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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닉슨의 마지막 


1974년 7월만 해도 미국 제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대통령직 유지를 위해 끝까지 싸우리라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해 8월 이른바 "스모킹건 테입"이라 불린 새로운 증거의 등장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닉슨이 이 사건에 백악관이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보고 받아 인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FBI 수사에 대한 방해공작을 승인하는 내용이 담긴 테잎이었다.


가뜩이나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판에 이 테입의 공개는 그야말로 결정타로 작용하였고, 상 하원의 지도자들이 백악관을 방문해 하야를 권고하기에 이른다. 권고래봤자 간단했다.


'버텨봤자 탄핵될 것이 뻔하니 그냥 사임하쇼'


그 시점 상원에서 그를 지지하는 의원은 아무리 최대로 잡아봤자 15표에 불과했다. (전체 100명 중 탄핵 저지선은 1/3인 34표가 필요) 결국 닉슨은 8월 8일 전미에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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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담화문의 요지는


'나는 결코 중도포기자가 아니다. 포기란 나의 모든 본능에 혐오감을 유발시키는 행위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의 이러한 개인적인 생각보다 국가적 이익을 위해 행동할 때이다미국이 국내/대외적으로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생각할 때, 지금은 (탄핵으로 인한) 각종 의회 및 법원의 절차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사임 선택이 옳다고 믿는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마지막으로 대통령 전용헬기 마린 1과 전용비행기 에어포스 1을 거쳐 낙향하고 그 후임으로 부통령 제럴드 포드가 3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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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담화는 몇몇 호의적인 보도도 있었으나, 전국민적으로 욕을 먹게 된다. 담화문의 내용의 절반정도를 중국, 중동 외교 등 자신의 치적에 대해 나열하는데 할애했고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함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여년전의 이 담화문, 그리고 리처드 닉슨은 참으로 양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 닉슨은 물러나야할 때를 알고 행동을 했다. 그 결정이 담화문에 스무번도 넘게 등장하는 단어인 "국익"을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본인을 위해서도) 정치적으로 현실적인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리처드 닉슨 역시 누구처럼 고집불통에 독선적인 캐릭터로 유명하지만 최소한 정세판단을 할 두뇌는 있었던 셈이다. 탄핵 절차에 수반되는 국론분열과 각종 비용을 떠나서, 끝까지 악랄하게 버티다가 탄핵으로 쫓겨나는 것보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기품있게 퇴진을 발표하는 것이 본인의 사면 가능성을 위해서도 당연했다(실제로 포드는 바로 닉슨을 사면했다).




2. 박근혜의 마지막 


그에 반해 2017년 대한민국의 박씨의 그간 행적을 비교해 보자.


후. 일단 한숨 한 번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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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정국 내내 양파처럼 까면 깔수록 나오는 무수한 악행들에 대한 증거들이 차고 넘쳐났고 박씨가 워터게이트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아니, 100배는 더 악랄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극명해졌다. 스모킹건이 아니라 기관총 수준의 증거들이었다.


하지만 퇴진 선언은 커녕, 사과문(?)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아닌, 그런 거 몇 번 발표하고 국회에 자신의 거취를 일임한다고 했다. 이후, 검찰과 특검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했다가 다시 조사 못 받겠다고 하다가 정체모를 미디어와 인터뷰놀이 하더니 나중에는 막장으로 치달아 대리 변호인단의 병참선이 길어지니 이제 우리가 우세하다느니, 재판관이 9인 아닌 8인이라 못받아들인다느니, 국회의 토론이 없었으므로 탄핵소추안 가결이 무효라느니, 탄핵이 인용되면 아스팔트가 피로 물들고 어쩌고 저쩌고... 


마트에서 뒹굴며 악쓰는 7살 꼬마보다 한심한 꼬라지의 향연이 이어졌다. 이에 비하면, 아무리 손익계산에 따른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닉슨의 퇴진은 기품있고 우아해 보이지 않는가. 왜 전직 대통령은 본인의 헤어스타일처럼 우아하고 기품있는 행동을 단 1도 보여주지 못할까? 아니, 국익, 국격 이런 거 다 집어치고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말이다(실제로 헌재는 박씨의 압수수색 거부, 수사불응 등 역시도 인용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면 장차 다가올 깜빵행 및 판결에도 동정표라도 좀 얻을 수 있잖아? 




3. 닉슨의 웃음과 박근혜의 웃음 


삼성동 사저로 돌아가는 박씨의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며 닉슨이 사임하며 보였던 마지막 미소가 떠올랐다. 닉슨은 대통령 전용헬기 마린 1에 탑승하며,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양팔로 V자를 그렸다. 어찌보면 추잡한 스캔들로 인해 사임하는 대통령 주제에 V자 씩이나 그려가며 웃는 그 모습이 옹색해 보이고 찌질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닉슨은 하야에 임하며 국론의 통일과 화합을 이야기했다. (진심이든 아니든)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해 전혀 악감정이 없으며 비판자들 역시 국익을 위해 행동했다고 믿는다 했다. 그래서 앞으로 모두가 신임 대통령을 믿고 국가의 문제들을 타결해 나가자는 메세지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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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직 대통령은 고작 그 정도 기품도 보여주지 못했다. 쫓겨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말이다.


단지 그녀는 사저로 돌아오며 방탄 자동차 유리창 너머 물결치는 태극기와 지지자들을 향해 치졸한 미소를 보였을 뿐이다. 그 한 줌의 지지자들이 그녀로서는 현시점, 자신이 가진 유일한 방패니까 그 중 몇이 죽든 말든, 그저 자신의 불행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걸 보면서 "아아~ 역시 아직 내 편은 많아" 쯤의 소회 밖에는 없는 듯 보인다.


비명에 가신 어머니와 아버지, 그 슬픔을 딛고 국가에 이 한 몸 바쳤으나 이제 또 다시 악랄한 빨갱이 무리들의 음모에 의해 청와대에서 내쳐진 비련의 공주님이, 슬픔에 울부짖는 백성들에게,


'전... 괜찮아요. 여러분이 있잖아요. 꼭 저를 위해 애써주세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실은 밝혀질 거에요.'


라는 생각을 들게하는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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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은 "I am not a crook."(난 사기꾼이 아니오)라는 명언을 남겼다. 뻔뻔한 사람이었다. 리처드 닉슨은 지금도 미국에서 최악의 사기꾼이자 거짓말쟁이 대명사로 통한다. 그가 1994년 별세했을 때, 애도하는 분위기도 없진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그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미국 내에서 그는 코가 자라난 피노키오의 이미지로 카툰에서 희화화되고, 풍자개그에 단골로 등장하는 조롱거리다. 하지만 우리 전직대통령의 뻔뻔함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대리 변호인단의 입에서 탄핵이 인용될 시 아스팔트가 피로 물들 거라는 메세지까지 나오게 한 분이니까.


미국 역사상 스스로 사임한 유일한 대통령 닉슨. 허나 탄핵 절차로 인해 의회와 법원의 낭비될 에너지를 생각하며 국익을 위해선 자신의 사임이 옳다고 '말은' 했던 대통령. 한국 역사상 탄핵된 유일한 대통령 박근혜. 허나 끝까지 버티고 버티다 탄핵되고 나서도 진실은 밝혀질 거라고 말하는 대통령, 아니, 박근혜 씨.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닉슨은 그나마 기품있는 대통령이었던 것 같다.






돌퐁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