의 문하생 중 단연 돋보였던 정몽주를 오래전부터 흠모하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도전의 나이가 17세, 정몽주의 나이 23살 때 일이다.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대학, 중용, 맹자 등을 추천했고, 정도전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때는 바야흐로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고,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신진사대부들을 기용하여 성균관 곳곳에 배치하던 때였다. 이색은 성균관 대사서가 되었고, 정몽주 등은 학관이 되었다. 뒤를 이어 추천에 의해 정도전도 학관이 되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의 부패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공민왕의 돌격대장 신돈이 토지제도와 노비제도의 개혁을 진행하던 그 시점. 성균관 학관이었던 정몽주는 정치인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끼던 후배 정도전도 마찬가지였다.



정몽주보다 살짝 더 잘생긴 상봉 정도전

 



Once Upon A Time.


1371년, 신돈을 날려버린 공민왕은 이름도 요상한 자제위(子弟衛)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말은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계 모임 같은 것이라 하였지만, 사실은 동성애과 관음에 빠진 공민왕의 여흥을 위한 클럽이었다. 미쳐가는 공민왕은 다양한 동성파트너와 ‘음음’은 물론 동성파트너로 하여금 자신의 부인들을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파트너 중 한 명인 홍윤이 부인 중 한명인 ‘익비’를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홍윤과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내시 최만생을 날려버리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안 홍윤과 최만생이 선수를 쳤다. 술에 취해 떡이 된 공민왕에게 연장세례를 퍼부은 것이다. 공민왕은 연신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를 외쳤지만 홍륜과 최만재는 이제 막 건전지를 갈아 끼운 자동 처키 인형과 같았다. 찌른데 또 찌르고, 안 찌른데 찾아 찔러댔다. 이렇게 그 어떤 왕보다 가장 잔인하게 죽은 공민왕의 빈자리는 우왕(반야의 아들)의 몫이 되었다.


신돈과 공민왕이 '빠이빠이' 하고 우왕이 들어선 뒤 권문세족(4)이 중심이 된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세력과 권력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개혁파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웃나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가 일어나 노쇠한 원을 압박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공민왕의 대중외교 기본방침은 ‘반원’이었다. 잘나가던 기황후(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를 등에 업는 기황후의 형제들은 원나라는 물론이요, 고려도 지 꼴리는 대로 쪼물딱거리려 했다. 공민왕은 그 꼬라지가 보기 싫어 죽을 지경이었다. 원이 슬슬 쇠퇴하자 공민왕은 친원 세력들을 치기 시작했고, 그에 위기를 느낀 친원 세력들은 공민왕을 제거하려 했다. 결국, 사태는 친원 세력 싹쓸이에 성공한 공민왕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해 기존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권문세족을 아쌀하게 거시기해버리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공민왕이 '세이 굿바이' 하자 권문세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왕을 앞세워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시 꺼내 든 외교카드는 바로 뻔하디뻔한 ‘친원’카드였다. 어쨌거나 신돈과 공민왕 콤비에 의해 살짜꿍 전진한 역사가 순식간에 뒷걸음질 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반대하고 나선 이들은 바로 정몽주, 정도전, 박상충 등의 이색 패밀리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였다. 그들의 요구는 ‘끝물인 원과 뭘 하자는 것이냐 씹세들아’라는 현실적인 제안이며, 기득권세력을 향한 정당한 일침이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내주는’ 논스탑 유배였다. 총알 유배 시스템을 통해 친원주의를 반대한 대부분이 즉각 유배 길에 올랐다. 그래도 정몽주는 운이 좋았다. 박상충과 전녹생 등은 형벌의 후유증으로 유배 도중 숨을 거뒀다. 사실 정몽주는 운이 나쁜 적이 없었다.




Nothing Bad


정몽주에겐 나쁜 일이 거의 없었다. 스스로 나서 어쩌다 역적으로 몰린 김득배(과거에서 자신을 선발한 은인)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지내도 별 탈이 없었고, 자신을 성균관 학관에 오르게 했던 신돈이 처형 되었을 때도 별 탈이 없었다. 친원 정책의 부활을 반대했을 때도 유배 갔다 와 별 어려움이 없이 복귀했다.

 

집에는 한 섬의 곡식도 없고,

애덜은 춥고 배고프다 울고,

내가 어떻게든 끼니를 꾸리고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책만 보고

그래도 성공할 거라 기대했는데,

집안에 광명이 깃들거라 생각했는데

훗날의 영광과 성공은 개뿔.

우리에게 남은 사람들의 웃음뿐.



하지만 삼봉 정도전은 달랐다. 이 가사는 계속된 유배와 유랑으로 가난에 지친 자신의 처지를 아내의 입을 빌려 풀어낸, 라임이 일품인 랩 ‘가난’(5)의 일부다. 정도전은 유배 3년, 완전 복권이 되지 못한 상황에서의 4년간의 칩거를 통해 리얼 궁핍과 슈퍼 고독을 체험했다. 그러한 가난과 고독의 실존적 체험은 정도전으로 하여금 고려가 아닌 이성계를 선택하게 했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전과 달리 정몽주는 2년 뒤 언제 그랬냐는 듯 사신으로 복귀했다. 그의 학문적,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시대와 권력에 크게 거슬리지 않으려 했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고려 말 공민왕 때도, 우왕 때도, 창왕 때도, 공양왕 때도 그는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Show Must Go On.


 

너에게 모든 걸 뺏겨버렸던 마음이 다시 돌아오는 걸 느꼈지.


너는 언제까지나 나만의 나의 몽주라 믿어왔던 내 생각이 틀리고 말았소.



어쩌면 1392년 재활치료 중인 이성계의 사저 사랑채에서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하여가에 대한 답가로 단심가를 받고서는 뒤돌아서는 정몽주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는 서태지의 하여가였을지도 모른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불같은 승부사. 1392년 정몽주를 오함마로 보내면서 고려의 ‘쫑’을 고하게 한 그 남자. 태조 이성계와 실세 정도전의 푸쉬로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도전과 방숙을 깔끔하게 저승길로 보내버린 '1차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그 남자. 방숙의 빈자리를 차지한 방과를 재끼려던 방간(회안대군)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가볍게 제압한 뒤 왕위에 오른 그 남자. 여색이 짙어 간통질을 하고 지랄을 했던 장남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셋째 충녕대군(세종)을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해 한글창제가 가능하게 했던 그 남자. 암튼 그 남자. 바로 이방원이다.


1400년 하윤 등이 이방원을 세자로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더랬다.


‘정몽주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방원)이 없었다면 큰일이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정도전의 난에 정안공(이방원)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정몽주는 조선의 건국을 방해한 구시대를 대표하는 간신이요, 정도전은 태조의 계비, 강비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던 겁대가리를 상실한 간신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 둘은 모두 이방원에 의해 이승과 굿바이. 이렇게 간신이었던 정몽주가 지조를 지킨 불멸의 충신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그 시작은 바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보내버린 태종(이방원) 때였다. 복권 역시 태종 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도 있었다. 공민왕 때 픽업되어 우왕과 창왕을 모두 모시고, 게다가 창왕을 폐위시킨 뒤 공양왕까지 모신 철새즘(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서식하는 주의)의 종결자. 그것이 바로 정몽주의 본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했던 것이 바로 ‘우왕신씨설’이다. 우왕(모니노)이 공민왕과 반야 사이가 아니라, 신돈과 반야 사이의 씨라는, 곧 신 씨라는 설이다. 이렇게 되면 정몽주는 공민왕(왕씨), 우왕(신씨), 창왕(우왕의 자식이니 곧 신씨), 공양왕(왕씨)을 모두 탈없이 모신, 철새 이인새, 김민새우원등은 명함도 못 내밀 철새즘의 본원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의 우상화 과정에서 이 이유는 ‘우왕과 창왕이 신 씨임을 몰랐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가볍게 교체된다. 만약 ‘우왕신씨설’이 사실이라면 한때 신돈에게 견제를 받았던 이성계가 우왕이 신돈의 씨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이를 가장 중요한 학자이자, 정치인인 정몽주가 의심하지 않거나, 몰랐을 리... 없다. 고려 족보를 개족보로 만들기 위해 등장한 ‘우왕신씨설’은 정확히 입증된 바 없다. 허나 권문세족(5)을 무장해제 시키려 했던 공민왕, 권문세족을 등에 업은 우왕, 이성계에 의해 왕좌에 오른 공양왕 때도 모두 정몽주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Trouble.


정몽주와 이성계는 함께 개혁을 논한 절친(6)이었다. 권문세족들의 권력과 토지 독점. 반명친원의 외교정책. 불교의 폐단 등이 주요 개혁 사안들이었다. 무인인 이성계와 문인인 정몽주는 함께 전장을 누비며, 동시에 막사에서 토론하고 논쟁했다. 뒤이어 정도전이 합세했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브레인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개혁을 함께 꿈꿨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함께 그렸던 그들이 틀어지게 된 결정적 사건은 바로 위화도 회군이었다. 명나라가 고려의 북쪽 영토가 자신들이 나와바리라며 반환을 요구하자 최영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이를 반대했다. 오히려 반환은커녕,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지역이 우리 나와바리라며 요동정벌을 주장했다. 이에 이성계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격한다. 하지만 이성계와 5만 군사는 압록강의 위하도까지 간 뒤에 다시 내려왔다. 이유는 심플하게 4가지만 들었다.


작은 나라가 큰나라(명)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음.

농번기에 군사모집은 개뿔.

명과 싸우다보면 오랑캐가 빈집털이를 들어올 수 있음.

장마철이라 활에 아교가 풀어지고, 전염병이 유행할 것임.


사실 이성계는 애초부터 요동정벌엔 관심이 없었다. 요동정벌을 강력히 요구했던 이는 최영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최영을 아끼고 또 아꼈던 터, 자신의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해서 5만의 군사를 이성계에게 내어주고 대신 가게 했다. 한때 최영과 이성계는 최고의 무신 콤비였다. 이 콤비는 북으로는 홍건적, 남으로는 오랑캐를 거침없이 몰아냈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는 늘 최영의 것, 이성계는 만년 2인자였다. 어쨌든 이성계는 북진하라는 왕의 명의 거역하고 개성으로 회군했다. 군 통수권자의 명을 거역했음으로 군법에 의해 이성계가 최고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처벌은커녕, 수도를 포위하고 재빠르게 선수 친 이성계는 일단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최영부터 작살내고, 곧이어 우왕을 폐위시켜 버렸다. 권력이 이동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이성계가 기득권세력 붕괴를 위해 선택한 것은 바로 공민왕의 신돈이 추진했던 바로 그것. 토지개혁이었다.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조준은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안, 즉 과전법을 내놓았다. 권문세족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사대부들에게 토지가 아닌 세금 징수의 권한인 수조권을 나누어 줌으로써 관료가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권문세족의 권력을 무력화 시키기위한 수단이었다. 당연히 보수세력들의 반대가 있었다. 그 중심엔 이색이 있었고. 제자 정도전은 반대편인 개혁진영에 서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의 스탠스는 어정쩡했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했지만 토지 제도의 개혁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몽주와 개혁파는 서서히 멀어져 갔다.


보수파에 있던 이들은 이성계에 의해 탄핵 후 유배되었다. 이색 역시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재분배, 혹은 국가로 귀속시키는 전제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1391년 새로운 토지대장이 반포되었고, 권문세족들이 지 꼴리는 데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몰수 뒤 재분배되거나 국가에 귀속되었다. 땅을 빼앗겨 일개 노비로 전락했던 양인들이 신분을 되찾았다. 그러나 정도전의 회고처럼 토지개혁은 ‘민 民’에 기반한 완벽한 형태로 진행되지 못했다. 일부 권문세족에게 편중되어있던 권력이 신진사대부에 넘어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권력은 이성계 쪽으로 완벽하게 이동되었다. 이성계로의 권력이동이 서서히 확실해져 가면서 정치인 정몽주의 스탠스도 확실해졌다. 정몽주의 결론은 고려왕조를 지킨 뒤에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정몽주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공민왕, 우왕, 창왕을 거쳐 공양왕까지… 늘 그는 고려의 학자이자, 고려의 정치인이었다. 늘…




Again 1392.


이제 정몽주는 무너져가는 고려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 지키고자 하는 정몽주의 눈에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쪼물딱거렸던 기황후의 형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의 스승 이색을 유배 보낸 정적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는 이성계의 소식은 정몽주에게 이성계 패밀리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다가왔다. 정치인 정몽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재빠르게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 조준과 정도전을 비롯해 남은, 윤소종, 조박등의 측근들을 탄핵, 유배 길로 모셨다.


긴. 급.  호. 송. 


무릇 조직을 '박살'내기 위한 프로세스는 핵심의 제거에서 우두머리의 제거로 다단계스럽게 올라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핵심의 제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정몽주의 작업은 올스톱된다. 이성계가 개성에 컴백했기 때문이었다. 정치인 정몽주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국가의 존망을 놓고 권력과 권력이 벌인 사투에서의 패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몽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몽주는 스페이드 에이스를 들고 있었다.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가 쥐고 있던 카드는 이방원이라는 조커였다.


정치인 정몽주는 에이스를 던진 판에서 실패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아무리 이성계의 신망이 두텁다 하더라도, 때는 혁명전야였다. 만약 정몽주가 카드를 보여주지 않고 판을 덮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성계의 옆에 정몽주가 있고, 정도전의 옆에 정몽주가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조선왕조는 오백 년이 아니라 천 년을 갔을려나? 에이스를 던진 정몽주의 한 수는 성공이었을까? 실패였을까? 만약 던지지 않았더라면 ‘지조의 아이콘’ 될 수 있었을까? 정도전의 곁에서 민심에 기반한 진짜 혁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고려에서 조선까지를 놓고 보면 포은 정몽주는 무너지는 왕조를 지키고자 한 ‘지조의 아이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만을 놓고 보면 그 공민왕 이후의 모든 왕과 함께한 오랜 정치권력자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뭐 이 정도다. 정몽주가 꺼내 든 칼은 제대로 휘두르기도 전에 부러졌고, 이방원이 꺼내든 오함마 한 방에 정몽주는 이승과 작별했으며, 그가 이방원 앞에서 불렀다는 하여가와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불러주었다는 백로가의 원작자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가 복권되고 ‘지조의 아이콘’ 되기 시작한 건 그를 저승으로 보낸, 자신의 권력에 그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가 필요했던 태종(이방원)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믄 지금의 ‘지조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는 좀 오바일 수 있겠다.


필자의 생각은 뭐 그렇다는 것이다.


 


(1) 신채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단심가는 정몽주가 아니라 백제여인 한주가 부른 것이라 주장


(2)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 이희령의 약파만록(藥坡漫錄)에서는 연산군때의 김정구 작품이라 되어 있다.


(3)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충신을 일컫는 삼은 중 한 명.


(4) 원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한 백성의 등골을 뽑아먹는데 정통한 고려시대 문벌귀곡 가문.


(5) 삼봉집 4권. 가난을 변형한 것임.


(6) 이성계가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 삼개를 칠 때 정몽주도 함께했다. 당시 서로에게 감화되어 절친이 됨.



 


붙임.

이 글의 일부 내용들은 김용헌의 ‘조선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을 참고, 인용하였다.


 


추신.

홍솨덕이가 이성계가 부르고 정도전이 프로듀싱한 역성혁명(조선건국)을 5.16 군사 쿠데타와 ‘고거이 고거’라고 했다지. 쌍팔년도 역사의식이라고 치부하고 말기에도 참으로 덜 떨어진 비유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무식하면 여럿 고생한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To Be Continued…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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