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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07.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1965920일, 역사상 최초로 첫 전투부대인 해병대가 월남에 파견되는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환송사를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연설문을 놓쳐 원고가 연단 아래로 날아갔다. 주변의 별들은 바람에 굴러 다니는 연설문을 잡기 위해서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박 대통령은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결단식을 마친 병사들이 막사로 돌아와 보니 갑자기 막사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방금 낭독 했던 '자유의 십자군'이니, '평화의 사도'니 하는 미사여구가 무색하게 보안상의 이유로 창문을 모두 합판으로 가려버렸고 출입구를 모두 막았기 때문이었다. 막사 밖에서는 대통령이 인근에서 동원한 여고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금년은 1964년 시작된 국군의 월남참전이 50주년 되는 해이다. 나의 월남전 이야기는 대양의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 바가지 물에서도 바닷물의 기본적인 속성은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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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월남전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이 전쟁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어야할 만한 목표가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5,099명이 희생 되었다.


1970년대 미국은 CBS에서 방영한 한 편의 월남전 다큐멘터리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존 로렌스라는 기자가 월남의 한 중대에 들어가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을 위한 부대이동을 앞두고 상부에서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산길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타고 나갔다. 부대원들은 베트콩에게 훨씬 익숙한 지형인 산길을 택하는 것은 아군이 공격 당할 가능성이 많아서 자살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비록 명령위반으로 감옥엘 가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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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월남전 당시, 정글에서는 절대로 남이 갔던 길은 가지 않고 새로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적이 어디에다 매설물을 설치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찰리 중대>에서 공공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미군의 행태가 보도되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전쟁의 현실은 그런 것이다.


사람을 죽일 때는 상대가 멀수록, 보이지 않을수록 쉽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공군, 해군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적다고 한다. 일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판정을 받으면 치료가 필요한데, 아예 후방으로 빼버리면 다시는 복귀를 못하기 때문에 통상 3일 후에는 원대복귀를 시킨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월남전이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이어서 적과 대면할 기회가 적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8년 동안 한국군이 사살한 적군의 숫자는 4만 명이다. 그렇다면 4만 명을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의 심리 상태는 어떠했을까?


월남전에서 십자성 부대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 전우들을 방문하는 것이 내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부상병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자기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전우는 거의 없었다간혹 자기가 베트콩을 사살했을 것이라고 믿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군인이 팔자일 것 같은' 전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짜로 자기가 쏜 총에 적이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이 인간이다.


먼저 밝힐 것은, 나는 전장에서 적과 조우하는 직접적인 전투는 해보지 못했지만 적이 나타날 가능성에 대비하는 매복과 정찰의 경험은 있다. 즉 전투 준비의 심리적 경험은 있되 직접 전투의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전투 준비의 심리와 직접 전투의 심리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또는 그것이 계량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막상 적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면, 그때 나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용기가 더 생길까, 불안이 더 앞설까' 하는 것이다. 만일에 모든 병사가 전투를 앞두고 공포심에 사로잡힌다면 전쟁은 수행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구분 되어야 할 것은 전투에서 타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병사들과 자의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큰 지휘관의 심리 차이다. 전투를 앞두고 느끼는 지휘관의 부담감과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타의적으로 움직이는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더 클 것이고 전투의 결과에 따라서 자신의 앞날이 달려 있는 지휘관은 보다 계산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냉철한 지휘관을 만나도 정작 죽어 나가는 것은 병사들이다.


미국은 월남에서 1700억 달러의 전비를 소모했고 전쟁이 끝난 뒤로도 월남전 참전 군인을 위해 2천억 달러를 더 지불했다. 198211월 헌정된 월남전 참전 기념관은 280만의 생존 귀환자들에게 통곡의 벽이었다. 그중 80만의 귀환 군인이 전후 정신질환과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고, 1970년대 초만 해도 수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퇴역군인 중 약 6만 명이 자살했다. 이 숫자는 실제로 전쟁기간에 죽었던 군인들의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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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는 지금까지 월남전에 참전했던 전우들 가운데 TRAUMA(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 편집부 주)에 시달린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더 독종이어서 그런가? 아니다. 한국인은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서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는 것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 분명치 않게 애매하게 겪는 일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겪는 일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른 법이다. 한국군의 경우 대게 '외국에 대한 막연한 선망', '돈을 벌어야겠다' 등등의 이유로 지원을 했었다. 그러므로 월남전을 바라보는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는 시선이 객관적인 자세를 갖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은 아닐까? 한국 군인과 비슷하게, 2차 대전을 치룬 일본 군인들이 TRAUMA에 시달리는 비율이 낮은 것은 스스로를 윤리적인 책임의 주체로 설정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주장을 접한 기억도 있다. 한마디로 전체주의에 빠진 윤리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TRAUMA라는 측면에서 월남전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면 미국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개인적으로 겪고 있고, 월남은 그것을 민족적으로, 집단적으로 겪고 있다. 때린 놈은 개인적인 TRAUMA를 느끼지만 맞은 놈은 집단적인 TRAUMA를 느낀다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개인적으로 내상을 입히기도 하지만 민족이나 국가도 집단으로 내상을 입는다.


치렀던 전쟁의 성격, 정도에 따라 후유증도 다르게 나타난다. 월남전은 형식상 내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외세와의 싸움이었고 한국전은 유엔 16개국이 참전하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기본적인 성격이 내전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외세와의 싸움이 아닌, 우리끼리 싸우다 지친 한국은 서로 간에 의심만 늘었다.



군용열차를 세운 여자.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일 수 있다. 왕따든 자따든 소외의 결과는 타인과 다른 자기만의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되거나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일베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월남전에 참여했을 당시의 내 처지도 그러했다.


1971년 한 해 미국의 대학에서 4,800회의 반전 데모가 벌어졌고 체포 7,400, 3분의 2가 경찰이었던 부상자 462, 방화 247, 사망이 8명이나 되었고 도서관이나 연구소에도 방화가 발생했었다. 닉슨 대통령이 한 베트남 참전 장교의 부인에게 베트남에 있는 병사들은 훌륭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일부 건달패(Bums)들이 소동을 부리고 있다고 언급한 말이 보도되어 학생들의 반전 데모를 더욱 점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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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파견하였고 발포명령이 떨어져 대학생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잇달아 전국적으로 데모가 번져 450개에 달하는 대학이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에서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주도하여 미국의 전의를 감소시키고 있을 때에 남베트남 대학생들은 격렬한 반정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매달 수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남베트남의 대학생들은 징집이 연기되어 상아탑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젊은이로서 가장 큰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도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들의 생각은 존망의 기로에 서있는 나라의 대학생들이 이대로 학업만을 계속해서는 안 되고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독재정부를 타도하여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은 외신을 통제해서 한국군이 파병되어 있는 월남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는 일체 보도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


6, 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탈출해보려고 몸부림쳤었다.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로 집단 이민을 떠나 가족 단위로 길을 찾았고 개인별로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로, 노동자들은 중동건설 현장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었다


월남 참전 초창기 또한 마찬가지여서 참전군인들 가운데는 부산 제 3부두에서 태극기 물결 속에 배에 오를 때 속으로는 가족을 위한 희생양(scapegoat)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고기값이라도 해보자.’ 즉 죽으면 보상금이라도 타서 부모님에게 효도하자는 자조적 농담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최소한 누구나 내가 무사히 돌아가면 우리 집에 황소 한 마리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파월 되었던 1972년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그때는 월맹 정규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펼쳐서 한국군 사상자가 많이 나온 시기였던 만큼 진급을 위한 경력 관리를 하려고 하는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는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부대에서는 부대별로 할당이 떨어져도 지원병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차출을 하는데 보통 평소에 부대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병사를 보냈다. 그래서 월남차출이 떨어지면 부대장에게 '앞으로 부대 생활 착실하게 할 터이니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하는 희극도 벌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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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당사자에게는 바로 전날 통보를 해서 정신 없이 보내버리기도 했다. 실제로 대대에서 PX병으로 근무하던 대학 동창은 월남차출이 되어서 내일 떠난다며 연대본부에 있던 나에게 인사과에 돈을 써서라도 자기를 빼달라고 울면서 전화를 했었다. 일개 사병인 내 입장에서 더욱이 출발 전날 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 인마 월남 간다고 다 죽냐? 걱정 하지 말고 가. 나도 곧 뒤 따라 갈게라고 했다. 실제로 당시의 나의 삶은 너무 단조롭다 못해서 권태롭기도 했고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


사실 나는 훈련소에 입대를 하자마자 기회만 있으면 월남으로 가려고 했던 참이었다. 그러나 나는 연대장이 필요해서 특별히 데려다 놓은 필수 요원이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연대장이 사흘간 서울로 휴가를 간 기회에 월남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때는 이 때다하고 지원을 했다. 내가 지원을 하자 사병계는 이상하게 생각해서 인사과장에게 보고를 했고 인사과장은 부연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너무도 선명하다. 인사과장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연대장실로 데리고 가서 부연대장에게 "이 녀석이 연대장님이 월남 간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부연대장은 그렇다면 허락하셨겠지. ?” 라고 하며 눈을 껌벅이던 모습이.


아마도 내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좋은 부연대장은 나중에 연대장에게 혼 좀 났을 거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대였다면 그런 거짓말이 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 후에 연대장이 돌아와서 내가 없어진 것을 알더라도 연대장의 힘으로는 이미 사단 밖을 벗어나 있는 나를 도로 불러 올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저지른 행동이었다. 항상 아는 놈이 범죄도 저지르는 법이다.


오음리 제 7 보충단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월남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흰 색깔로 선명하게 백마가 그려진 부대마크가 달린 얇은 흑록색 정글복을 갈아입고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해지고 막연하기만 했던 월남이란 나라가 비로소 조금씩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 우리를 태운 트럭들은 끝없이 노란 흙먼지를 피우며 구비 구비 꼬부라진 배후령 고개(일명 빼찌 고개)를 넘어서 춘천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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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역에는 푸르죽죽하고 시커먼 군용열차가 색종이를 칭칭 감고 큼직한 태극기와 함께 머리와 꼬리에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걸린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그런 군용열차의 모습이 내게는 꼭 거대한 영구차 같아 보였다.


춘천역 광장에는 3군단 군악대가 쿵작거렸고, 평소에 사병들을 보면 승냥이처럼 '뜯어 먹을 것 없나'하고 눈을 부라리던 헌병 녀석들도 그날만큼은 모처럼 상냥한 눈빛-사실은 불쌍하게 보는 눈빛이었겠지만-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광경들이 정작 나에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오직 나의 관심은 '과연 마지막으로 정희를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훈련생 신분인 나로서는 막연히 오늘 출발하는 것만 알았지 부대가 몇 시에 출발할지 정희에게 정확하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 정확하지도 않은 시간에 맞추어서 서울의 북쪽 끝인 구파발에서 춘천까지 오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맞은 편에서 경춘선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이 당시 경춘선은 단선이었기 때문에 반대편의 기차가 와야 출발 할 수가 있었다) 간단한 환송식을 마친 군용열차가 드디어 출발할 시각이 왔다.


맞은 편 철로에 방금 서울에서 도착한 경춘선 열차에서 승객이 쏟아져 내리는 사이로 이쪽을 향하여 정신 없이 달려오는 하늘색 투피스를 입은 정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정희를 알아 볼 수 있었지만 정희는 똑같은 제복을 입고 창가에 매달려 있는 수백 명의 병사들 가운데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통로에 서 있는 녀석들을 제치고 승강구로 달려가서 정희를 향하여 여기야! 여기!”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희가 혼란스런 상황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승강구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승강구 마다 헌병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승강구를 내려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 군용열차가 그 거대한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저 서로 황망한 시선으로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우리의 상황을 보고 감을 잡은 다른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태워! 태워!”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정희의 손을 붙잡아 승강구로 끌어 올렸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놀란 헌병이 제지를 하려고 열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러자 승강구에 있던 파월 병사들이 "어딜 올라와? 개새끼들아!" 하며 발로 걷어차버린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순식간에 주변의 헌병들이 달려오자 내가 서 있는 승강구로 몰려든 병사들과 기차에 올라 타려는 헌병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평소 같으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헌병 앞에 주눅이 잔뜩 들 수밖에 병사들이었지만 그때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 죽으러 가는 마당에 더 이상 헌병이 무서울 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주변에서 높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판이라 헌병들은 평소처럼 거칠게 할 수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병사들은 개판을 쳐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상황은 헌병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군용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헌병들은 닭 쫒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베트콩보다 헌병을 먼저 물리친 전공(?)을 세운 병사들은 기세등등해졌다. 우리가 객실에 들어서자 병사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 거기 자리 비켜줘!”, “모포로 가려 줘!”하고 술과 과자를 가져다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평소에는 지나가던 여자들만 보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박한 군바리 기질은 순식간에 어디로 가버리고 그 순간에는 모두 중세 기사가 된 것 같았다. 어떤 병사들은 먹을 것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면서 부산까지 가야 돼. 절대로 내리면 안 돼!' 하고 후까시를 잡기도 했다. 훈련을 끝내고 전장으로 가는 마당에 뭐 시비 걸 게 없나? ‘했던 병사들의 심리상태에서는 재미있는 판이 벌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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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사자인 우리 둘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나 기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빠져서 말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일은 이미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제대 전체의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병력을 부산까지 수송하는 책임을 맡은 호송 장교 대위가 나타났다. 물론 그는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 군용열차를 관리하는 수송부대 장교였다. 대위는 우리들에게 명령이 아닌 통사정을 했다.


나도 여러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규정상 군용열차에 민간인이 탈 수가 없다. 그리고 용산에 도착하면 육군본부에서 고위 장성들이 나와 환송식을 하는데 이대로 타고 가면 나는 영창에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수송 장교 대위가 통사정을 해도 병사들은 한 마디로 '좆까지 마라! 영창을 가면 네 놈이 가지 내가 가냐?’는 식이었다. 이제는 다른 열차 칸에서 심심한데 재미있는 일 생겼다고 관광(?)을 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탄 군용열차에 젊은 처녀가 한 명 타고 있다는 것만 해도 관심거리일 터인데 전쟁터로 가는 군용열차이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그 시간만큼은 정희는 전체 병사들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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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참 있다가 스피커에서 점잖은 목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장병 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같이 월남으로 가는 제대장 김OO 중령이다. 여러분과 나는 한 마음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냐? 우리는 군인 아닌가? 보안대가 모두 보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월남으로 간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보안대는 월남에도 있다. 여러분을 월남까지 인솔하는 것은 본관의 책임이다. 여러분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제 열차가 역이 아닌 곳에서 설 것이다. 그 때 전우의 애인이 내릴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한다.”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파병되는 장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중령이 공갈 반 호소 반으로 하는 소리였다. 같은 말도 시어머니가 하는 말 다르고 친정어머니가 하는 말 다른 법이다. 김 중령의 합리적이고 간절한 부탁이 있은 다음 분위기가 갑자기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방송이 끝나고 잠시 후 기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더니 드디어 섰다. 호송장교 김 대위가 다시 우리 칸으로 와서 정희 보고 내려 달라고 했다. 다른 병사들이 그런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 역도 아닌데 여자를 혼자 내려놓는다는 말이냐?”고 시비를 걸었다. 호송장교는 군용열차는 운행 계획에 없는 역에 세울 수가 없다. 양해해 달라.”고 설명을 하고 정희에게 논두렁으로 조금만 가면 경춘 국도가 나오니 안심하고 내리라고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열차가 선 곳이 마침 오른 쪽으로 굽어진 곳이라서 정희가 내리는 모습을 모든 열차 칸에서 볼 수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창문마다 승강구 마다 매달려서 정희에게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영자야! 말자야! 순자야!” 제멋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제 애인에게 작별이라도 하는 듯이 잘 가라! 잘 있어라!”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어떤 놈은 고무신 거꾸로 신지 마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나 당황한 정희는 뒤도 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논두렁을 따라서 걸어가고 기차는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서울이 가까워지자 열차 안은 점점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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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ㅈㅎ


군용열차가 서빙고역에 멈추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었다. 샛노란 전등이 환히 켜진 플랫폼에는 춘천역의 3군단 군악대보다 훨씬 세련된 육본 군악대가 뿡빵거렸고 허우대 좋은 육군본부 의장대와 옷깃에 별들이 반짝이는 고위 장성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파월 장병 가족들이나 민간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헌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공식 환송행사가 서빙고역에서 잠시 벌어졌다. 이미 파월 장병을 30만 명이나 보냈기 때문에 별 새로운 것도 있을 수가 없는 닳을 대로 닳아빠진 완전히 기계적인 환송행사였다.


행사가 끝나고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한 차례의 기적이 울릴 때였다. 갑자기 아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다시 벌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삼엄한 헌병들의 경비를 뚫고 들어왔는지 어디선가 뚱뚱한 처녀 아이 하나가 갑자기 철로로 뛰어들더니 사색이 되어 오빠! 오빠!” 하고 울부짖으면서 열차 창문에서 제 오빠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애는 열차 창문마다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 사이에서 제 오빠를 찾을 수가 없으니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두 시간 전의 춘천역에서 정희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그런데 헌병들이 미처 그 여자애에게 다가가기 전에 기차에서 한 병사가 총알같이 뛰어내렸다. 필경 그 놈은 나보다도 훨씬 절박한 놈이었던 모양이었다. 두 남매가 철석같이 달라붙은 채 철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 무슨 절절한 사연이 있는지 두 남매가 처절하게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매는 오빠가 군에 오기 얼마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고아가 된 처지였다는 것이었다. 그 광경은 아무리 목석 같은 인간이라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열차에 탄 파월장병의 눈에는 모두 이슬이 맺히고 마음 여린 병사는 새로 입은 정글복 소매로 연실 눈물을 닦아냈다. 환송행사에 나왔던 높은 장교들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하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높은 사람들은 말은 못하고 헌병들에게 손으로 빨리 떼어 놓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차 안의 1,000여 명 장병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두 남매를 떼어 놓아야 하는 헌병들의 입장은 아주 난처했다결국 친절한 유치원 선생처럼 태도를 바꾼 헌병 장교의 간곡한 설득 탓에 드디어 남매는 떨어지고 오빠는 헌병들에게 마지못해 등을 떠밀려 승강구에 올랐다. 그런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는 듯 기차도 느릿느릿 출발하기 시작했다. 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여동생이 철로의 자갈 위에 주저앉아서 발을 구르며 넋을 놓고 우는데 내 생애에 그렇게 절망적으로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오빠! 오빠!” 부르며 울부짖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하나 둘 눈물을 짓기 시작하더니 금방 돌림병이 번지듯이 열차 안은 너나 할 것 없이 오열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울다가 코가 메여 코를 풀어대는 놈,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다가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상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욕지거리를 해대는 놈, 있는 대로 소주건 맹물이건 닥치는 대로 들이키는 놈 등등 열차 안은 통제 불능의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그 때 어느 열차 칸에선가 군가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훈련기간에 이가 갈리도록 불러서 듣기도 싫던 군가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갈수록 격렬해졌다.


마치 군가소리가 작으면 누가 때려죽인다고나 한 것처럼 모든 병사들은 모두들 악을 쓰는 듯 군가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1,000여 명의 병사들이 두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 것이나 두드리면서 바락바락 악을 써대면서 아는 군가라는 군가는 모조리 메들리로 불러 제켰다. 마치 악을 쓰며 군가를 부름으로써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오는 허전함을 물리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우리를 태운 군용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점점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는 동안 악을 쓰며 군가를 부르던 병사들은 더 이상 목이 쉬어 군가를 부르지도 못하고 하나씩 지쳐서 잠에 떨어졌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이른 새벽 부산항의 제3부두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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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간략하고 형식적인 환송식이 벌어졌다. 부산에 있는 여고생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파월장병의 환송식에 순번제로 동원되어서 나눠가진 태극기 몇 번 흔들다 가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다. 드디어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 가고 육지가 점점 작아졌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는 나라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시원했지만 드디어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살아서 돌아 올 수 있을까?


미군 수송선의 선실은 마치 영화 <빠비용>에 나오는 죄수 호송선 같았다. 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 시렁 위에 누운 것처럼 병사들은 3층짜리 철제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 코를 찌르는 바다냄새, 병사들의 땀 냄새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기에 불평스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수송선에서의 하루는 눈을 뜨자마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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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sydney


편집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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