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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이 턱 밑까지 다가오던 그 순간까지 일본은 소련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시 말하지만, 믿고 싶은 것만 믿은 거였다. 당시 일본 대본영(大本營)에서 소련이 향후 취할 노선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 평화 아니면 전쟁이었다. 각각의 가능성에 대해 대본영은 가능성을 저울질 했다.


첫째, 평화의 가능성.

소련이 대(對)일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다. 이 판단의 근거는 전후 소련의 세계정책이다. 서방세계에 포위된 상황에서 일본과 전쟁을 한다면, 일본을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다.


둘째, 전쟁의 가능성.

이 경우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으면서, 일본을 속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누가 봐도 두 번째 가능성이 합리적이다. 설사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전쟁을 대비하고, 실행하는 집단이라면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는 게 당연하다. 국가 안보 혹은 국가의 전략적 판단이 요구되는 외교에서는 ‘절대’라는 말을 쓸 수 없다. 0.1%의 가능성이라도 대비해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나라이다. 그러나 대본영의 생각은 달랐다.


“스탈린의 현명함을 기대한다.”


스탈린이 생각이 있는 지도자라면, 향후 정세를 고려해 일본과의 무모한 전쟁은 일으키지 않을 것이란 판단. 아니, 기대였다.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 아니면,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 아니다. 한 없이 절망에 가까운 희망이며,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물론, 대본영의 판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더라도, 평화협상을 하더라도 소련이 없다면 모든 전략적 판단이 어그러져 버린다(당시 일본 전쟁지도부의 판단으로). 쉽게 말해 ‘패망’이다. 결국 소련이 등을 돌렸을 때의 가능성을 지워버리고, 소련에 매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소련과 일본 ②


일본의 패망이 코 앞으로 다가온 그 때 총리가 된  스즈키 칸타로(鈴木貫太郎). 만약 그가 조금만 젊었다면, 아니 조금만 더 패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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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의 문제였을까? 그는 휘둘렸다. 4개월 남짓한 총리 재임기간 동안 그는 ‘종전’에 대한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 방법론과 실행의지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민망했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의 의견을 좇아 소련에게 평화협상의 중재를 부탁한다는 계획에 찬성했다. 그 덕분에 귀중한 4개월을 덧없이 흘려보내야 했다. 물론, 당시 일본의 상황을 본다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모두 소련에 목매달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내각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아주든가, 하다못해 의견 조율을 하는 운영의 묘를 보였어야 했다(이 엄중한 상황에서). 그러나 스즈키는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자기 의견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포츠담 선언과 뒤이은 원자폭탄의 투하 앞에서 스즈키 내각은 끝까지 본토결전을 주장한 육군장관 이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와 평화 종전을 주장한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외무장관의 대립으로 붕괴 직전까지 갔었다. 이 상황에 몰렸음에도 스즈키는 제대로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도 억지로 이해하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의 ‘묵살’ 발언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비록 번역상의 오해라 하지만, 그의 발언 하나 때문에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아야 했다(후술하겠지만, 어이가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각을 제대로 컨트롤 하는 건 고사하고, 주변에 휘둘리다 4개월을 날려버린 거다. 총체적 난국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나서서 권력을 컨트롤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의견조율 없이 저마다 중구난방으로 떠들게 된다.


이때 나선 이가 덴노의 최측근이던 궁내대신(宮內大臣) 기도 고이치(木戸 幸一)였다. 권력의 공백 상태. 내각은 겉돌고 있었고, 육군은 본토결전을, 해군과 문관들은 화평을 말하던 그때 기도는 히로히토의 결단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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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노께서 어용단(御勇斷)을 내어 전국을 수습해 달라.”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때 기도가 내놓은 수습책은 덴노가 군부를 통제하면, 그 사이 국체를 견지하는 ‘명예의 강화’를 시도하는 거였다. 끝까지 천황제는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이때도 소련이 등장한다. 기도 역시 소련을 중개자로 선택했다.


“중립국인 소련에 중개를 맡기는 것이 교섭상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당연히 육군은 반발했지만, 히로히토는 기도의 의견을 채택했다. 이때가 1945년 6월 8일이었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이 당시 소련 대신 미국을 선택해 강화 협상을 벌였다면 일본에게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최소한 원자폭탄은 맞지 않았다). 이 시기 미국은 일본과의 종전을 위해 ‘무조건 항복’이 아닌 다른 협상안을 고민하던 때였다.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은 처음부터 배제하고 소련 하나만을 유일한 협상 파트너로 봤다. 일본의 오판이었다.


어쨌든 소련을 통한 종전협상이 히로히토에 의해 결정되자 외교채널이 바쁘게 돌아갔다. 일본주재 소련대사 말릭(Jakob Malik)을 찾아가 ‘읍소’를 하게 된다.


소련이 석유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일본의 어업권을 포기할 것이라며 협상안을 비롯해 ‘만주 중립화’ 등등의 여러 카드를 던졌다. 이에 더해 앞으로 다른 사항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이 많다며 소련에게 여러 ‘제안’들을 던졌다. 그러나 말릭은 냉담했다. 전(前) 총리이자 외교관이었던 히로타 고키(廣田弘毅)가 끈질기게 말릭에게 매달렸지만, 말릭은 4번 정도 회담을 가진 뒤 병을 핑계로 만남을 피했다.


이때 말릭은 본국의 명령을 받았다. 최대한 접촉을 피하라고 말이다.


일본은 점점 조급해 졌다. 믿었던 소련이 미온적으로 나왔고, 급기야 오키나와까지 함락됐다. 이대로 가다간 종전협상을 하기 전에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들려오는 연합국 소식은 더욱 더 암담하기만 했다.


7월 3일 중국의 행정원장(行政院長) 쑹쯔원(宋子文)이 모스크바로 날아가 소련 수뇌부와 회담을 가졌다. 이는 트루먼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인 홉킨스가 모스크바로 건너갔을 때 스탈린이 요구했던 회담이었다.


7월 중순에는 연합국 전쟁지도부가 다시 한 번 대규모 회담을 가진다는 정보도 연달아 들어왔다. 독일이 패망한 직후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가 모인다면 어떤 이야기가 오고갈까? 필시 일본에게는 좋은 내용일리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히로히토는 다급해졌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게 된다. 특사를 모스크바로 보내 소련과 직접 교섭에 나선다는 거였다.


일본 주재 소련대사가 회담을 피한다면, 소련으로 날아가 몰로토프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는 거다. 이때 특사로 선정된 이가 바로 고노에 후미마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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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는 이때 1941년 12월에 준비했던 루즈벨트와의 회담을 떠올렸다. 이때도 주변의 방해 때문에 회담은 불발이 됐다. 아직 육군이 본토결전을 말하는 상황에서 회담의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때 고노에는 하나의 계획을 세운다.


'몰로토프와 비밀리에 평화협정의 조건을 합의한다. 그 후에 덴노에게 연락해 이를 칙령으로 발표한다. 칙령이 발표된 이상 육군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비장한 각오였다. 그러나 이런 비장한 각오를 보여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고노에에게 돌아온 건 ‘희망고문’이었다.


소련 주재 일본 대사였던 사토 나오다케를 통해 전해 온 메시지는,


“몰로토프가 너무 바빠서 고노에를 만날 수 없다.”


라는 ‘뻔히 보이는’ 통보였다. 만약 특사를 거절했다면, 일본은 그 희망을 완전히 버렸겠지만 당시 소련은 특사를 거절하는 것도,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소련이 대(對)일전에 참전해야 한다.”


라는 지상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소련 외교가는 곧 맞이할 포츠담 회담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었다. 그 와중에 찾아온 일본 특사가 반가울 리 없었다.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는 게 만약 일본이 소련의 속내를 눈치 챈다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항복을 할 수도 있기에 완전히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일본은 유리한 입장에서 ‘항복’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미국과 일본


1945년 6월의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인 갤럽은 전쟁 후 ‘덴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 당시 미국인들의 여론은 극단적이었다(당연하겠지만).


1) 살해하거나, 고통을 주어서 아사시킨다 : 36%

2) 처벌하거나 국외로 추방한다 : 24%

3)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가 되면 처벌한다 : 10%

4) 전범으로 처리한다 : 7%

5) 불문에 붙인다. 상급 군사지도자에게만 책임을 묻는다 : 4%

6) 꼭두각시로 이용한다 : 3%


미국 국민들은 덴노를 증오했다. 아니면, 그게 이상했다. 이런 극단적인 여론 앞에서 미국 전쟁지도부는 일본에 대한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게 된다. 이는 여론조사가 있기 전부터 감지되던 기류였다. 이 당시 전쟁지도부 뿐만 아니라, 민간인, 전쟁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민간인(종군기자)들도 조기종전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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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호주의 종군기자 25명은 적어도 1946년 6월까지 전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다(25명 모두가 말이다!). 미국 국방부의 생각은 좀 더 비관적이었는데,


“일본 본토를 점령하더라도 중국대륙과 동남아시아에 있는 일본군들은 계속 저항할 지도 모른다.”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비상식적 행동’들을 보면, 현실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미국도 ‘종전’을 원했다. 그리고 종전을 할 수 있다면 일본에게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서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국무차관이었던 조셉 그루(Joseph C. Grew)와 육군성 차관보인 존 맥클로이(John J. Mccloy) 같은 자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본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던 조셉 그루는 일본인에게 ‘덴노’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일본 군부와 덴노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덴노의 재위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하면, 일본은 더 빨리, 그리고 더 쉽게 항복할 것이다.”


존 맥클로이는 좀 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천황제의 유지와 덴노의 재위를 인정한다는 제안을 하고, 그 제안을 일본이 거절한다면 그때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물론, 트루먼은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덴노의 재위를 인정한다면, 일본의 항복을 좀 더 쉽고, 빨리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의견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이건 군부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육군장관 스팀슨(Henry Stimson)과 해군장관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이 나서서 이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특히나 스팀슨은 포츠담 회담을 떠나는 트루먼에게 일본의 항복 조건에 ‘천황제 유지’를 인정하는 걸 명기하자고까지 말했다.


그들도 전쟁이 지긋지긋했던 거다.


그러나 이런 의견이 정책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여론’이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미국 국민들의 여론은 앞에서 언급한 갤럽 조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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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인류 역사상 가장 병신같은 선전포고

미국, 2차대전에 뛰어들다

전통이란 이름의 살인, '무사도(武士道)'

맥아더의 오만, 태평양전쟁 필리핀 전장

일본, 필리핀의 물가를 100배로 만들다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을 이용한 방식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다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의 등장

일본의 비명이 종말을 재촉했다



5부

B-29, 지옥이 시작된 일본

불의 도시, 파국으로 향하는 일본

본토결전

세계 질서를 정리한 회의

덴노를 보호하라

침몰 직전, 일본이 선택한 공허한 명예

원자폭탄 그리고 소련

원자폭탄에 대한 미국 나름의 고민

수(手)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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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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