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00503870_20171127.JPG


풋풋함, 불안, 어설픔, 열정, 설레임. 어른도 청소년도 아닌 경계인. 다들 그렇게 시작했다. 그 시절 특성화(공고, 상고, 농고)고 3학년들의 첫 사회생활은. 나도 첫 사회생활을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23년이 흘렀다.

2016년 5월 28일 구의역 실습생 사망 사고에 이어 얼마 전 제주도에서 또 어이없는 사고로 실습생 한 명이 꽃다운 삶을 마감했다. 안타깝고 슬프다. 한편으론 현장 실습생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사고들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닐 텐데 새삼 이슈가 되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특성화고 졸업생들은 이 사회에서 항상 그림자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1993년의 어느 날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다시 만나던 날은 햇볕이 강렬했다. 취업 담담 선생님의 당부대로 나와 친구 세 명은 수원행 무궁화호의 좁은 화장실에서 검정색 실습복으로 갈아입었다. 앞서 취업을 나갔던 선배들처럼, 회사의 관리자와 선배들에게 현장실습을 성실하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회사는 우리의 기대만큼 크고 화려하지 않았다. 키가 작고 뱃살이 나오고 엄하게 생긴 관리과장이 두 명은 생산팀으로, 두 명은 완제품 창고로 가야 한다고 했다. 전자기기, 전자계산기, 무선설비 등 자격증을 세 개나 가지고 있던 나는 생산팀에서 달아오른 인두로 트랜지스터와 콘덴서를 PCB 기판에 납땜하고 싶었다.

IE002255066_STD.jpg
전자기기, 전자계산기, 무선설비 기능사 2급
구미전자 공업 고등학교 2학년에 취득한 기능사 2급 자격증이었다.

실습 첫날부터 일층 완제품 창고에서 20킬로가 넘는 완제품 박스를 5톤이나 트럭에 싣는 작업을 해야 했다. 먼지 가득한 완제품 창고엔 사무를 보는 누나와 서른이 넘은 노총각, 그리고 허리가 안 좋은 작달막한 오십대 아저씨가 전부였다. 박스에 테이핑을 하는 법부터 박스를 최대한 트럭에 많이 쌓는 법까지 학교에서 배운 건 없었다. 부산이나 인천항으로 보내는 수출품엔 20피트나 40피트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이 들어왔다. 물량이 많은 날은 한 사람이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을 다 채워야 했다. 취업을 나가면 박스를 날라야 한다던 선배들의 농담이 먼지 가득한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내겐 현실이 되었다.

회사는 출근 9시, 퇴근 시간은 6시였다. 주 5일 근무제였다. 하지만 제품을 제때 출하해야 하는 완제품(물류)팀의 특성상 9시까지 매일 야간작업을 해야 했다. 주말에도 격주로 출근을 해야 했다. 자재 조달 문제로 생산이 중단되거나, 제품 스펙이 바뀌거나, 발주사에서 추가 물량이 들어 오면 새벽 2, 3시까지 철야도 수없이 해야 했다. 특히 목표액 달성을 위해서 물량을 밀어내야 하는 월말이나 연말이 되면 하루에도 3, 4대분의 트럭과 콘테이너에 완제품(비디오폰, 인터폰)을 담은 박스를 실어야 했다.

현장 실습을 시작하고 일주일이 되던 날 아침, 쌍코피가 터졌다.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다세대주택 지하) 화장실이었다. 관리과장은 생산팀으로 보내 달라던 우리의 간절한 요청에 3개월만 버티면 생산팀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6개월이 더 지나서야 나는 생산팀(교환대 라인)으로, 내 친구는 자삽팀(외주관리계)으로 옮길 수 있었다.


2017년의 어느 날

스크린샷 2017-12-06 오후 4.48.38.png

잇단 특성화고 실습생 사고로 당국은 현장실습을 폐지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 중요하게 다뤄야 할 게 있다. 특성화고를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이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1993년보다 더 나빠졌다.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대학을 갈 생각이 없었다. 공고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열심히 일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함께 실습을 나왔던 친구들은 하나 둘 회사를 그만두고 전문대/대학교를 들어갔다. 회사에서도 후임들이 대학(전문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좋은 부서로 가거나 반장이나 주임이 되었다. 하는 일도 달랐고 급여도 차이가 났다. 나는 26살에 늦깍이 대학생(방송대학교)이 되었다.

내가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가는 사람들의 정체성(혹은 사회적 계급)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먼지 가득한 완제품 창고에서 20킬로가 넘는 박스를 나르고, 전동 드라이버로 케이스에 나사를 조립하고, 완제품에 합격/불합격 딱지를 붙일 때는 내가 몇 학번인지를 외울 필요가 없었다. 물어보는 사람들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를 넘어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마침내 그곳으로 나갔을 때, 잊고 있던 학번은 종종 나를 증명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거나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이름이나 출신지역만큼 서로의 학번을 묻고 답했다. 그들에게 학번은 나이였고 선/후배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잘 먹고 잘산다는 OECD 회원국이지만, 우리가 잘 먹고 잘사는지는 모르겠다. 왜일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한때 나를 위축시켰던 그 사회적 시선과 기준들이 이제는 나도 모르게 타인을 향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입는 옷과 타는 차와 먹는 음식을 통해서.

'잘 사는 것'을 가르는 기준은 비단 경제적 풍요가 다는 아닐 것이다. 나는 중산층인가? 사는 지역, 아파트 평수, 자통차 배기량이 중산층의 기준이 되는 사회보다는 악기를 연주하고 책을 읽고 약자를 위한 기부를 얼마나 하는가가 중산층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고 장애인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사회,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의 구분과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 힘든 노동이 경시되는 사회는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해도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나아지려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부터 달라져야 한다.



E60B3EF8-D5DB-4E1B-B63D-C21CE709BE20_cx0_cy11_cw0_w1023_r1_s.jpg




편집부 주


위 글은 독자투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딴지일보는 삼진아웃 제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바,

톡자투고 및 자유게시판(그 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3번 마빡에 올라가면 필진으로 자동 등록됩니다.






독자투고 나무그늘75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