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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우석

주연: 차승원, 김인권, 유준상, 남지현, 신동미, 공형진, 남경읍, 태인호, 김종수, 성지루
음악: 조영욱, 홍대성, 조혜원, 윤소라 (조영욱과 The Soundtrackings)
촬영: 최상호
전체 관람가 / Color / 129분




 



* 스포일러 시럽 다량 빰삥해 놓았습니다.


최근 내 머리 속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미지로 남게 되리라고 생각한 순간을 마주했다. 그건 바로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보러 갔을 때의 극장풍경이었다. 표를 끊고 작품의 상영관 안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이런 세상에! 작품의 상영이 시작됐다. 누군가가 오지 않을까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도 아무도 없었다. 상영시간이 15분 넘게 지났다... 아무도 없었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그제야 생각했다. 아. 이제 아무도 오지 않겠구나.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에서 인자는 못 오시겠지 하며 아내에게 묻는 황정민의 연기가 어떤 느낌이었을지, 이제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았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극장에 관객이 자기 혼자뿐일 때가 있다. 가끔 뭐, 영화 커뮤니티나 SNS에 이걸 가지고 되게 놀라운 일을 경험한 것처럼 글을 남기는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내겐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인기 없어 보이는 작품 보러 극장 가면 항상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열몇 번 겪었고 일찍 죽지 않는 한은 앞으로도 겪을 일이겠지.


그런데 그 상황이 '강우석 감독의 작품'에서 벌어졌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필모그래피 전체를 훑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내가 극장에 갈 때마다 강우석 감독의 작품에 관객이 들지 않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상영관 안에 자리가 다 차거나 최소 절반 이상은 관객들이 앉아 있었다. 심지어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보러 간 시점은 작품이 첫 개봉을 하고 나서 이틀 뒤인 '불금'이었다. 그런데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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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와 <글러브>, <전설의 주먹>. 2010년대의 강우석 감독의 작품들은 꽤나 신선했다. 시골 마을의 정을 다루지 않고 어두운 폐쇄성을 다루는 이야기.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들로 구성된 야구부가 경기에서 지는 이야기. 청년도 아닌 중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종격투기 이야기. 이런 소재들이 절대로 관객들에게 고루 환영받을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반기지 않을 듯한 소재들을 비교적 긴 상영시간으로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흥미롭게 보게끔 만든 점. 이는 관객을 불러들이는 감독의 감각이 여전히 예민하게 발동되고 있음을 증명과도 같았다. 한국에서 80년대에 데뷔한 감독이 지금도 그런 촉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의 신작인 <고산자, 대동여지도> 역시 박범신 작가의 소설 <고산자>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도를 만드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지도 제작과 수정만 가지고 어떻게 한 편의 영화를 만들지? 작품은 관객의 그런 의문을 에피타이저 삼아 본편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작품은 지도에 관한 어떤 대의를 드러내기 전에 소소한 일화들로 흥미를 유발한다. 지대의 높낮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직선거리로만 만들어진 당대의 지도들 때문에, 당시 민초들이 몇 켤레의 짚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지적되는 순간들이 그렇다. 제대로 지도를 만들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당대의 서민들이 여행을 떠날 때 갖고 가야 할 짚신의 수를 제대로 예측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라니. 어찌 보면 사소해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무척 실용적인 목표다. 그리고 이런 요소가 더 흥미를 자극한다.


지도를 만들고자 하는 김정호는 그 목표 때문에 사방천지에 빚을 진다. 도대체 왜 빚까지 져 가면서 저 짓을 하나? 작품은 15분에 가까운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이런 작은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큰 이야기로 거듭날 것임을, 암시한다. 도입부의 황매산 어가행렬을 통해 흥선대원군의 권력을 암시하고, 그 어가행렬을 뒤따라 가는 김정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는 옆에서 권력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받아보겠다는 게 아니라 오직 제대로 된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따라다니는 것뿐이다. 이 와중에 잡아낸 아름다운 자연풍광들은 덤이다. 작품 속 자연풍광은 곧 김정호의 발길을 따라 곧 주된 요소로 등장하며, 거리 측정이라는 기본적이고도 소박한 목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카메라에 담았다는 백두산 천지의 웅장한 풍광으로 마무리된다.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오프닝 시퀀스는 곧 작품 전체 이야기 전개방식의 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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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김정호를 연기한 차승원이 천지에 올라서서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합장하는 순간에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오프닝 시퀀스로서 하일라이트를 향해 갈 때의 편집의 리듬감이나, '작품 속' 김정호가 지도에 관심을 갖게 된 과거 등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다가, 마침내 백두산 천지에 오른 순간에서 김정호를 연기하는 차승원의 연기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


생각보다, 작품의 주된 홍보방향이었던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오프닝 이후로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자연풍경보다도 인물들 간의 대화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카메라의 움직임을 자제한 채 빠른 쇼트 편집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치가와 곤 감독의 1976년 작인 <이누가미 가의 일족>의 대화 시퀀스를 보는 듯한 박진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것은 작품의 방점이 포스터나 예고편에서 공개된 풍경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드라마에 찍혀 있음을 말한다. 드라마에 자신감을 품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지. 그래서 작품 자체의 제목도 어쩌면 맥거핀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 놓은 시점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중반을 지나며 주제가 지도에서 잠시 천주교로 전환될 때 뜬금없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물론 이런 부분들이 내게 있어 작품의 드라마가 흥미롭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생각보다 굉장히 비극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냐면, 내게는 작품이 '조선에서 살아가는 덕후'들에 관한 아주 섬뜩한 현실반영물처럼 보였다. 지도를 만드는 김정호를 대표 삼아 조선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를 이해하고 돕는 조력자이자 또 한 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바우(김인권이 연기한다)도 해당된다.


바우는 먹고 살기 위해서 목공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조각을 하는 예술가, 혹은 조각 덕후다. 중반 이후부터 부각되는 천주교 신자들도 어떻게 보면 '예수에 대한 덕후들' 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은 이들을 통해 (헬)조선에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살려면 그에 대한 대가, 그것도 아주 큰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현실을 그리고자 한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이야기를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종교에서 보이는 덕후의 마음은 해당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면 전체적으로 설득력을 얻기 힘든 편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종교를 믿지는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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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가슴이 뛰는 '민초'들'을 다루려 한다. 그러니 무언가에 미쳐 있는 사람의 초상을 다룰 때 좀 더 폭넓게 설득력을 얻고자 한다면, 적당한 교통수단이 없었던 조선시대인데도 전국팔도를 홀로 발품 팔아 다니는 사람, 아무런 측량도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전체를 지도에 담으려는 사람이 대표로 삼기 더 적당해 보였을 것이다.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대동여지도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지 않은데도, 왜 김정호를 전면에 내세우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는 민초들의 대표자다.


반면 작품 속에서 국가의 위정자들은 이런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용해 자신의 실리를 취하려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익에 침해를 가할 여지가 보이면, 그들은 가차 없이 칼춤을 춘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국가에게 보호받기는커녕, 오히려 국가의 칼춤에 상처받고 죽어가는 덕후들의 초상을 가차없이 보여준다. 참고로 강우석 감독은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할 때마다 아이디어를 신문기사를 통해 얻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작품과 현재 사회를 연결지어보게 된다. 사극의 탈을 쓰고 만들어진 탓인지 21세기인데도 7~80년대 군사독재 정권의 시대의 데자뷰가 너무나 확실하게 겹쳐지기도 하고(작품이 낡아서 그렇게 느껴지거나 한 건 아니다). 당시에는 '당대' 를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했으니 시대극의 외피를 쓰고 우회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시대이지 않았던가. 감독은 어떻게 지금의 시대에 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존재 자체가 무척 의미심장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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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강우석 감독의 작품을 보면서 거기 담겨진 함의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되어 질 수도 있다. 감독의 평소 장기 중 하나인 공감대가 넓은 유머나 관객의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역량의 발휘가 이번에는 실패했다는 의미로 말이다. 범상치 않은 느낌으로 시작했던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사실 내게 만족감을 안겨주지 못했다. 감독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치명적인 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관객을 향한 작품의 유머 수준이 그의 감독작들 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해서다. 


나 역시 <공공의 적>이나 <투캅스 2>를 제외하면 감독이 보여주는 유머가 줄곧 취향과 어긋났었지만,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특히 수준이 저열하다. 원래 어이가 없어서라도 피식거릴 수도 있는 법인데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그런 것조차 없다. 네버. 유머러스한 지점에 도착하면 이야기의 리듬이 늘어져 버리며(초반부에 김정호가 산에서 그의 딸 순실의 사위에 관해 바우와 티격태격하는 시퀀스가 대표적), 시사회 후기에서부터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유머들을 귀로 처음 듣게 될 때 뇌내 사고를 몇 초간 정지시켜 버리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바우가 김정호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며 내비게이션의 개념을 설명하는 순간에서는 기어이 탄식하고 말았음을 밝혀야겠다. 의외로 '삼시세끼' 운운하는 대사는 꽤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달라붙는 편이긴 하다만, 이 역시 웃음을 노렸다면 분명 실패다.


물론 이 작품은 강우석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유머러스한 부분이 적은 축에 속한다. <이끼>보다 더 진지할걸. 하지만 그럴 작정이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비장한 분위기로 만들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유머러스한 시퀀스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그 공백에 풍경 시퀀스를 더 집어넣거나 김정호의 아내인 여주댁과 딸인 순실의 이야기에 집중했으면 좋았겠다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중반 이후 순실과 여주댁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 이와 관련된 이야기의 비중이 커졌음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두 사람의 존재감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순실은 김정호의 친딸이니 아버지만큼 무언가에 중독되다시피 하는 이야기를 잘 보여 줬다면, 작품에서 지도만큼 비중이 큰 천주교 탄압에 대한 이야기 완성도가 더 탄탄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삼시세끼와 내비게이션에 밀려 작품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때문에 천주교 관련 이야기가 작품과 융화되지 못하고 붕 뜬 것처럼 보일 위험도 드러내고 만다. 나는 그 이야기를 또다른 덕후들의 수난으로 이해했지만 말이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요 몇 년간 발표한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도 주목할만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도입부 15분은 강우석 감독이 본인의 스타일을 유지한 채로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감독 특유의 장기들이 마치 불필요한 종양처럼 붙어 있다. 거의 악성 종양이다. 전체적으로 못 만든 작품이었다면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만 결말에서 보여준 차승원의 연기가, 되도 않은 유머로 인해 잊혀져 갔던 일말의 호감을 다시 깨우쳐 준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김정호는 독도에 간다. <디워>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심형래의 편지를 연상케 하는 사 족같은 나레이션에 신경을 끌 수 있다면, 멀리서 독도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연기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헬조선에서 가슴 뛰는 일을 한 대가로, 아내와 딸을 잡아먹히고만 남자. 이젠 자신에게 남은 것이 지도뿐인 남자의 초상이 거기 있어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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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박범신 작가의 소설 <고산자>를 읽긴 했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어가지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는 바람에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는 부분을 넣지 못했다. 다시 보겠다고 도서관 갔는데 다 대출됐더라. 그리고 가능하면 '덕후' 말고 다른 표현을 쓰고 싶었지만 딱히 생각도 나지 않고, '오타쿠' 보다는 '덕후'가 나을 거 같아서 그리 썼다. 뭐, 어쩌겠나. 양해 바란다. 



2)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독도 시퀀스는 총 두 번 등장한다. 그 두 번의 등장 모두 관객들에게 국뽕을 심어주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보면서 한 번도 국뽕의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건 바로 독도를 배경으로 힘차게 헤엄치고 있는 강치 떼 때문이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강치 떼가 너무 실사와의 합성 티가 나서 국뽕으로의 몰입을 방해한 것이다. 왜 하필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합성된 것인지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독도 시퀀스에서 등장한 강치 떼가 일종의 소격효과가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뭐, 스탠리 큐브릭 감독도 <시계태엽 오렌지> 찍을 때 과한 몰입을 방지하고자 말콤 맥도웰이 든 우유잔 속의 우유를 일부러 다음 쇼트에서 양을 다르게 했었다잖아. ...내가 사람이 좋아서 그렇게 생각을 해 주는건지 알 수 없지만, 뭐. 강우석 감독이라고 그런 거 못 한다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3)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유머를 노리고 만든 시퀀스들을 보고 있으면 강우석 감독이 평소에 영화를 촬영하는 방식을 생각하게 만든다. 배우 유준상이 MBC의 TV 예능 프로그램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강우석 감독과 홍상수 감독의 촬영장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그는 강우석 감독과 2010년에 <이끼>를 통해 첫 작업을 했다. 이때 유준상은 원작만화와 달리 영화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시퀀스(=웃기려고 만든 시퀀스)를 촬영 중이었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현장에서 감독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여튼 그때 그는 감독으로부터 "준상아. 이건 웃겨야 하는 신이다. 절대 못 웃기면 안 돼." 라는 주문을 받은 상태였다. 유준상은 정말 부담스러운 기분에서 찍기 시작했는데, 단 두 번 만에 OK 사인이 났다. 이때 주변 제작진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고. 불안해진 유준상은 "감독님. 아무도 웃지 않는데요. 다시 찍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 말했는데, 이에 대한 강우석 감독 왈.

 

"괜찮아, 내가 웃었어! 그럼 됐어. 나만 믿어."

 

유준상의 일화는 강우석 감독이 현장에서 어떤 생각으로 영화를 찍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과도 같다. 아마 강우석 감독의 생각에는 '나의 웃음 = 관객의 웃음 = 나는 관객이 어디서 울고 웃는지 알아' 라는 식의 구조가 있었던 것 같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역시 '삼시세끼', '내비게이션' 등의 드립들이 그런 의도로 구상되었으리라.

 

유준상은 저 때의 일화를 강우석 감독의 카리스마를 설명하는 용도로 활용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강우석 감독의 촬영장에 취직할 수 있으면 하는 게 낫겠다.. 촬영장에서 감독이 이런 즉흥적인 시퀀스들을 만들어 낼 때, 웃고 있으면 옆에 가서 "감독님. 안 돼요. 그거 다 재미없어요. <공공의 적> 수준으로 드립 칠 거 아니면 새로 찍어요." 라고 말해주는 거다. 그게 강우석 감독에게 도움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거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