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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선생의 ‘국혼론’


사학자이자 언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백암 박은식 선생의 저서 《한국통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돼 있다.


“… 무릇 인류가 이 지구의 땅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야만스럽고 무지함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제도를 정하고 도덕윤리와 정치, 교육, 법제 등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역사인 것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국혼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혼에 속하고, 전곡, 졸승, 성지, 함선, 기계는 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혼이 있는 자는 백에 따라서 죽고 살지 않으므로 나라에서 국사를 가르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게 된다. 오호라 지금의 한국은 이미 백은 죽었다고 할 수 있으나 소위 혼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이미 없어져 버렸는가?(후략)”


중고등학교 다닐 때 한국사 공부에 좀 관심 있었다 하는 사람들은 대개 알 법한 내용이다. 박은식 선생의 ‘국혼론’. 동양의 전통적인 혼백론을 민족주의 사학의 장으로 끌어와 해석을 한 것인데, 오감으로 느낄 수는 없으나 우리(민족)의 의식과 이성을 구성하는 것들을 ‘혼’, 우리(민족)의 영역과 생활 일체를 관장하는 물리적인 것들을 ‘백’이라 상정해 놓고, (역사란 혼과 백의 결합이지만) 혼이 남아 있으면 백은 죽었다고 해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본 거다. 식민지 조선을 떠나 타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그 일환으로 책을 써 나간 박은식 선생은 이렇듯 동양의 전통적 사상을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영역에 끌어와 저항적 민족주의의 기틀을 닦고자 했다.



박통의 ‘혼이 비정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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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박통이 작년 11월 10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한 주술말이다. 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처음 언뜻 들었을 때 필자는 박은식 선생의 ‘국혼론’을 떠올렸더랬다. “자기 나라 역사”, 즉 국사를 모르면 이 국사는 ‘혼’에 속하는 것이니 혼이 없는 인간이 된다, 여기까지는 박은식 선생의 주장 그대로다. 박통이 어디서 주워들었거나 누군가 박은식 선생의 사상을 토대로 조언을 해 주었나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뒷부분. 역사를 ‘바르게’ 배우는 기준은 무엇이며, 혼이 ‘비정상’이란 건 무얼 뜻하느냐는 거다. 이건 박통의 입에서 연달아 터진 방언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잘못된 역사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한국을 태어나서는 안 되는 부끄러운 나라로 인식하게 돼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특히 분단의 역사를 갖고 있고, 통일을 이뤄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서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 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국가 자긍심은 정확한 역사관에 좌우된다.”


“현 역사교과서는 우리 현대사를 정의롭지 못한 역사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으로, 북한은 국가 수립으로 서술되고 대한민국에 분단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6·25 전쟁의 책임도 남북 모두에게 있는 것처럼 기술돼 있고, 전후 북한의 각종 도발은 축소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반노동자적으로 묘사하고, 기업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해 반기업정서를 유발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게 돼 있다.”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측은 다양성을 이야기하지만 현재 7종 교과서 중 가장 문제가 있는 근현대사 집필진 대부분이 전교조를 비롯해 특정 이념에 경도돼 있다.”


그러니까 현행 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는 말았어야 할, 정의롭지 못한 나라로 서술하고 있고, 북한을 두둔하는 데다가 반 기업적인 서술이 주를 이루는데, 알고 보니 근현대사 집필진 대부분이 특정 이념에 경도돼 있다 카더라, 그런 걸 배우면 대한민국을 혐오하게 된다, 뭐 그런 얘기다. 그렇다면 ‘바른’ 역사교과서는 이와 정 반대로 서술하면 된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한결같은 박통의 열렬한 소망


까도까도 끝이 없는 최순실과 비선실세들의 정체가 드러나며 국정교과서 강행에도 이들이 개입 되었다는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혼이 비정상’이니 ‘기운이 온다’느니 하는 박통의 발언도 그렇지만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차은택의 외삼촌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만큼은 박통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박통은 한결같았다. 영애 시절 당연히 그러했을 것이고 아비가 총탄에 간 이후 야인 생활을 할 때에도 5·16 쿠데타는 ‘구국을 위한 혁명’이었고 10월 유신 역시 국가를 위한 결단이었다.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5년에는 뉴라이트 인사들이 집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출판 기념회에 참석하여 “우리 청소년들이 왜곡된 역사 평가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 뜻 있는 이들이 현행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청소년들이 잘못된 역사관을 키우는 것을 크게 걱정했는데 이제 걱정을 덜게 됐다.”라고 축사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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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박통의 업적을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 세우고 못 다한 국민 총화를 이루어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한 개인의 소망과 의지에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이론적 근거를 착실하게 제공해 주었다. 이들은 겉으로는 정치적 자유주의, 경제적 시장주의, 외교적 국제주의, 북한 민주화 등을 표방하지만 기실 경제성장 지상주의와 반공주의 매카시즘이나 다름없는 입장으로 무장하여 식민지기의 경험은 해방 후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자유’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국부 이승만께서 1948년 ‘대한민국을 수립’한 덕택에 공산주의 세력을 물리쳐 왔고, ‘구국을 위한 혁명’을 한 원조 박통은 경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켜 자랑스러운 조국의 역사를 이룩했다는 성공 신화를 남기고자 한다. 더불어 고대의 찬란했던(것으로 믿고 싶은) ‘민족사’를 부활시켜 민족 ‘중흥’을 외쳤던 원조 박통의 역사적 사명감을 현재에 되살리면 금상첨화가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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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구국의 혁명'의 예


그러한 길라임개인의 열렬한 소망과 의지는 2013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를 발판 삼아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뉴라이트 계열인 한국현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권희영, 이명희 교수가 대표 저자를 맡았는데, 개발 과정부터 많은 논란이 일었지만 검정에 최종 통과하였다. 논란은 검정 통과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이즈음 김무성 새누리당 의원은 ‘근현대사 역사교실’ 모임을 발족하여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저자인 이명희 교수를 연사로 초청하는 등 대놓고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이때 쯤 필자 역시 본지에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에 관한 글을 연재했다. - 링크) 게다가 교육부는 논란의 중심에 있던 교학사뿐만이 아닌 한국사 교과서 8종 전체에 대해 수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한 호위 속에서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는 채택률 0%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5년 급하게 국정화 작업이 진행되더니만 그해 11월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확정돼 버렸다.(역시 그 즈음 해서 필자는 본지에 글을 기고했다. - 링크)



에이, 설마


당시 국정화 강행의 배경을 두고 국정 교과서가 배포되는 2017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라 박근혜가 제 아비의 영전에 바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필자는 그건 너무 나갔다고 봤다. 제 아무리 막 가는 정권이라 해도 대통령이 자신의 개인적 소망 때문에 교과서 발행 방식을 바꾼다? 이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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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저 말을 굳게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일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고, 고대사까지 들추어 봐도 이런 적이 있었을까 싶은 초유의 사건들이 날마다 뉴스로 등장하고 있으니 아비 영전에 바칠 제물로 삼고자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고 입맛에 맞게 서술 기조를 바꾸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겠는가. 지극히 비이성적인 이야기 같지만, 비정상의 정상을 보여주는 정권을 대하며 필자가 내린 합리적 추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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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이 ‘아직도 지가 공주인 줄 아는’ 박근혜에게 일일이 컨펌을 내려줬다고는 하지만 어릴 적부터 권력의 중심부에서 자랐고 아비와 어미가 총탄에 가는 것을 보며 체화된 정신세계는 최순실이 컨펌한 게 아니다. 헌법재판소에서 “국정제보다는 검인정제를, 검인정제보다는 자유발행제를 채택하는 것이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의 이념을 고양하고 아울러 교육의 질을 제고할 수도 있을 것”(1992. 11. 12.)이라 결정한 바도 있지만 박근혜에겐 자신의 정신세계가, 그 세계 속 제 아비가 헌법 위에 군림한다.


최순실과 그 일당들이 한 게 있다면 단지 이러한 박근혜의 의중을 잘 파악하면서 실무 과정에 개입한 정도였겠지만, 다른 건들과 다르게 역사교과서 국정화 만큼은 의지의 원천이 박근혜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원천의 지류로서 김무성 등 집안 친일 경력과 독재 부역 경력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구기생충들이 합류하여 꽤 커다란 물줄기를 형성했고. (김무성에게 속지 말자. ‘대통령’을 안 하겠다는 거지 권력을 내려놓겠다는 게 아니다. 내각제 개헌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거 뻔히 보인다. 마음대로 되진 않겠지만 조심해야 한다.)



다시 뜨거운 감자, 국정 교과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다시금 도마에 올랐다. 교육부는 28일 현장검토본을 공개하여 국정 교과서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는 입장이고, 진보교육감들은 국정화 철회를 위해 공동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번 주말(11월 26일) 5차 민중총궐기 집회 때는 국정 교과서 폐기가 주요 구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24일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가 60.4%, 찬성이 19.9%로 지난해와 비교하여 반대 여론은 8%포인트 상승, 찬성 여론은 23%포인트 감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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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흘러가는 지라 예측하기 어렵지만 교과서 개발 기간이 짧다 한들 1년여 시간을 들인 교육부로서는 며칠 만에 번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의아함’을 넘어서 검찰이 자신을 피의자로 상정한 데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그 분께서 내정을 챙길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하니 국정 교과서 정도야 굳건히 지켜내지 않겠는가. 물론 현장검토본을 가슴에 품고 끌어내려질 가능성이 더 크긴 하지만 말이다.


서두의 《한국통사》 인용구 일부분을 다시 보자.


“… 무릇 인류가 이 지구의 땅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야만스럽고 무지함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제도를 정하고 도덕윤리와 정치, 교육, 법제 등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역사인 것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국혼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후략)”


야만과 무지함을 벗어나기 위해 정해 놓은 국가제도에 따라 뽑아놓은 자와 그 일당들이 도덕윤리와 정치, 교육, 법제 등을 다 유린하여 역사 또한 엉망이 되었다. 역사가 엉망이 되었으니 국혼 역시 엉망이 되었을 터, 박은식 선생이 이 꼴을 보고 있으면 구천에서 통곡할 일이다. 


진짜 ‘혼이 비정상인’ 자는 여전히 대통령이다.





 

뱀발

3년 전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에 관한 글을 쓸 때만 해도 몇 년에 걸쳐 역사교과서를 소재로 본지에 글을 쓰게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더랬다. 솔직히 그때를 마지막으로 관련 글을 더 쓰고 싶지 않았다. 역사교과서 편집자 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장감이 남아있을 때 나름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내 업에 관한 인식을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워낙 큰 건들이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툭툭 터지다 보니 눈길이 가는 게 사실이었고 그런 내 눈길을 대체 어디서 주시하고 있었던 건지 죽지않는돌고래 부편집장은 내게 원고 청탁을 툭툭 해 왔다. 부편집장이야 관련 사건이 터지면 또 원고 청탁을 하겠지만 난 더 이상 글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 도대체 나는학생들은 무슨 죄냔 말이다. 아래의 링크로 마음을 대신한다.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 이준식 교육부장관 퇴진!” 서명 (링크)






쫄깃한기타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