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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때 손연재의 팬이었다. 정확히는 리듬체조 국가대표의 팬이었다가 손연재를 알게 되었다. 


처음 리듬체조를 접한 건 인기 종목 사이에 잠깐 끼워 보여주는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였지만 (그래, 일단은 인정한다. 솔직히 처음엔 예쁘고 날씬한 여자들 보려고 봤다.) 전부 외국인 선수, 특히 러시아와 동구권 국가의 백인들 뿐이어서 그런지 거리감이 느껴졌었다. 그러다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 면면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모 잡지에 실린 이경화 선수의 인터뷰를 보고나서였다. 


당시로서는 특정 종목 선수나 무용수 외에는 입지 않던 딱 붙는 트레이닝용 타이즈를 입고 일반인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앳된 외모, 그런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국제무대의 벽에 대한 현실적 인식과 현실적 목표를 얘기하고 있었던 인터뷰 내용, 흐릿하게나마 기억에 남아있는 건 이 정도다. 


처음으로 리듬체조 선수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다. 물론 당시에는 국내 리듬체조 선수에 대한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질 구린 경기 영상 몇 개와 싸이월드 미니홈피 주소가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싸이월드는 훈련이 일상인 선수라서 그런지 업데이트가 거의 없었다. 자연히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국가대표 경기나 전국체전, KBS배 대회 같은 소식이 네이버나 다음에 뜰 때만 찾아 보는 수준이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더딘 팬질의 결과로 이경화 선수와 같이 국가대표를 하고 있는 김윤희 선수, 백지선 선수 등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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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갈라쇼 당시의 선수들

(왼쪽부터) 이경화, 손연재, 김윤희


김윤희 선수는 후에 리우 올림픽 리듬체조 중계를 하면서 화제가 되었고 백지선 선수는 무릎 부상 후 -대부분의 체조 선수가 그렇듯- 공연 쪽에서 일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소식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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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온 사진을 찾기가 힘든 백지선 선수


그런데 이 때 국내 주니어 무대에 독보적인 선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손연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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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 시절의 손연재


왜 그런 존재 있지 않은가. 어차피 1등은 정해져 있으니 나머지 선수들은 2등만 바라보고 열심히 하게 되는. 이 당시 수상 경력만 보면 국내 주니어 무대에서 손연재 선수는 그런 선수였지 싶다. 


실력만이 아니라 예쁜 얼굴에 신체 비율까지 좋았던 유망주였다. 얼굴 작기로 유명한 김연아 선수가 손연재를 처음 보고 한 말이 "얼굴이 너무 작아서 사라질 것 같다"였다고 한다. 그렇게 작은 얼굴에 어린 시절부터 다져온 가늘고 곧은 팔다리를 갖고 있었으니 당시 리듬체조 팬이라면 이런 김치국 좀 마셨으리라. '얘 하나 잘 키워서 세계 무대의 벽도 깰 수 있으리라'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의 손연재는 지금처럼 넉넉한 환경에서 운동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수구를 던지고 받을 수 있을 만큼 높은 천장의 강당(?)을 가진 학교는 세종고 하나였다고 하고 후에 안 것이지만 경기복도 비싸서 어머니가 직접 만들어 입혔다 한다. 


어쩌다 협회에서 국대 급 애들을 모아 러시아 전지훈련을 보내 새 프로그램을 받고 연습하도록 해줬던 것 같은데 일정을 잘못 잡은 것인지 전국체전을 몇 일 앞두고 귀국해서 새 프로그램을 하려니 줄줄이 실수를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렇게 실수를 해도 국내에서 훈련해 실수 없이 프로그램을 마친 선수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건만 하나 같이 울음을 터뜨렸던 것도 기억이 난다. 


뭐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국제 무대의 벽에 다가서는 일이 일어나니 바로 신수지 선수의 등장이었다. 십여 년 만에 올림픽 본선 무대에 진출해낸 것이다. 약간 늦깍이 선수였기 때문인지 이경화 선수와 손연재 사이 끼인 세대라 주목을 못 받았던 건지 나는 신수지 선수 소식을 비교적 늦게 접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백일루전 9회를 도는 선수가 나왔다'는 식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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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렇게 한 선수 밖에 못 하네 어쩌네 회자되는 기술을 시그너처 무브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그너처 무브라면 역시 김연아 선수만의 기술, '유나스핀'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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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체조에도 당연히 정상급 선수들은 이런 자기만의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러나 (드문드문 팬질하느라 기술적 지식이 전혀 늘지 않고 있던) 내가 봐도 백일루전은 시그너처 무브라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기술이었다. 난도 점수만 있는 게 아니라 예술 점수도 있는 종목에서 한 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9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은... 백일루전 9회는 다른 선수들이 못 한다기 보단 안 하는 기술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중요한 건 백일루전 9회가 시그너처 무브로의 가치가 있냐 아니냐보다 우리나라 선수가 드디어 자기만의 무언가를 시도하는 수준까지 갔다는 점이었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신수지는 본선에 오른 유일한 동아시아 선수였다. 리듬체조 팬들이 주니어의 손연재를 보고 마시고 있던 김치국을 진정한 에피타이저로 격상시킨 선수가 바로 신수지였던 것 같다. 언론은 신수지 선수를 조명하다 곧, 손연재 선수도 조명했고 그렇게 비인기 종목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손연재 선수가 김연아 선수와 함께 스무디킹 광고를 찍었을 때는 '아 얘가 드디어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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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드린 일화, 김연아가 손연재 보고 얼굴 사라질 것 같다고 했던 것이 이 때의 일이었다.


기어이 9시 뉴스에까지 나온 손연재, 그런 손연재를 보고 어머니가 '뭐 저렇게 예쁜 애가 있니'라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쟤가 잘 될 줄 알고 있었어요'라고. (변태같아 보일까봐 속으로만 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신수지 선수가 저기까지 해놨으니 손연재는 그보다 한 걸음 더 올라가겠지. 구체적으로는 세계 정상급은 못 되더라도 자기만의 시그너처 무브를 시도하거나 동아시아 국가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갖는 선수로 성장하리란 기대가 있었는데 뭔가 눈에 띄는 성장이 보이지 않았다. 기대만큼 많이 크지 못한 키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잘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애매한 감정을 갖게 했다. (물론 상술했다시피 나는 기술적 지식은 안습이다.) 그저 '실수 안 하면 잘 한 것, 실수 하면 못 한 것'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비우고 볼 수밖에 없는. 주니어 시절보다 표정 연기는 눈에 띄게 좋아졌지만 다른 무언가, 확연히 발전했다고 콕 찝어 얘기할 만한 것은 꼽기가 어려웠다. 


나는 손연재를 볼 때면 늘 비교되는 김연아 (혹은 안 좋은 쪽으로 비교되는 소트니코바) 보다 아사다 마오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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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다. 아사다 마오와 손연재는 급이 다르다는 걸. 시니어 무대에서 김연아에게 고전하게 되었지만 주니어 시절 아사다 마오는 세계 챔피언이었다. 반면 손연재는 국내에서만 정상이었다. 시니어 때 성적으로만 비교해도 마오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랭킹 2위의 경기를 보였던 반면, 손연재는 줄을 대며 어거지로 4위에 올랐다는 평가를 듣는다. 


내가 손연재를 보며 아사다 마오를 떠올린 까닭은 '너무 일찍 스폰서가 붙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운동하는 사람에겐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꼰대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이제 와 결과론적으로 보니 '환경이 좋아지면서 성장이 멈춘 케이스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거다. 


'좋아진 환경'이 다른 스포츠처럼 '체계적으로 훈련 받을 수 있게 되었다'거나 '더 수준 높은 선수들과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리듬체조와 피겨 스케이팅 모두 채점 스포츠라는 점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심판에게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 점수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연습을 하는 것보다 성적에 더 영향을 준다면,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선수의 자세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거다. 


실제로 아사다 마오는 주니어 때는 김연아를 압도했다. 당시의 김연아는 마오랑 경기를 하고 나면 SNS에 '또' 졌다, '드디어' 이겼다, 라는 표현을 쓰는 선수였다. 그러나 시니어 무대에 와서 마오는 물오른 표현력과 꽉찬 구성을 소화하는 김연아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럴수록 미라쿠루 트리푸루아꾸세루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리플 악셀만 성공하면 김연아를 이길 수 있다는 양. 어쩌다 김연아를 이겼을 때도 ISU 스폰서가 대부분 일본 기업이라 득을 본다는 얘기를 듣는 선수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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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손연재는 한 방송에 나와서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연습하는 걸 모르나보다는 생각이 들어 슬펐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다른 방법으로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의 연습은 같은 시간을 하더라도 질이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전신을 찢어대는 고통스러운 운동, 조금 더 안전한 시도를 하고 어렵지 않은 동작을 택하고 있진 않았을까? 


최근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나는 손연재의 팬과 김연아의 팬이 서로 대립하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김연아의 경기를 보면서도 응원하는 마음이었고 손연재의 경기를 보면서도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무리 손연재가 좋다고 해도 김연아를 깔 이유가 없었다. 비인기 종목의 간판 스타가 되었다는 점에서 많이 비교되긴 했지만 그 뿐, 아예 종목도 다르고 위상도 다르다. 경쟁하고 있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굳이 경쟁 중인 영역이 있었다면 광고 정도? 


하지만 차은택과 최순실의 늘품체조 프로젝트에 김연아가 불참하고 손연재가 참석하면서 김연아가 장시호, 김종에 찍혔다는 정황을 보도로 접한 뒤로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은연 중 느끼고 있었던 거다. 김연아를 까내려서 손연재를 끌어올리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여기에 김연아 팬이 반발을 하면 손연재 팬이 다시 반발을 하는 식으로 싸움이 성립되어 온 것이었다. 


누군가는 손연재가 피해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손연재가 정치를 알 리 없고 실세에게 잘 보여야 대한체육회 대상을 따네 마네 하는 걸 계산했을 리도 없다. (했다면 다른 의미에서 레전드 선수가 될 듯) 그럼에도 사람들이 손연재를 욕하는 이유는 은연 중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손연재의 현재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그 밑에 밟히는 누군가가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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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손연재 만의 잘못이 아니다. 찍어준 사람 없이 박근혜가 저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거란 사실처럼 리듬체조계가 부정부패에 무심하지 않았다면 손연재와 그 관계자도 경기 외적인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씨바, 말이 되나. 아무개 라인인지 아닌지가 경기 내용보다 성적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니. 특정 스포츠계든 국가든 정정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세계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은 매순간 짓밟힐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내가 리듬체조 선수의 팬질을 한 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진실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경화 선수의 현실적인 목표 안에서 최선을 다 하겠다던 담담한 인터뷰가 있었고, 이미 안정권 등수임에도 완벽한 연기를 못 보여줬다고 울먹이는 선수들이 있었고, 그리고 비인기 종목의 한계를 극복하겠다 모두가 바라보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올라서기만 하면 된다는 그런 무심함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나를 팬질하게 만들었던 거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손연재와 리듬체조에 팬심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손연재 선수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덕분에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리듬체조라는 스포츠의 이면에 저런 얼룩이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 박근혜를 지지하다 실망한 노인들도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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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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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그룹 마켓팀원. 편집부 일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