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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25. 목요일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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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극비수사>가 흥행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조금은 뜻하지 않게 개봉하자마자 이 영화를 봐 버린 사람으로서, 축하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기실 정효주 유괴 사건은 몇 번의 영화로도 다 풀기 어려운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거니와, 영화는 그 실마리 중 가장 짧은 것을 풀다 만 정도의 느낌이다.


형사와 도사는 기묘한 불협화음의 앙상블이었고 김윤석은 늘상 그가 보이던 모습 딱 그대로이되 유해진은 그가 지녔던 매력마저 발휘하지 못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도 모르겠고 유괴범과 유괴범을 쫓는 사람들간의 긴장 구도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며 인물들은 동화책처럼 평면적이다.


각설하고, 영화 속에서의 어정쩡한 유괴범 매석환이라는 사람을 한 번 돌이켜 보자. 이 매석환이라는 사람도 영화 소재가 될만한 사람이다. 1939년생 가량으로 추정되는 그는 몇 번씩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악당(?)이었다. 그의 매형이 순경이었는데 매형이 본 처남평은 이러하다. “저놈이 자라면 큰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빈 깡통이 될 거라고 말해 왔다.”


이 미래의 큰 사람, 또는 빈 깡통은 나이 십대에 벌써 신문 지상을 장식한다. 극장 입장권 위조 혐의였다. 단성사와 국도극장 등의 영화표를 위조하여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인기 있는 영화의 경우 4백 환을 호가하던 즈음에 매석환은 백 환이나 50환에 위조 극장표를 신나게 팔아치웠다고 한다. 그가 위조한 영화표는 천 장. 극장으로서는 부아가 치밀 일이었지만 관객들은 뜻밖의 싼값에 산뜻한 영화 감상을 즐겼으리라.


이런 식으로 전과 기록을 쌓아가던 그도 대학생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영화표나 위조하던 인생이 공부는 했을 리 없고, 그가 살았던 방식 그대로 대학교에 부정입학을 시도하다가 돈만 날린다. 이때 사오십만 환을 날렸다니 적잖은 타격이었을 터. 끙끙 앓던 이 엉성한 위조범은 크게 한 탕을 기획한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를 자랑했던 청와대 경무관 곽영주, 4.19 이후 감옥에 들어가 있던 곽영주의 아들 곽승근 군을 유괴한 것이다. 아이를 꼬드긴 거짓말은 무척 깜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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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경호하는 곽영주


“오늘 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와. 그래서 성난 데모대가 너희 집을 둘러싸고 있어! 데모대에 잡힐 수 있으니 어서 아버지 만나러 구치소 앞으로 가자.” 4.19를 경험한 곽영주의 아들이 그림처럼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승근 군을 자기 집으로 끌고가 지하실에 가둔 후 줄기차게 협박한다. 후일 정효주 유괴 사건 때 선보이던 수법 그대로 돈을 요구하고, 헛수고하게 만들고, 형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길가는 소녀에게 돈을 주고 메신저로 활용하기도 하고 지게꾼을 피해자 부모에게 접근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수고는 헛되이 9일만에 그는 체포되고 만다. 수갑을 차고 신분을 밝힐 때에도 경희대학생이라고 했다니 어지간히 대학에는 가고 싶었나 보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펄쩍 뛰며 그런 학생 없다고 손을 저었다)


경찰에서 범행 동기를 물을 때 이 모지리 유괴범은 돈 말고 엉뚱한 이유를 댄다. “돈도 돈이지만 원한도 있단 말입니다.” 경찰 귀가 번쩍 했으리라. 원한이라니 그게 뭐냐? 매석환 왈 “4.19 때 바리케이드 앞에서 오줌을 누다가 곽영주한테 걸려서 경찰봉으로 열나게 맞았단 말입니다. 내 그래서 저 사람 괴롭혀 주리라 마음을 먹었었다고요.” 아마 열심히 듣고 있던 경찰, 에라이 자슥아 하면서 서류철로 매석환 머리를 내려쳤으리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괴당했던 소년 승근은 유괴 후 지옥에서 살아돌아온 사람 대하듯 하는 어른들 앞에서 유달리 태연했다. 현장 검증할 때는 싱글싱글 웃기도 했다. “때리지도 않고 울리지도 않고 동생 같이 잘 대해 줬는데요 뭐. 오히려 정들었어요.” 유괴 자체가 용서 못할 범죄임은 분명한데 매석환의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다. 법원도 기가 막혔을까. 상당히 가벼운 1년 징역으로 일단 곽승근 유괴 사건은 마무리된다.


하지만 매석환은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했다. 1년 징역을 산 뒤 대학에도 적을 두었다는데 입대한 뒤 넉 달도 안돼 탈영하고 어머니 집에 숨어 지내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집 주인 딸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또 어두운 그림자가 그 안에서 스멀거리며 돋아난다. 원래 그림에 비상한 재주가 있던 사람이었다. 극장표를 감쪽같이 위조했던 이가 아닌가. 한때의 영화표 위조범과 얼치기 유괴범은 대담하게도 위조 화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집안 식구들에게 “공부하겠다.”고 선언한 뒤 물감과 고무도장, 동판 등 위조 지폐 제작에 필요한 물건들을 들여놓고 쑹덩쑹덩 위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00야 조금만 기다려라 오빠가 돈 벌어 올림픽 구경가자.”(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렇게 근 1년 동안 방안에서 위조지폐를 만든 그는 백 원짜리 지폐 82만 7천7백 원 (2500달러 상당)의 돈뭉치를 들고 달러상을 찾는다. 어지간히 꿈에 부풀었으리라. 열 달 동안 방에서 이것만 했는데 고생 끝에 낙이 올 거라고. 그런데 자신의 그림 실력을 믿었을진 몰라도 그의 위폐는 너무도 엉성했다. 달러상은 대번에 “이거 이상한데?”하고설랑 자신의 가정부를 시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도 매석환은 달러상이 속아 넘어갓다고 철석같이 믿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또 쇠고랑을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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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영병 신분이라 경찰은 매석환을 헌병대에 넘겼는데 매석환은 또 여기서 탈출에 성공하는 비범함을 선보인다. 엉성한 범인 위에 나사 풀린 군경.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가운데 현상금이 2만 원이 걸렸고 수천 병력이 못찾겠다 꾀꼬리 부르짖으며 서울 바닥을 헤맸다. 매석환은 연기처럼 사라진 듯 했다. 그런데 그는 또 체포된다. 그 체포 경위가 또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든다.


매석환은 발동기 기술자이기도 했는데 상도동 어느 공장 앞에서 발동기 소리를 듣고 공장을 기웃거리게 된다. 탈영병도 먹고는 살아야 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 기웃거리는 품을 도둑으로 오인한 공장장에게 붙들리게 된다. 소리를 들은 공장장의 동생 육군 중령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는데 분을 못이긴 이 탈영병, “왜 군인이 민간인을 쳐? 경찰서로 가자!”를 외친다.


그렇게 호기롭게 파출소로 향했는데 경찰 보기에 뭔가 이상한 청년이었다. 군인 내복을 입고 있고 머리도 아직 기르지 않았다. 어랍쇼? 더럭 의심이 난 소장이 더 찬찬히 뜯어보니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매석환과 닮았다. 소장은 매석환의 주소를 읊었다. 너 매석환이지? 예 제가 매석환이에요. 닐니리야.


그의 이름이 다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게 바로 <극비수사>의 배경인 정효주 유괴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형은 간암 투병 중이었고 그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 범행 의도였다. 하지만 역시 그는 소심한 유괴범이었다. 없는 돈에 옷도 사 주고 불고기도 먹이고 “네 아버지가 부도나서 내가 널 보호해야 한다.”는 거짓말로 철석같이 자신을 믿게 만들었다. 경찰에 체포된 뒤 효주가 “우리 아저씨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잡아가느냐.”며 거세게 항의할만큼.


매석환은 체포된 뒤 유괴범이 나올 때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자수를 호소하는 역할로 신문에 등장했다. 그는 출소 후 장기를 살려 카메라 수리점(그는 손재주가 비상했던 것 같다)을 차리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살아 있다면 근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 지금 그가 <극비수사>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지 궁금하다. 이 사람의 행적에 적절한 허구를 섞어 영화로 만든다면 그야말로 ‘나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악당’ 캐릭터의 코미디 영화 하나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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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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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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