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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립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


입에 감기는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 애호박남이라는 이름과 빛아인이라는 이름은 같은 사람을 지칭한다. 배우 유아인이다. 그가 트위터/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 남긴 족적이 이번주 온라인 상에서의 뜨거운 이슈 하나였다. 사건을 지칭하는 이름도 여러가지가 있다. 애호박 게이트부터, 빛아인 대첩까지.


이슈를 간결하게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건 어렵다. 내용이 어려운 게 아니라 용어 선택이 어렵다. 유아인이야 특정인물이니 그냥 유아인이지만, 상대편을 지칭하는 용어는 어떻게 지정해도 누군가에겐 편파적이다. 만약메갈충이라는 용어를 쓴다면 이미 용어 선택부터 유아인이 옳으며 상대방은 비난하겠다는 의도를 담는다. 그렇다고일부 트위터 사용자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유아인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반발감을 갖는다. ‘트페미라는 용어를 쓴다 해도, 그건 비꼬는 용도로 많이 쓰는 용어이므로 중립적이지 않다. ‘페미니스트들이라고 쓴다면 자칭 페미니스트이면서 유아인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반발감을 갖는다.


사실 벌어진 일의 구도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유명인 1 vs 다수의 트위터 싸움. 그리고 그에서 파생되는 소셜 미디어 상에서의 파장과 언론의 보도. 이들을 다시 비판하는 당사자 유명인. 어느 순간 개입하는 스포츠 연예 언론. 내용 빼고 틀의 구도만 본다면, 수없이 벌어지는 헤프닝과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내용을 넣고 디테일한 구도를 넣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앞서 언급했듯, 일은 그저 용어를 선택하는 시작점부터 어렵고, 내용을 비평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더더욱 까다롭다.


일반적으로, 딴지에 글을 쓰는 입장에서 이럴 그저 아무 말도 안하고 닥치고 있는 게 장땡이다편집장이 한마디 하라고 하면, ‘유아인도 억울한 면과 잘못한 면이 있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며, 누가 잘못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사랑과 평화와 공존이라고 선문답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슈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일은 저렇게 일반적인 대응이 통하지 않는다. 저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면, 반드시 양쪽 모두에게 비난을 받으며 나자신의 안녕도, 메시지의 전달도 수행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쪽 사람들은 자신의 편이 전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잘잘못이 명백한 사안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에 대해서, 내가 이미 서두에서 그렇게 했듯 중립적이고자 하는 노력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로, 나는 누군가에게한남충 되고, 누군가에게는메갈충 된다.


이렇게 중립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의 원인에 대해극단끼리 대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로 대립의 당사자들이 극단이라면 사이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중립지역에 놓인다. 예를 들어 종교전쟁에 대해 토론을 한다면, ‘아무리 그래도 종교를 이유로 서로 죽이는 건 안 되지라는 중립적 의견이 다수를 구성할 밖에 없다. 오히려, 중립이 허용되지 않는 건 대립하는 사이의 거리가 좁다는 얘기다. 중간이라고 부를 있는 영역 자체가 좁으니 사이에 서 있는 사람도 적을 밖에 없다.


쯤에서 글의 목적을 밝힌다. 글에는 누군가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했고, 누가 잘했는지에 대한 비평이 없다. 애초에 내가 그런 비평을 자격 자체가 없다. 글은, 사건을 통해서 극단이 아니라 훨씬 인접해 있는 구도의 대립이 지니는 특성을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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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뫼비우스의 띠


우선, 사건 자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독자들을 위한 추가정보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다. 딴지 자게에 초기 내용이 캡쳐된 게시물이 있으니 일단 링크를 남긴다.


(링크 - 1) / (링크 - 2)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단순하다. 누군가가 유아인을 언급한 트윗을 썼다. 트윗에는 멘션도 태그도 없다. 아마도 검색을 통해 유아인은 트윗을 봤고, 멘션을 날린다. 이에 대해 다른 트위터러들이, 주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비난 멘션을 보낸다. 이들과 한판 멘션타래가 벌어지는 게 사건의 시작.


여기서 일이 확장되는 지점은,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직접 언급하면서이다. ‘이즘'으로 끝나는 말은 어디가서 해도 원래 논쟁이 길어지는 . 상황에서의 페미니즘 언급도 당연히 절차를 밟는다. 이로 인해 사건은 소셜미디어가 아닌공식적미디어에 본격적으로 오르내린다. 그리고 익명의 사용자들이 아닌,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사람들의 언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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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 링크


유아인은 이런 언급에 자신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상당수 직접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그의 편에서는빛아인 장군이라며 칭송을, 상대편에서는제발 그만 하라 그래라는 냉소를 보낸다. 공식적인 미디어를 타기 시작하다보니, 사건은 본질과는 별개로 하나의가십 되면서 스포츠 연예 뉴스란에 오르기 시작한다. 늘상 그런 언론이 그러하듯, 자극적인소송’, ‘명예훼손등의 단어가 오르내린다.


이미 가십으로 받아들여진 이후의 논란은 별로 논할 가치가 없다. 가십이란 건 그렇듯, 언론권력의 조회수 늘리기 생존전략의 울타리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조회수나 댓글 내용이 본래의 대립구도와는 멀어진다. 첨예한 대립의 본질이 담긴 부분은, 유아인의 멘션에 대한 비판 메션이 시작된 시점부터 공식 매체의 언급이 시작되던 순간까지다.


이렇게 시간구간을 줄이는 이외에도, 주제를 좁힐 필요가 있다. 사건은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개입하는 대립 상황이다. 수식과 기호로 논쟁하는 양자역학 논쟁과는 다르다. 그마저도 조선시대 선비들간의 필담처럼 호흡이 느린 것이 아니라 짧게는 수십 초, 길어봐야 수 시간 내에 쓰인 글이 오고 갔다. 각각의 무수히 많은 글들은 수많은 오류들을 담고 있을 밖에 없다. 그러므로, 각각의 글들이 지니는 문제점들은 끝없이 캐낼 있고 모든 문제들이 같은 무게로 다뤄져서는 논쟁의 블랙홀에 빠진다. 문제들을 지적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낳고, 또한 다른 누군가가 보기엔 문제점을 지닐 것이며, 그렇게문제가 있는 대해 비판하는문제있는 다른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며 무한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추려내보자. 대립이 이다지도 화제가 있었으며, 중립의 여지가 거의 없이 첨예하도록 만든 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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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래된 떡밥과 '첨예'를 만드는 기점  


성차별 문제와 함께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하나의 차별은 인종 차별이라고 있겠다. , 미디어를 통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 차별이다. 흑인 노예제는인종 기준으로 매우 명확하게 계급을 구분한 사례이자,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 전체에서 벌어진 가장 노골적인 인종차별이었다. 이렇게 노골적이고도 명확한 차별을 놓고, 미국사회는 200 가까이 대립을 이어왔다. 인종 차별의 예를 드는 이유는, 미안한 말이지만 태평양 건너 한반도에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젠더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당사자임이 명백하지만, 흑인 차별의 문제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우겨볼 구석이 있다. 그래서, 약간은 주관을 덜어낼 있다.


흑인 차별 문제에 대한 논쟁의 오래된 단골 떡밥이 있다. 그건 바로 흑인이 아닌 사람은 노래 가사 nigger라는 단어를 따라불러서는 안 되는가이다. 일반적으로 현대 미국사회에서 타인종 사람이 흑인 앞에서 ‘nigger’라는 단어를 말하는 건 심각한 차별적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단어를 언급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the N-word라며 ‘N으로 시작하는 단어라는 식으로 돌려말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단어는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아주 친근한 호칭으로 사용된다. 집단의 내부에서는 친근함의 표시이지만 외부인에게는 금지된 단어인 셈이다.


문제는, 흑인 뮤지션이 만든 히트곡의 가사에 단어가 들어간 경우, 다른 인종 사람이 노래를 부를 때에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보기엔 그냥 부분을 안 부르면 일이고, 다른 어떤 사람이 때는 원래 있는 노래 가사를 갖고 뭐라 하는 건 너무해 보인다. 실제로 많은 드라마나 영화, 실제 상황에서 이런 논쟁은 벌어진다. 넷플릭스 드라마친애하는 백인 여러분(Dear White People)’ 내용 중에는, 상황이 극도로 심화되어 경찰까지 출동하는 갈등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https://youtu.be/XSyVLIIkfIs


장면에서 하우스 파티 중에 백인이 가사에 niggas 들어가는 곡을 따라부른다. 백인은 나름대로 흑인 차별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닌, 말하자면 스스로를 백인 우월주의자로 보지 않는 캐릭터다. 그가 가사 속의 niggas 따라부르는 모습을 보고, 흑인 친구가 말은 하지마라고 다소 냉랭하게 얘기한다. 백인 친구는노래 따라 부른 거 하나로 나를 백인 우월주의자 취급하냐 서운해하고, 흑인 친구는노래든 뭐든 듣기 싫으니 하지 말라 강하게 말한다.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누군가가 싸움을 방지하려 경찰을 불렀지만, 백인 경찰에 대해 흑인이 다소 반항적인 대응을 하자 결국 경찰이 총까지 꺼내게 되는 상황.


여기서, ‘누가 잘못했냐 따지기 시작하면 역시 논쟁의 블랙홀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예를 이유는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로, 대립 역시 중립의 여지가 매우 좁으며 그만큼 대립이 첨예하다는 . 둘째로, 그런 첨예한 대립을 핵심단어 하나로 상징할 있다는 점이다. 백인 친구의 태도, 흑인 친구의 태도, 둘이 말의 오류나 행동의 과잉성, 모두 부차적이다. 상황에서 튀어나온 nigger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대립에 장면 전체의 대립이 응축돼 있다.


첫 번째 특징은 글의 원래 주제인 사건과 공통점이 된다. 그렇다면, 두 번째 특징도 그렇지 않을까? 맞다면, 우리의 사건에서 핵심단어는 뭘까.


애호박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애초에 애호박은 어떤 목적으로 쓰인 단어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항간에는 애호박이라는 단어 선택의 목적에 대한 추측과 주장과 분석이 있지만 대립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사건의 발발, 그러니까 애초에 대립이 시작되게 가장 처음의 핵심 단어는 ‘맞아봤음?’이다. 바로 말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최소한 언짢음, 심하면 분노, 크게는 부조리까지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유아인에게 비판 비난 멘션을 날리기 시작한다. 다른 한편, 유아인 본인이 가장 어이없어 것이 바로 표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이다. 상황에서 튀어나온 자체에 대한 대립이, 사건 전체의 대립 매우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그리고 다른 축이 있다. 하룻밤 새의 트위터 헤프닝에서, 언론사들이 뛰어들게 국면 전환을 만든 . 바로페미니즘’, 또는페미니스트. 이번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칼기사들의 대부분은 단어를 제목에 넣는다. 그리고 단어에 대한 유아인 유아인 편의 사람들과 반대편의 사람들은 확실히 다른 시선을 지닌다. 말하자면, 편이 보기에 유아인은 페미니스트고 그가 말한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맞다는 것이다. 다른 편이 보기에 유아인은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그가 말한 건 페미니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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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들이 사건의 대립 구도를 응축한 핵심 단어들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를 이용해 내용을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할 있다.


‘~~~ 맞아봤음?’이라는 말에 대해 젠더 폭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하는 것을 어떻게 것인가.


유아인과 그의 편에 가까운 사람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반대편에 사람들은, 말로만 페미니스트고 실제로는 젠더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의 전형이라 생각한다. 중간 지대는 매우 좁다. 편이 보기에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지전혀 문제 없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다른 편이 보기에조금 이상하긴 하네완전 한남이지 같은 편에 서게 된다. 이렇게 중간지대가 좁으면, 질문에 대한 대답만으로 아주 명료하게 사람을 한 편에 귀속시킬 있다대답을 회피하거나 모호하게 하거나 양쪽 모두 이해하거나 모두 이해 안 간다면, 대답을 들은 사람과 반대편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중간지대가 좁다보니, 타협의 여지도 적다. , 편이 보기에 자신들이 명백히 옳으므로 다른 편은 그냥틀렸다’. 이는 단순히 다름과 틀림을 헷갈리는 게 아니라, 사고과정 끝에 틀렸다는 결론을 내는 것이다. 유아인이 보기에는 질문에그래선 안 된다 보는 상대방의 페미니즘은 너무 편협하고 증오에 가득하다. 시각은 현재 오유, 불펜, 여기 딴지의 자게 커뮤니티 사용자들의 다수가 지니는 생각이다. 그들 일부는꼴페미’, ‘메갈충’, ‘메웜충등의 모욕적 단어를 사용해서 상대편을 지칭한다. 남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 사용자들 중에서도 이에 공감하거나 동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부 여성위주 커뮤니티도 자극적인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단순히 생물학적 성별의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들이 보기에 상대편의 페미니즘은틀린 페미니즘’, 또는페미니즘이 아닌 남성혐오.


상대편이 보기에 질문은 너무도 명백하게그래선 안 된다 대답해야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그럴 있다거나전혀 문제 없다 대답을 하는 사람들의 생각은틀린생각이다. 트위터를 통한 네트워크로 소통하는 페미니스트들 수가 적지 않은 일부 워마드 등의 커뮤니티 사용자들은, 자신들에게 모욕적 호칭을 쓰는 상대방에게한남충’, ‘명예자지등의 모욕적 호칭을 사용한다. 이들에게 있어, 상대방이 주장하는 페미니즘은틀린페미니즘이며여성혐오 범주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고방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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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여기까지의 내용들만 해도, 글의 댓글에는 수많은 반박과 비판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필 글쓴이가 춘심애비이니 이를 활용한 창의적인 비판도 예상된다. 그런 만큼, 대립은 중간지대가 좁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앞서 밝혔듯, 이들의 의견들 어느쪽이 타당한지를 파고들 생각은 전혀 없다. 대립의 한가운데까지 내려왔으니, 이제 방향을 바꿔보자.



4. 경계 자체가 없어지는 수밖에 없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친애하는 백인 여러분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장면에서 niggas 가사를 따라부른 백인 친구가, 나름대로 흑인 차별에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이 아닌 상황을 생각해보자. 트럼프의 20대시절 같은 이미지에, 전형적인 백인 우월주의에 찌들어 있고, 지금이라도 노예제를 부활시키거나 흑인들을 추방해야한다고 생각하며, KKK 온라인 후원자인 대학생을 대입해 본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장면에서의 대립은 어떻게 변화할까. 강렬해질까.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저런 방식의 대립이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가사를 따라한려면 최소한 그는 노래를 알아야 하고, 평소에 들어야한다. 하지만 뼛속까지 백인 우월주의자인 미국의 백인은 Future라는 흑인 뮤지션의 음악도, 더욱이 제목이 ‘Trap Niggas’ 노래는 더더욱 듣지 않는다. 저런 음악이 나올법한 파티에 가지 않을 뿐더러, 혹시 갔다 하더라도 깽판을 치고 시비를 걸지 저렇게 흑인 친구의 옆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 아예 저런 상황이 생길 여지가 없다. 혹시라도 저런 파티에 섞여 논다 한들 그가 niggas 부르는 방식은 다르다. 전혀 모르는 가사 가운데 단어가 들려오자, 그저 흑인 차별적 행동의 일환으로 단어를 말한 , 노래를 따라 불렀다고 둘러댈 것이다. 이런 상황은 저런 첨예한 대립이 아닌, 누가봐도 잘잘못이 명백한 결과만을 낳는다.


유아인 대신 홍준표를 대입해도 결과는 비슷하다. 일단애호박으로 맞아봤음?’ 수준의 내용도 아니었겠으므로 애초에 젠더 문제가 아니라 그저 홍준표의 트위터 삽질로 끝났을 거다. 혹여나 발언까지 했다고 가정을 하더라도, 그가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할 리도 만무하고, 혹시 그랬다 해도 그에 동의할 사람은 없다. , 이런 첨예한 대립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


동어 반복이지만, 거리가 멀면, 대립은 첨예하지 않다. 이렇게 중간지대가 없는 첨예한 대립은 둘 간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발생한다. 바로 점이, 당사자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드라마의 백인 친구 입장에서나는 그런 백인 우월주의자가 아닌데 그렇게 취급하는 거냐라고 반문하는 바로 지점이다같은 지점에서 흑인 친구는피해자인 우리가 듣기 싫다는 , 그게 중요한 거라는데 나를 역차별주의자로 몰려 하느냐라고 외친다. 이런 첨예한 갈등은 중간지대가 좁기 때문에 뻔한 양극단의 대립보다 강렬하고, 그로 인해 양측은 상대가 자신을 오해하는 데에 답답해 하거나 또는 악의적으로 왜곡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오랜 시간 누적된다. 그래서, 갈등은 더욱 강렬해지며 타협의 여지는 더더욱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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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든 갈등과 대립이 결국 우리 서로가 가깝다는 증거이니까 사랑과 이해로 극복해나가자는 동화적 결말을 기대할 있을까. 그렇지 않다. 경계는 영화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썩은 지뢰를 밟은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판문점에 그어진 바로 경계선이다. 서로가 각자의 입장에서 있는 만큼 최대한 나아가 있는 바로 지점을 경계로 한다. 선을 넘나들 있는 사람은, 이미 넘나들고 있다. 언젠가 넘나들 사람들이 아직 넘지 못하고 있는 케이스는 극도로 적은 숫자일 뿐이다. 적은 숫자에 비해, 경계의 반대 쪽으로는 양방향 모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게다가 경계는 단순히 사회의 평등의 경계 아니다. 사회에서 평등과 차별의 경계를 묻는 설문을 전국민에게 해서 평균을 낸다면 결과는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경계선과 매우 멀리 떨어져있다. 그렇다고 이상적인 성평등 사회의 경계도 아니다. 그건 반대쪽으로 멀리에 있다. 경계는 질문으로 인해 형성된 어떤 일시적인 경계이고, 이에 직접적으로 개입된 사람은 소수일 뿐이다.


그러므로 대립은, 그저 평범한 선의로 사라질 없다. 근본적으로 대립을 없애려면 경계 자체가 없어지는 수밖에 없다.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면, 완전한 평등이 이뤄진다는 극도로 이상적인 결말또는, 젠더가 나머지를 완전히 억압하고 압도하는 극도로 비극적인 결말 뿐이다. 기적적으로 화해와 타협을 이뤄낸 경계가 한쪽으로 조금 이동할 뿐이고, 새로운 경계에서 이와 같은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반복된다.


하지만, 피로하고 지난한 대립은 분명한기능 지니며, 기능은 역사적인가치 지닌다. 마지막으로 한 번 드라마의 예를 든다면, 노래 가사 nigger 논쟁은 결국흑인이 아닌 사람은 노래 가사든 광고 카피든 영화 대사든 뭐든 간에,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흑인 앞에서 단어를 입에 담지 않는다 일종의 합의를 이뤄가는 중이라고 있다. 오랜 논쟁 끝에 타인종 사이에서도 백인이 저렇게 생각하는지 이해는 가지만 결론적으로 안 그러는 게 좋은 거야라는 식의 합의를 이뤄가고 있는 셈이다. 근거는 다양할 있다. 논리를 떠나 그냥 싸움을 피하자는 이유부터, 오랜 시간 핍박받은 이들에 대한 예의라는 이유 등등. 최소한 그런 합의는, 노래 가사를 따라부르는 괜찮다고 생각할 흑인에게도, 절대 차별적이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라면, 경계가 조금 이동한 것이다. 이동의 과정은타인종흑인사회 대한 논의와 고민, 그리고 합의를 찾아가는 과정을 요구한다. 과정은 역사적으로인종차별 타파해가는 과정의 일부로써 분명한 가치를 지닌다.


사건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페미니즘 갖는 어떤 경계선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했다. 어떤 표현은 오랜 시간의 남성우월적 사고가 내포된 것인가 아니면 중립적 표현인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거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들 저런 주제에 대한 의견이 갈릴 경우, 페미니즘페미니스트 경계는 어디에 위치하는 것으로 것인가. 내가 페미니스트임이 확실하다면, 문제에 있어 나와 의견이 다른 이도 페미니스트인가 아닌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건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그저 가십 하나로 쉽게 읽고 버릴 것이다. 절대 다수는 아직 경계로부터 너무 멀리 있다. 하지만 지금 시각에도 어딘가에서는 어떤 젠더 조합이든 문제에 대한 논쟁을 벌일 거다. 소수의 논쟁 소수의 일부 논쟁에서는 경계선이 이동한 어떤 새로운 합의점이 생길 것이다. 합의점이 많은 이들에게 타당하다고 인정된다면 점차 다른 논쟁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점차 전체 경계선은 새로운 합의점으로 이동하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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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합의점은 때때로 역사적 퇴보로 평가되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과정에서 권력이 남용되거나 폭력이 행사될지도 모른다. 혹여 역사적 진보로 평가되더라도, 어느 경우든 과정은 많은 이들을 피로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바로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분들 대부분이 불편하고 답답한 처럼, 많은 사람들이 과정 자체가 너무도 괴로운 처럼. 과정에서 불현듯 한몸 먹고 살기도 힘든데라는 생각이 들며 모든 과정을 스킵하고 싶은 욕망은 언제나 가득 차 있게 된다.


욕망이 이기는 순간, 어떤 경계선도 움직이지 않는다. 욕망을 참아내고 대립과 논쟁에 참여하는 이들이 경계선을 밀고 당긴다.  분명 이들의 동기가 그저 잘난척을 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단순히 키보드 워리어적 전투기질의 표출일 수도, 어그로를 즐기는 가학적 취향일 수도 있다. 반대로 페미니즘에 인생을 걸었기 때문일 수도,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차별과 억압이 없는 이상을 꿈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가치와 의의와는 별개로, 이들이 밀고 당기는 힘이 경계를 움직인다.


결국유아인도 억울한 면과 잘못한 면이 있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며, 누가 잘못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사랑과 평화와 공존이라고 선문답을 하는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분명 어느쪽에서라도 반박이나 비판, 또는 비난을 게다. 그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을거고, 재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어쩌면 나와 같은 의견을 지닌 이들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나도 필요하다면 재반박을 할 거고, 비난을 받아칠 거고, 비아냥 거릴 수도, 감정을 못 이겨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해서 어떤 이들은 상처를 받을 수도, 참을 없는 부조리에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고, 이를 즐기는 악의적인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잘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은 속속들이 뜯어보면 잘못하고 있는 비중이 높을 거다. 잘못들을 옹호할 생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다만 잘못들은 경계를 형성하는 핵심 대립과는 별개의 문제다. 관련된 모든 글과 말은 다듬어질 여지가 있고, 도처에 들난 날선 감정은 순화될 필요가 있겠지만, 그것들은 경계를 직접 밀고 당기는 요소와 거리가 멀다. 경계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은, 핵심 질문에 대한 대답을 뱉어내고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자체다.


그저 경계가 첨예하게 밀고 당겨지는 과정을 함께 하고 싶다. 애초에 어느 편에 서 있든 경계에 가깝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과 답답함과 부조리를 느끼는 사람들끼리 말이다. 경계가 외면된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에 모든 힘든 과정을 감내하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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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