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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를 돌아본다. 민자영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어느 소설 속에 등장한 것이고 정확한 이름은 아니라는 말도 있다) 그녀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집안의 기둥이라 할 할아버지가 일찍 죽었고 의지할 형제들도 없었다. 나이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아버지 염하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려 하자 완강히 물리치고 어른과 똑같이 염을 지켜보고 곡을 하는 등 어린아이 같지 않은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조실부모한 영특한 소녀는 별안간 왕비가 된다. 시아버지 대원군의 선택이었다. 이후 펼쳐진 그녀의 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파란만장은 자신의 나라를 파죽지세로 막장으로 몰아갔던 세월의 총합이기도 했다. 그녀를 만나본 서양인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듯 총명이 넘쳐 흘렀던 여인이었지만 그 총기와 지혜가 향한 것은 나라와 백성의 평안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일가의 권력이었다.


형제가 없으니 세도 부릴 외척도 없으리라는 게 대원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선 아버지와 아들도 없지만 동시에 권력은 사돈의 팔촌을 형제보다 가깝게도 만든다. 민비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던 대원군의 처남 민승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은 민비를 중심으로 뭉쳐 대원군을 몰아냈다. 대원군이 실각하던 무렵 민비는 이조 호조 병조를 중심으로 민씨들을 서른 명 넘게 포진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정적으로 외롭기도 했다.


마음을 나눌 형제나 일가붙이가 하나도 없었고 그나마 의지할 만 했던 양 오빠 민승호는 대원군이 보낸 걸로 짐작되는 폭탄에 죽음을 당했다. 폭발 현장에는 민비의 어머니 한산 이씨도 있었고 역시 목숨을 잃었다. 민비의 가슴은 찢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가족을 죽게 만든 권력이라는 놈에 끊임없이 심취했고 그 권력욕에 편승한 가깝고 먼 촌수의 민씨들 역시 그 장단에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임오군란이었다.


선혜청 당상 겸 병조판서 민겸호는 민승호의 아우였고 일본과 협력하여 별기군을 설치한 이였다. 별기군을 설치한 것은 좋았는데 구식 군대는 차별을 받다 못해 급료를 13개월이나 받지 못했다. 그나마 지급한 급료가 쌀 반 모래 반이었고 여기서 군인들은 폭발한다. 민겸호의 집을 습격한 군인들은 그 집에 쟁여 두고 있던 값진 재물들을 마당에 쌓아 불을 지른다. 황현에 따르면 “비단, 주옥, 패물들이 타 불꽃에서는 오색이 나타났고, 인삼, 녹용, 사향노루가 타면서 나오는 향기는 수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라고 한다. 엄청나게 해먹었던 것이다. 이 민겸호는 대원군에게 살려달라고 조르고 나중에는 중전마마를 애타게 부르짖었으나 군인들에게 난도질당해 죽는다.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민비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았으나 이미 그녀는 도망간 뒤였다. 홍재희라는 무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군인들 손에 죽었을 것이다. 그 구사일생의 피난길 속에서도 그녀는 도중에 들은 한 노파의 험담을 귀담아 두었다. 서울에 난 난리 때문에 피난 가는 새색시로 위장했던 그녀 앞에서 “민씨인지 여우인지 그년 때문에 고생한다.”고 한 노파가 위로(?)의 말을 건넸고 다시 권력을 잡은 민비는 그 노파를 찾아내라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그 마을 전체를 몰살해 버렸다고 황현은 기록하고 있다.


총명했다기보다는 권력에 민감했고 불행했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 비극에 궁극적 책임이 있었던 민비. 자신의 장례식까지 치러져 정치적으로 매장되는 상황에서 피난지에서 가슴을 졸이던 그녀에게 한 친구가 생긴다. 자칭 관우의 딸이라는 무당이었다. 그녀는 염려 마십시오 마마는 모월 모일 환궁하십니다 하고 민비를 위로했는데 그게 신통하게 맞아 떨어졌고 환궁에 동행했을 뿐 아니라 진령군이라고 하여 일약 군(君) 칭호를 받는 파격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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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맹랑한 관우의 딸의 말이라면 민비는 무엇이든 들어 주었다. 금강산 봉우리마다 쌀 한 섬과 돈 천 냥, 무명을 얻고 치성을 드린다고 해도 두말이 없었고 이 여자의 속삭임에 따라 신하들이 어이없이 쫓겨나기도 했고 벼락 벼슬에 임명되기도 했다. 안효제라는 이가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고발했으나 고종은 그를 추자도로 귀양 보내 버렸다. 이때 고종이 하는 말을 보면 민비의 독살스런 기운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망령되고 고약한 말들은 비난과 헐뜯는 말이 아닌 것이 없다. 겉으로는 비록 무슨 문제를 들어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사실 협잡을 부렸다.”



권력자 주변에는 항상 날파리들이 끼이는 법, 어느 신하는 “오늘의 급선무는 군사를 훈련하고, 수령을 가려 뽑고”를 운운하다가 별안간 “비방을 물리치는 일이니 안효제를 처벌하소서.”라고 요즘 말로 하면 ‘유언비어 의법 처단’을 부르짖었고 더 충성스러운(?) 자는 아예 안효제를 죽여 버리라고 이마를 땅에 부딪쳤다. 어느 덜떨어진 녀석은 이렇게 말하며 꼬리를 흔들기도 했다. “조금도 거리낌 없이 말을 가리지 않았으니, 감히 기도를 드리는 문제를 어찌 무엄하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습니까?”


그로부터 10년 뒤 종두법의 보급자로 유명한 지석영이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진령군에 대한 원망이 어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민비만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알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민비의 주변에는 예스맨만 들끓었고 그 권력에 기생하는 살찐 기생충들만 그득했다.


민비가 간 지 올해로 121년이다. 바로 작년이 민비가 죽었던 ‘을미년’이었으니까. 윤회설을 신봉하지는 않으나 요즘 나는 민비가 바야흐로 환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찝찝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 등 불행하고 외로웠던, 그러나 꽤 의연해 보였던 한 소녀, 자신까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협 속에서도 권력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았고, 결코 지혜롭지는 않았지만 정치에 대한 동물적 감각이 있었고, 자신에게 험담한다고 마을을 몰살시킨 표독함과 무당에게 군 칭호를 주고 모든 말을 들어 주는 대책없음까지 겸비한 위인이 “보라 우리 눈앞에 나타나신 그이 모습”을 과시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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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진령군까지 환생하여 그 옆에 붙어 있는 것 같고, 그 뒤에 착 들러붙어 “유언비어 의법 처단”을 부르짖으며 “의혹은 누구든지 얘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혹 제기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 듯 말 같지만 말이 아닌 말을 하고 있는 이까지도 현생에서 버젓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면 윤회설의 설득력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아직도 쌓아야 할 악업이 남았는가. 어찌 한 생으로 모자라 환생까지 하여 이러시는 것인가 나무아미타불을 되뇌며 목탁이라도 두들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서유견문’의 유길준은 민비를 두고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자”라 불렀다. 오늘날의 그분에게는 어떤 형용사가 어울릴까. 최소한 ‘나쁜’은 아닌 것 같다. 몇 가지 떠오르는 형용사는 있으나 이 또한 ‘의혹’에 해당할 수 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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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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