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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엽, 타임지는 20세기 전반 50년의 인물로 윈스턴 처칠을 꼽은 바 있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유럽이 나찌의 탱크에 짓밟힌 가운데 영국을 이끌며 불굴의 의지를 과시했던 윈스턴 처칠. 


“우리는 해변에서도 싸울 것이고, 싸울 것이고, 들판에서도 싸울 것이고, 길에서도 싸울 것이고,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부르짖으며 대영제국 국민들의 투쟁심을 드높인 정치가. (이 사람이 이라크에서나 벵골 지역에서 저지른 만행도 함께 기억해야 할 일이다만) 그는 정치적으로는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이었고 당시 영국 정치인으로서는 일종의 금기라 할 당적 변경도 서슴지 않았어. 그러다보니 일화도 많지. 그 중의 하나가 여성 의원과의 가시 돋친 그러나 격조 있는 독설 교환이야. 여성 의원은 처칠에게 독살스럽게 쏘아붙였다. 


“당신이 내 남편이라면 커피에 독을 타서 확 독살해 버리고 싶네요.”


보통 사람 같으면 거품을 물어도 여러 번 물고 펄펄 뛰어도 천정에 머리가 닿을 망언(妄言)이었지. 하지만 처칠은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응수한단다.
 

“당신이 내 아내라면 기꺼이 그 독을 마시고 말지요.” 


서설이 길었구나.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대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아니라 그에게 기죽지 않고 대들던 여성의원이야. 낸시 애스터라는 사람이지. 그녀는 1919년 11월 28일 하원의원 선거에서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당선된 여성 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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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애스터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처칠은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몰라. 처칠의 어머니도 미국 태생이었으니까.) 1897년 결혼했지만 얼마 못가 이혼한 뒤 윌도프 애스터라는 사람과 재혼하면서 애스터의 성을 얻는데 이 애스터라는 가문은 미국과 영국 양쪽에 유명한 집안이었어.

 
 1914년 침몰한 호화여객선 타이타닉에 탄 이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 중의 하나였으며, 구명보트 타기를 거부하고 신사로서 죽음을 맞이한 제이콥 애스터는 애스터 가문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였고 낸시 애스터의 남편 윌도프는 그 집안 후손이었어. 윌도프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일군 부를 들고 영국으로 다시 건너가서 자작 자위를 받았고 윌도프는 그 후광으로 하원 의원이 되는데 낸시 애스터는 그 충실한 내조자가 되지.
 
영국의 여성 참정권 투쟁 역사는 매우 치열했어. “Votes for Women!" 여성에게 보통 선거권을 줄 것을 요구하며 영국 여성들은 열렬한 투쟁을 전개했지. 낸시 애스터가 재혼하던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합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이 창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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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정부가 “재산이 있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약속했다가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렸을 때 WSPU 지도자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그 동지들은 분노했고 이를 행동으로 표출하지. 영국 피카딜리 광장 등 중심가의 모든 상점과 건물의 유리창이 박살날 만큼의 과격한 시위였어. 그 뿐 아니라 어떤 이들은 건물에 불을 질렀고 버킹엄 궁전 난간에 몸을 묶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어.
 
정부는 당연히 수백 명의 여성들을 감옥으로 보냈어. 그러자 여성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지. 그러자 정부는 그 입을 벌리고 강제로 음식물을 흘려 넣는 강제 급식을 실시했고,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지면 풀어줬다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잡아넣는 법까지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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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출신의 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한창 진행되던 경마장에 들어가 국왕 소유의 말을 막아서고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 부르짖다가 밟혀 죽은 것은 그 모든 부당한 억압과 질곡에 대한 저항의 절정이었다(이건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책에도 나온다). 심지어 귀족 여성들이 노동자 복장으로 시위에 참가했다가 몸을 상하는 일도 있었지. 쉰을 훌쩍 넘긴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 투쟁의 중심에 있었고 열 두 번이나 되는 단식투쟁을 벌이며 ”Vote for Woman!"을 부르짖었지.

  

“우리들 여성 참정권운동가들은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임무일 것이다. 그 임무란, 바로 인류의 절반을 해방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을 통해서 인류의 나머지 절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 난리굿판을 치르고, 또 전쟁까지 겪은 후에야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 그리고 21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보통 선거권이 주어져. 그런데 왜 30세일까. 이유는 “전쟁에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동일하게 선거권이 주어지면 여성 유권자가 더 많아진다.”는 것이었어. 즉 '멍청한' 여자 유권자가 더 많아지면 곤란하다는 참으로 천박한 기우였지.
 
1919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족 작위를 승계하게 된 낸시 애스터의 남편은 하원 의원 직위를 내놓아야 했는데 이때 아내에게 자신의 지역구 플리머스를 넘긴다. 보수당 후보로 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려한 귀족 복장을 벗어 던지고 하층 여성들이 흔히 입는 검은색 일색의 치마와 흰색 상의 차림을 한 것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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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토리 전통의 민주주의를 지키자"고 외쳤다. 선거 결과는 훌륭했어. 상대였던 남자 후보 두 명의 합계보다 무려 1,004표나 더 얻은 완승이었지. 물론 여성 유권자들의 몰표에 힘입은 바 컸다. 그녀는 이렇게 환호했다. "최고의 남성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정책이 승리할 뿐이다."

 

그녀는 그로부터 무려 26년 동안 플리머스 선거구를 지키며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게 돼. 그녀는 최초의 여성 의원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활발하고 유능한 의정 활동으로도 유명했단다. 그녀가 힘을 기울인 것 중의 하나는 하층민 노동자들에게 큰 문제가 됐던 알콜의 억제였어. 애스터는 1923년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알콜음료 판매를 제한하는 금주법을 통과시켰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미성년자에 대한 알콜 판매 금지의 원조가 바로 낸시 애스터인 셈이야.
 
주류를 판매하는 도매상들의 실태를 점검하고 그들의 횡포를 근절하고자 했던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또 졸업 연령을 늦추는 진보적 교육법안을 주창했고 그 밖의 진보적 교육 정책을 입안하기도 했다. 그녀의 면모는 그녀가 즐겨 사용한 격언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기를 원하는 사람이거나 아무 것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The main dangers in this life are the people who want to change everything or nothing.)


1919년 11월 28일 당시만 해도 세계를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하원에 여성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등장했어. 지금으로부터 98년 전이니 100년 전도 못되는구나.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여성들의 권리를 외치는 목소리는 있었고 그 치열함은 위에서 잠시 말한 바야. 그러나 치열함의 형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단다. 
 
광장 가게들 유리창을 깨고 불을 지르고 버킹검 궁전에 몸을 묶은 때도 있었지만 에멀린 팽크허스트를 비롯한 여성운동가들은 그보다 더 훨씬 긴 시간을 자신들의 뜻을 보다 넓게 확산시키기 위한 설득과 호소에 쏟았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도 아니고 유의미 무의미를 가릴 수도 없는 거야. 그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분위기에 맞게 더 효율적인 방식을 택하는 지혜가 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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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리창을 깨는 행위가 일종의 사회적 고발 행위였으나 그 용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건 억지고, 동시에 불의와 부당을 향한 항의가 ‘폭력’이나 기타 비도덕적 행위로 단죄되는 것은 외면이다. 바로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기를 원하는 사람’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되는 길 위에 서게 되는 거지. ‘세상의 위험’이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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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근육병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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