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1.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
기다림의 전쟁
보름간의 현지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중대에 배치되었다.
미군이 연대나 대대 급으로 주둔하는 것에 비해서, 한국군은 중대단위로 작전지역을 나누어 공군력이 없는 베트콩이 접근할 수 없는 고지대에 3, 4 중 철조망을 치고 진지를 지어 주둔했다. 그 때까지 '뭉쳐야 산다' 는 고전적인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던 미군은 한국군이 이렇게 '흩어져야 산다'는 전술을 펴자 처음에는 위험한 전술지역에 소규모의 부대가 고립해서 주둔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 없다며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고립되어 벽을 쌓고 사는 것 같지만 명령이 내려지면 가까운 거리의 기지에서 나와서 작전과 매복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나타나자 나중에는 미군도 따라 해보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 이유가 다름이 아니고 편의시설과 오락시설까지 갖춰야 하는 미군들이 최소 생존 조건만 갖춘 한국군 같은 생활을 장기간 동안 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당시 미국과 한국의 생활 수준 차이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나라의 생활 수준은 마치 오늘날 이것저것 다 갖추고 사는 남한과 밥만 먹으면 되는 북한의 생활 수준 만큼 차이가 났기 때문에 한국군에게는 가능한 열악한 기지 생활이 미군에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내가 가본 미군 중대 단위 막사는 개인용 침실에 냉장고는 물론이고 당구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미군의 경우 월남전에서 3,0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의 실종자 수는 놀랍게도 달랑 6명이다. 이 숫자도 월북으로 간주된 2명 중 가족들의 기나긴 싸움 끝에 나중에 납북으로 판명된 안학수 하사까지 포함된 것이다. 안 하사도 붕타우에서 사이공으로 출장을 갔다가 납치가 되었다고 하니 부대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보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전방도 없고 후방도 없는 게릴라전이 펼쳐지는 곳에서 감히 외출이나 개인행동은 생각할 수도 없고 그 결과는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가끔 월남전을 다룬 소설에서 사병들이 외출도 자유롭게 즐기고 월남아가씨들과 로맨스를 벌이기도 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소수의 특수한 보직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참전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군과 달리 우리는 소규모의 방어적 전투를 주로 치뤘기 때문에 미군처럼 대규모 포로가 발생할 소지는 없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면서 '미군 실종자 수와 우리 실종자 수의 지나친 차이를 거론하는 것은 월남전의 특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 같다' 고 설명했지만 나는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미군에 비해서 한국군은 완벽하게 통제된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군의 철수로 전황이 급격히 변해 전혀 예상치 못하게 베트콩이 아닌 월남 정규군이 남침하여 극소수 피해를 입은 일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군 중대 단위 전술기지는 베트콩이 접근 할 수 없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박격포 공격을 당하는 경우는 하늘에서 번개 맞을 확률일 정도로 안전했었다.
1970년 Phouc Binh에 있던 미군 막사 내부, TV와 선풍기가 보인다
1970년 미군의 Tan Nhut Airbase. 크리스마스를 맞아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월남 생활은 거의 끝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작전지에 투입되려면 헬리콥터를 기다려야 했고, 매복을 하면 쥐 죽은 듯이 숨어서 베트콩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중대 기지와 가까운 거리는 도보로 수색 정찰을 할 수 있지만 조금 먼 거리로 이동하려면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헬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참전군인들 가운데는 1년간 월남에서 복무했지만 월남 마을이나 월남 사람을 본 일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에서 수송선을 타고 월남에 도착하여 하선 하자마자 트럭과 헬기를 타고 중대로 가서 기지 생활을 했던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0 만 파월 장병 중 절대 다수인 소총수들은 월남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 미군의 월남전 참전 영화를 볼 때가 있는데 한국군이 그 영화에 나오는 미군 병사들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면 아마 월남에 말뚝 박고 싶었을 사람도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을 말하자면 정찰, 수색 외에 대부분의 한국군의 생활은 한국에서와 똑같이 부대 밖으로 나가볼 수조차 없었다.
수색 정찰을 나가 베트콩을 발견하면 앞에 가는 첨병은 그대로 보내버리고 그 뒤에 오는 본대를 노렸다. 하지만 베트콩은 전술적인 승리보다 심리전, 선전전 차원에서 전투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첨병을 노렸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공격을 당하는 이는 맨 앞에 가는 첨병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첨병은 가장 경험이 많은 병사로 세우되 한 사람에게 3 개월 이상 시키지 않았다. 때문에 첨병생활을 끝내면 월남생활의 3분의 2는 무사히 넘겼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1971년 호지명 루트 케산(Khe Sanh) 작전 중 수색 정찰에 나섰던 해병대원의 사진
가장 괴로운 일은 매복 작전이었다.
매복은 적이 나타날만한 지점에 나가 며칠이고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이다. 3, 40 Kg의 무거운 군장을 짊어지고 매복 지점에 도착하면 우선 전방에 실 같은 구리줄로 된 인계철선과 45도 방향으로 크레모아를 설치한다. 인계철선에 조명탄을 매달아 무엇인가가 인계철선을 건드리면 저절로 조명탄이 터지게 된다. 조명탄이 터져서 전방이 대낮같이 밝아지면 격발기를 눌러서 크레모아를 터트리게 되어 있었다. 크레모아 안에 900 개의 구슬이 있어서 격발기를 누르면 구슬이 터지는데, 위력이 엄청나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하염없이 오지 않는 임을 기다리는 것이 매복의 기본이다.
매복에 나가 좌표지점에 자리를 잡으면 철수를 할 때까지 일체의 소리도 빛도 냄새도 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보다 훨씬 현지 실정에 민감한 베트콩에게 포착이 되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도리어 우리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남에서는 밤 말은 베트콩이 듣고 낮 말은 새가 듣는다는 말이 있었다. 수도원에 침묵 수도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철저할 수 있을까 싶다. 작전 중 소리를 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매복을 하다가 기다리던 적을 발견하면 타격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적에게 우리의 존재가 발각되면 우리가 당하는 것이 마치 숨바꼭질과도 같았다. 물론 병사 개인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적이 오지도 않고, 자신이 들키지도 않아서 무사히 부대로 돌아오는 일이다. 내 경우에는 다행히도 매복을 나갈 때 마다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정글 속에서 엎드려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엎드려 있으면 정글 속의 각종 곤충들이 친하게 지내자고 다가온다. 어찌하다 벌레가 전투복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이건 베트콩이 문제가 아니다. 작전지에서는 전투복을 마음대로 받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옷을 입은 채로 손을 넣어 잡아야 하는데 이게 마음대로 안 되니 참으로 사람 환장할 지경이었다.
오줌을 서서 누면 소리가 커서 무릎을 꿇고 누어야 하는 판에 함부로 부스럭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기다 비까지 오면 정말 곤란하다. 비가 많이 오면 그대로 물구덩이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발이 군화 속에서 퉁퉁 붓도록 서 있어야 한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비가 오면 웬만한 소리는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피부에 모기약을 바르면 모기를 물리칠 수 있지만 약 냄새가 날 수 있어 바를 수가 없었다. 모기를 피하기 위해서 밤만 되면 모포를 뒤집어 써야 하는데 월남 모기는 모포도 뚫는다.
밤에 교대로 잠을 자지 않고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데 이 때 코를 고는 전우가 있으면 정말 문제가 크다. 옆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마치 탱크가 굴러 오는 소리처럼 들려서 코를 골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해졌다. ‘드르렁’ 소리가 나기 전에 코를 틀어막아야지, 전방을 주시해야지, 그야말로 신경이 곤두서는 밤을 보내야 한다. 그것도 나보다 신참이 코를 골면 발로 한 번씩 차기라도 하지만 선임이 코를 골면 애인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장기간 버텨야 하기 때문에 식수를 목숨 보다 귀하게 여겨야 하지만 한 번은 예정보다 훨씬 빨리 철수 명령이 떨어져 너무 덥고, 온 몸이 끈적끈적하고, 소금기가 버석버석해서 군장도 줄일 겸 3개 수통의 물을 손수건에 적셔서 목욕을 했다. 그것은 내 생애 최고의 목욕이었다.
운 보다 센 빽
전쟁 막판이었기 때문에 전투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지루함과 무의미함 때문에 맥이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연대에서 사단으로 가는 보급 트럭 적재함에 올라탔다. 월남의 1번 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보급용 트럭을 타고 사단까지 4시간이나 걸리는 전출 길에서야 비로소 여유로운 눈으로 월남 땅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월남의 산악지대는 우리나라 산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은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고, 한마디로 징그럽게 나무와 넝쿨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러나 해안선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1번 도로변 전체는 해수욕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추수를 한 벼를 말리기 위해서 아스팔트 도로 위에 그대로 벼를 널어놓고 그 위로 차가 달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월남에서 근무하는 동안 가장 이상했던 모습은 우리가 베트콩과 전투를 하는 동안 동네 사람들, 특히 꼬마들이 밭둑에 엎드려서 교전하는 장면을 구경하거나 월남 사람들이 다리 밑에서 한가로이 낚시를 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하도 오래 하다 보니 그들에게는 전쟁이 하나의 생활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내가 사단으로 전출 명령이 나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단에 도착한 날 밤에 내 이름을 부르기에 밖으로 나가보니 이상하게도 사복을 입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복을 보자 순간적으로 혹시 '대학 때의 활동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스쳤다. 그 때까지 내가 군대에서 사복을 입은 사람을 본 것은 보안대원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사복 입은 남자는 부드러운 태도로 차에 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는 차를 보고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고급 세단이었기 때문이다. 월남에도 이런 차가 있나 싶을 정도로 매끈한 그 차는 알고 보니 사단장 공관의 차였다. 한국에서 주한 미군의 장성들이 승용차를 이용하듯이 월남에서도 한국 장성들은 승용차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옆에 트여 있는 지프차는 에어컨도 안 될 터이니 더운 열대 지방에서 귀하신 분들이 탈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단 직할 부대와 29 연대 포병 사령부까지 함께 모여 있는 사단 사령부는 거의 서울의 남산 정도의 크기였다.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 한참 가더니 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 건물은 사단장 숙소였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사단장 전속부관인 한 대위였다. 사복을 입은 한 대위의 첫 질문은 '박희도 대령과 어떤 사이냐?' 였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남들이 군대를 이미 다녀온 25살의 늦은 나이에 입대를 하자마자 기회만 있으면 월남으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정희의 사돈의 8촌이 되는 당시 미8군 연락장교단장으로 있던 박희도 대령에게 월남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었고 박 대령은 비교적 안전한 사이공에 있는 주월 사령부에 자리가 있나 알아볼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파리에서 미국, 월맹, 베트콩의 3자 평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어서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했는데 마침 월남 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때는 이 때다’ 하고 지원을 했던 것이다.
내가 떠난 후 정희가 박 대령에게 알렸고 박 대령은 자기가 육사 생도대장 시절의 제자였던 한 대위에게 나를 찾아보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자신도 월남전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했던 박 대령은 나중에 '경거망동 하지 말고 은인자중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라' 고 손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한 없이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박희도 대령은 하나회 출신으로 후에 1공수여단장으로 육군본부를 쳐들어간 12.12 반란 5적 중의 한 사람으로 나중에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이었다. 하여간에 그렇게 되어서 빽과 돈, 혹은 학벌이나 특별한 주특기가 없이 정글에서 싸우다가 죽은 5,000여명의 전우들 보기에 부끄럽게 나는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가 있어 덕분에 80 년대에 곱빼기로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사단에서는 낮에 행정을 보고 밤에 보초를 섰다.
사단 본부는 예하 부대와 29 연대 본부 포병 사령부까지 다 같이 한 울타리 안에 있어서 웬만한 도시만한 크기였다. 이러한 사단 전체의 경계에 50미터 마다 늘어선 초소 안에 들어가 보초를 섰다. 초소 앞에는 '이곳은 내가 살 곳이요, 죽을 곳이다' 라는 심각한 팻말이 전혀 심각하지 않게 세워져 있었다.
오후 6시부터 보초를 서는데 9시부터는 1시간씩만 서지만 첫 번째 보초는 9시까지 3시간을 서야 한다. 시간이 길어서 모두들 싫어했지만 나는 언제나 자원해서 첫 번째 보초를 섰다. 복잡한 내무반 대신 혼자 조용히 있고 싶기도 했지만 책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초를 서면서 책을 읽는 것은, 더욱이 적에게 아군의 위치가 알려질 수 있도록 초소에 불을 켜는 일은 걸리면 영창 깜인 일이었다. 초소의 위치가 실제로는 적이 접근 할 수 없는 곳이기는 하지만 군대 논리상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모를 두른 고무줄에 충전된 배터리를 달고 앞에는 큰 널빤지로 가려서 전방에서 빛이 보이지 않도록 하고 밤마다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보초를 서는 것이 아니라 저녁마다 3시간씩 독서를 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책이 없어서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 모를 무슨 '철학적 소고'인가 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전투 틈틈이 독서를 즐겼다던 체게바라가 문득 생각나서.
중대에 있을 때 매복과 정찰을 나갔었지만 직접 적과 마주쳐 전투에 참여해 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되었던 것은 베트콩이 아니라 사단에 와서 겪게 된 영어였다.
입대할 때 뭔가 좀 있어 보이려고 인사기록카드에 대학 때 VUNC(지금은 없어진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던 UN군 사령부 방송)에서 견습을 한 것을 근거로 'VUNC 아나운서'라고 과장 기록을 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은 유엔군사령부 방송국이었지만 대북 전문 방송이기 때문에 직원 전체가 한국 사람이었고 나는 남한의 대학생활을 소개하는 프로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 그 기록을 본 부관부 인사과장은 내가 유엔군 사령부에 근무했다고 생각해서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때까지 내 영어는 그 시절 모두가 그렇듯이 한 번도 실전에서 사용해보지 못한 교과서 영어였다.
미군 헬기 중대에 헬기 통역병으로 파견 나가 있는 병장이 2 주간 한국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해서 대신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당시 월남에서 한국군은 헬기가 없고 헬기 수송은 미군이 맡아서 했기 때문에 엠브런스에 해당하는 환자수송 헬기도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해야 했었다.
긴박한 전투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헬기로 수송을 해야 하는 일은 부상당한 병사뿐만 아니라 미군 조종사와 미군 의무요원들의 목숨까지 달린 극도로 위험한 임무였다. 휴가를 떠나는 병장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영어는 상황이 발생하면 어차피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요란한 헬기 소리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하는 것이니 너무 걱정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상황이 발생해서 혹시라도 통역을 잘못 할까봐 두려워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면서 하루 종일 분주히 뜨고 내리는 헬기 소리 속에서도 혹시나 출동하기 위해서 나를 부르지는 않나 하는 긴장 상태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있는 동안 한 번도 출동할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미군들 사이에서 지내려니 내 영어 때문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영어로 쓰여 있는 것을 보면 기억이 아니라 아예 머리 속에 인쇄가 되어버렸다.
이 글을 쓰려고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 더스토프라고 불렀던 호송헬기를 찾아보았더니 그런 말은 없고 메드백 (MEDVAC-Medical Evacuation)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당시 모두 더스토프라고 했는데..'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찾아보니 'Dust Off' 였고 먼지(Dust)가 땅(Ground)에 붙어(On)있다가 떨어지면(Off) ‘먼지가 날린다’ 는 뜻이었다. 즉 우리 식으로 하자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뛴다. 혹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뛴다’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젊어서 영어 때문에 고생하던 팔자가 늙어서도 변하지 않아 내가 제일 잘할 뿐만 아니라 남보다도 더 잘할 수 있는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지금도 이국에서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처음 본 바나나
한 때 대중들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허경영은 나에게 바나나와 같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사단 본부에 갇혀만 있다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군수 물자 수송 트럭의 경계병으로 차출 되어 트럭을 타고 부대 밖으로 나가 보게 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월남의 시골 풍경을 신기하게 관찰하면서 이동을 하는데 트럭이 어느 마을 근처에 섰다. 트럭들이 서자 동네 아낙들이 잡다한 물건들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트럭들 주위로 다가왔다.
그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그 때까지 별로 먹어 볼 기회가 없었던 바나나였다. 사실 40년 전 내가 군대에 가기 전 까지만 해도 바나나는 보통 사람들이 감히 먹을 수 없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과일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한국 생각을 하고 1불을 주고 아낙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바나나를 두 갠가 뜯었다. 그래도 그 아낙은 바구니를 쳐들고 더 가져가라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내가 바나나 한 다발을 집었는데도 그냥 서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옆에 있던 고참이 “야! 저 바구니에 있는 거 다 해도 1불이 안 돼.”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한국과 현지 물가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바나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간 망설였지만 아낙의 눈길 보는 순간 그 바구니를 통째로 트럭에 실었다. 물론 잔돈을 거슬러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잔돈을 거슬러 주고 싶어 하지 않고 바나나를 모두 팔고 싶어 하는 아낙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많은 바나나를 내가 다 먹을 수도 없고 보관을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바나나를 트럭에 타고 있던 전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부터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어느 군인의 사진
그 때 그 트럭에 허경영도 타고 있었다. 모두들 야자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갑자기 경영이가 배낭을 주 섬 주섬 뒤지더니 구겨진 양복을 꺼내서 군복을 벗고 갈아입기 시작했다. 경계 근무하러 나가는 놈이 배낭에 사복, 그것도 양복을 넣고 다니는 것은 기상천외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경우 다른 사람이면 영창 감이지만 평소에 워낙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는 경영이라 인솔 하사관도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더욱 웃기는 일은 주머니에서 스카치 테이프를 꺼내더니 귀를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경영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늘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미리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겠다고 철저하게 계획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야자수를 배경으로 마치 관광객처럼 유유하게 폼을 잡고 서서 가지고 온 사진기를 내밀고 다른 전우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 나는 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병이고 경영이는 선임 급에 속했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저래도 되나?'하고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는데 다른 병사들은 경영이의 특이한 행동에 이력이 났었는지 낄낄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몇몇 고참들이 야유를 하자 경영이는 "내가 니들에게 무슨 피해주나? 상관 하지 마라" 고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내 기억으로 허경영은 특별히 타인이나 단체를 생각하는 공익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될 수 있으면 자기에게 유리하게,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하는 타입이었다. 뭐 모두 미성숙한 20 대 초반이 일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영은 사단 법무참모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함께 근무하고 있던 김녹규(내 기억으로) 병장 -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왔다는- 과는 대조적으로 워낙 엉뚱한 행동과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저 웃기는 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경영과 다른 내무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내무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석식 후 초번 보초를 나가기 위한 집합 시간에 매일 만나야 했다. 집합 시간에 가끔 요즘 말로 개개서 주번사관한테 핀잔을 한 번씩 듣거나 간단한 기압을 받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런가하면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경영과는 전혀 반대 이미지로 남아 있는 인물이 있다.
당시 정훈자료로 많이 등장했던 김화복 병장이다. 김 병장은 군대에서 특과라고 할 수 있는 야전병원 원장(대령)의 당번병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계속해서 병원으로 후송되어 오는 병사들을 보고서 후방에서 편히 근무하는 것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꼈다. 병원장에게 자신을 전투부대로 보내달라고 하자 병원장은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김 병장이 계속 청원을 하자 병원장은 이 사건을 주월 사령관에게 보고하고 사령관은 이를 가상히 여겨 김 병장을 전투 부대로 보낸다. 사령관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김 병장은 사단에서 연대로 대대로 중대를 거쳐 말단 소총소대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입장이 난처해 것은 막상 김 병장을 맡은 중대장이었다. 만약에 주월 한국군 전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김 병장, 정훈자료로 쓰이고 있는 김 병장이 죽거나 다치면 자신이 골치 아파지는 것이다. 공연히 이상한 놈 하나가 자기 부대에 떨어져 관심이 집중되니 엄청 부담이 생긴 것이다. 혹시 김 병장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다른 사병과는 전혀 다르게 추궁이 심할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김 병장이 살아야 정훈 효과가 있는 법이고 만약에 죽는다고 해도 시시하게 죽으면 안 되고 장렬 하게 전사를 해야만 그럴듯하게 정훈 자료가 될 것이 아닌가?
김 병장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중대장은 "저 새끼 취사반에 쳐 넣어!"하고서 전투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이렇게 되자 김 병장은 자기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막상 전투현장에 와서 총 한 번 만져 보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파서 전투에 못나가게 된 소대원 대신에 출전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는 김 병장이 나가는 전투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무적의 불사신이 되었다나 말았다나 하는 개 같은 스토리다.
김화복 병장의 사진을 짤로 소환하기 위해 검찰이 카카오톡 들여다보듯 구글과 네이년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신입 기레기의 하찮은 능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김화복 병장에 대해 아시거나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은 딴지 메일로 제보 또는 본 글에 덧글을 달아주시어 신입의 무능력함을 거침없이 나무라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참고로 보내주신 자료 중 '서울중앙교회 김화복'은 아니니 유효로 치지 않겠습니다. 편집자 드림.
나에게 허경영과 김화복은 전쟁터의 코미디와 허구적인 선전의 상징이었다.
허경영은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피에로였고 순진무구한 김화복 병장은 군대라는 조직이 만든 피에로이었다. 그런데 허경영과의 인연은 월남전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담당 작가실에서 보낸 쪽지를 받았다. 허경영의 정체를 폭로하는 1차분을 방영하고 2차를 준비하기 위하여 자료 수집을 하던 차에 온라인 서핑을 하다가 내 블로그에 있는 허경영 관련 내용을 읽고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SBS 측과 이메일과 통화를 주고 받았는데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호주로 올 수도 있단다. 허경영에 대하여 별스런 정보도 없는 나로서는 그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라 사양을 했더니 일단 자료를 보고 판단을 해달라고 했다.
다음은 SBS 측에서 보내온 ‘그것이 알고 싶다’ 1회 방영분의 대본이었다.
P D : 본인이 고 박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이었다는 부분을 강조하다가 월남 얘기를 꺼냈었는데요,
허경영 : 내 군대생활 기록부 봤습니까? 군대생활 기록부 보세요. 청와대로 돼 있어요.
P D : 월남전 가셨다고.
허경영 : 그러니까 청와대에서. 월남에는 심부름 갔지.
대통령이 보내서 간 거고 월남 휴전 때, 월남에 있는 금괴.. 금괴를 월남의 대통령이
박대통령한테 아 이걸 좀 한국으로 옮겨 달라, 인천으로.
근데 그걸 LST로 가져가서 청룡부대 가서 그 금괴를 싣고 오라는데
대통령이 거기 응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일단 내가 월남에 갔죠.
가서 전반적인 걸 봤는데, 사태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노, 그래서 그 사람하고 그냥 헬리콥터로 도망갔죠. 그러고 말았는데.
이상이었다. 세상에나? 저나 나나 무슨 고급 장교도 아니고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징집된 일개 사병에 불과한 처지에 도저히 만화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데 제 멋대로 지어내다니?
빽이 좋았던지 운이 좋았던지 편한 곳에서 근무한 덕분에 5천여 명이 전사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으면 감사하게 여기고 살아야지 월남전을 소재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멋대로 지어내는 것은 파병 전우들을 모독하는 행위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허경영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지 내가 알 바가 아니지만 그는 분명히 1973년 2월 4일 미군 수송용 민간 항공기를 타고 나와 함께 귀국했는데 헬리콥터는 무슨 공중에 날아가다 추락할 소리는 하고 있는지...
전우들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전쟁 상황을 자신의 인기몰이를 위해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전체 국민을 속이는 일은 도저히 묵과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한국에 파월 전우회, 걸핏하면 가스통 들고 나오는 고엽제 피해자 단체 등이 있던데 허경영이 혀를 교묘하게 경영을 해서 월남전을 팔아먹는데 왜 가만히 있는지 모르겠다.
허경영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이 없었던 나는 분노의 오르가슴이 느껴져서 즉시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물론 제작비는 받고) 이제 문제는 어떻게 빨리 찍어서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10 년 전에 한국서 온 KBS PD들과 ‘추적 60분’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시드니에서 현지 제작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시드니에서 제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해서 30도의 찜통더위 속에서 에어컨도 없는 내 서재에서 뒷마당의 시끄러운 새소리 때문에 (우리집 큰 나무에 피어 있는 꽃 때문에 온 동네 새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인다) 창문을 닫고서 뜨거운 조명을 켜 놓고 촬영 기사, 오디오 기사와 땀을 뻘뻘 흘리며 1 시간 이상 작업을 해서 10 분짜리 필름을 만들어 보냈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 싶다’ 2 차분에서 정작 내가 녹화해서 보낸 부분은 방영이 되지 않았다. 약한 사람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허경영의 파렴치성을 폭로하는 기획의도에 비해 너무 무거워서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80년대 후반에 을지로의 인쇄 골목에 있는 국도극장 앞에서 우연히 그를 만나 차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서로 뭐하냐고 근황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는 개인사업 한다고 했고 나는 빈민 운동을 한다고 했다.
내가 왜 그때 일을 지금도 기억 하는가 하면 그의 반응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상황은 흔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내 이야기를 들으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좋은 일 하고 있다고 긍정을 하든지 아니면 위험하게 왜 그런 일을 왜 하느냐는 반응이 그것이다. 그런데 허경영은 마치 아이처럼 신기하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나서 끝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런 반응은 흔히 경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는 난생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를 듣고서 무엇인가 표현을 해야 하는 입장인데도 마치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 밖의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는 무능력한 사람이 지나치게 성취욕구가 강해서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며 허구의 세계를 꾸며내고 계속 거짓말을 반복하다 마침내 그것이 정말로 실제 자신이라고 믿어버리게 되는 정신질환을 말한다. 허경영은 바로 그런 증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실패한 탈출 계획
당시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왜냐하면 파월 장병들은 군대 생활을 할 만큼 하기도 했지만 봉급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무조건 진급을 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나는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왔다.
필자가 월남에서 유일하게 찍힌 사진.
군수물자 호송 차량을 타고 한 명은 앞을 보고 한 명은 뒤를 보면서
마을을 통과할 때 바싹 가물어 있던 당시 필자의 모습
다음에 계속...
sydney
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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