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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합격 후 진종일 놀러 다니고 꼴에 예비 대학생이라고 아버지도 안드시는 술을 퍼먹고 얼굴 벌개 가지고 들어와 방안에서 비비적거리는 꼴이 보기 싫으셨는지 어머니가 YMCA에서 한다는 예비 대학 프로그램이라도 가서 들어보라고 ‘궁디를 주 차삐셨’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알고 보내신 건지 모르고 보내신 건지 YMCA 예비 대학 강사(?)로 온 형들 누나들은 매우 불긋불긋한 분들이었습니다. 아직 고삐리들인지라 대놓고 얘기는 못 해도 ‘문어 대가리’(전두환)와 ‘노가리’(노태우)를 툭툭 던지는가 하면 대학가 농담을 늘어놔 포복절도를 시키는 가운데 광주니 뭐니 하는 얘기들을 슬쩍 끼워놓곤 했었죠. 어느 날 한 강사가 기타를 들고 와서 이런저런 노래들을 가르치다가 이 노래는 꼭 배워야 한다며 기타를 뜯기 시작했습니다. <상록수>였지요. 


전주를 부드럽게 손가락으로 퉁겨 울리면서 그는 이 노래에 대한 사연을 들려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는 김민기라는 사람이 지은 노랩니다. 그 사람이 야학 교사를 했거든요 야학은 학교에 가지 못한 노동자들이 밤에 모여서 공부하는 곳이었어요. 근데 하루는 노동자들이 찾아왔어요.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뭡니까 하니 이래저래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함께 사는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그 노동자들이 날을 잡아서 합동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는 겁니다. 아이고 축하합니다. 제가 뭘 할까요? 하니 글쎄 주례를 봐 달라는 거예요. 제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찾아갈 선생님도 없고, 교회를 안 나가니 목사님도 없고, 야학 선생님밖에 없다는 거지요.


김민기 씨는 고민을 했답니다. 아이고야. 아직 이마에 주름살 하나도 없는데 뭔 주례냐 말도 안 된다 싶은데 거절하기엔 그 노동자들이 너무 간절한 거예요. 그래서 밤새 이 노래를 지었답니다. 주례사 대신으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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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라는 게 원래 배경을 알고 사연을 접하면 노래는 손끝에 만져질 듯 귓전을 간질이듯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때 그 노래가 제게 그랬습니다. 가사 하나 하나가 진흙에 돌덩이 떨어지듯 턱턱 마음속에 와 박혔지요. 당시 이름은 좀 들어 봤었지만 얼굴은 전혀 몰랐던 김민기라는 사람이 그 노래로 주례를 서는 풍경이 머리 속에서 어렴풋한 윤곽으로 그려지기까지 하는 겁니다. 


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3절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잡고 눈물 흘리니”에 이르렀을 때 한 여학생이 별안간 눈물을 주루룩 흘렸으니까요. 어느 허름한 건물의 백열등 아래,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젊은이를 둘러싸고서 엄숙하게 그러나 눈물 그렁그렁한 채 둘러서선 신랑과 신부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아마도 서로의 손들을 찾았을 겁니다. 형식적으로 손바닥을 대는 게 아니라 깍지들에 힘이 들어가 갈고리처럼 상대방의 손을 잡고 놔 주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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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3절쯤 되면 멜로디를 능히 익힐 만큼 쉬운 노래고 아마도 김민기도 이 부분을 반복했을 테니 노동자들의 목젖도 이 대목에서는 함께 열렸을 겁니다. 그리고 합창하듯 울부짖고 소리치듯 노래했겠죠.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우리 역사의 명곡으로 손 꼽을 만한 명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을 겁니다.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음악적 재질은 있지만 그닥 뛰어나지는 않았던 공병 대위 루제 드 릴의 손에서 하룻밤 사이에 탄생했듯, <상록수>는 엉겁결에 부탁받은 어설픈 주례사 대신 후다닥 만들어졌지만 그 여운은 수십 년을 넘어 아직도 거세게 우리 맘을 울립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왔습니다. 가톨릭 교인이 아니라 교황 성하의 방문이란 당시 흔하던 외국 국가원수의 방한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만 가톨릭 교인들의 흥분은 장난 아니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인들이 하도 ‘비바 빠빠 비바 빠빠’를 부르짖는 통에 교황이 한국어로 “그만합시다.” 한마디 하셔서 폭소를 터뜨렸다는 보도도 봤습니다. 환영이 너무 뜨거우니 교황 성하도 “이거 어떻게 진정시키지? 한국어로 그만 합시다가 뭡니까?”라고 물어보신 모양입니다. 


그분과 청년들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습니다. 질문과 대답 도중 한 청년이 일어나 “노동자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탄압받고 있습니다...... ”라고 부르짖었는데 교황이 퇴장하자마자 사복형사들이 그를 덮쳤죠. 신부님들이 대경실색을 해서 이런 법은 없다고 학생을 구해 냈지만 분위기는 그렇게 삭막했습니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 교황은 의미 있는 선물 하나를 받습니다. 검은 실로 짠 십자가였습니다. 한 대학생이 시국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양말 실을 풀어 꼬아 만든 십자가였지요.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이렇게 풀었다고 합니다. “작은 힘을 모아 이 땅의 민주화를 이룩하겠다.”


그 자리에 모인 청년들이 현장에서 부른 노래 가운데 <상록수>도 있었습니다. 감방에 들어앉아 양말의 실을 풀어 한 올 한 올 엮어 십자가를 만들던 청년도, 교황 앞에서 호소했다는 이유로 사복경찰에게 팔이 꺾여 나갈 뻔했던 청년도 목이 메어 노래했겠죠.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어 80년대 정서 구리다고 고개를 젓는 사람도 있겠지만 멋쩍게 밝혀 두면 저 역시 80년대 정서를 매우 싫어합니다. 군대 비슷했던 강철대오, 뭐 하나 다르면 말도 안 하고 연애도 깨지고 책 몇 권 읽고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이 교만하고, 왕년의 무용담과 “다 해 봤는데 말이야”로 끝나는 설교로 귀결되는 정서라면 특히 말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역사란 그렇고 그런 일상의 무더기들과 냄새나고 불쾌한 쓰레기더미 속에서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찾아 아끼고 나누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아나바다의 작업이고 그 공간이기도 합니다.


흑역사도 많았지만 밝은 역사도 많았고 그 빛줄기를 만들기 위해 이 악물고 그 꽁무니에 파란 빛 내려 발버둥 치던 반딧불들은 무지하게 많았습니다. 그들의 지금이 어떻든, 그 마음들과 그 마음을 울리던 외침들과, 마음을 담은 노래가 여전히 소중한 것들은 그 때문일 겁니다.


주례를 부탁하는 노동자들의 희망을 어떻게든 받아안기 위해 밤새 코드를 긁적거렸을 김민기,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고 까까머리 갓 면한 고삐리들에게 열렬히 이 노래의 사연을 전하던 YMCA 형, 교황에게 이 나라의 어둠을 들어 호소하던 청년과 양말의 실로 십자가를 엮으며 이 악물었을 옥중의 청년, 그 모두가 함께 노래하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우리 역사는 어떤 냉소로도 식힐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어느 비아냥으로도 깰 수 없을 만큼 공고한 감동을 지닙니다.


이 노래를 맑은 음색으로 불렀던 젊은 날의 양희은과 80년대 갑갑한 청춘들의 심장을 그 찢어지는 고성으로 뚫었던 전인권이 함께 부르는 노래 <상록수>를 들으면서 떠들어 봅니다. 서럽고 쓰린 날들이지만 누군가 이 날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뻗을 수 있는 한 손을 뻗어 손에 손 맞잡음 포기하지 말기를. 지금 안 닿아도 실망하지 말고, 돌보는 사람 하나 없는 것 같아도 그래도 많다는 것 기억하면서 시바 안돼! 하면서 콧김 내뿜지 않기를. 더구나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으로 살다가 가신 백남기 어르신의 사람 좋은 영정 앞에서는 더욱.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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