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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국가 일본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늘 가슴에 품었던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일본은 어째서 태평양 전쟁을 선택했을까?”



한국인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을 걷어내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1930년대의 일본을 바라봤다.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아니, 더 증폭됐다. 객관적 지표, 국제정치적인 상황, 일본 국내의 경제 환경, 일본 국내의 정치상황, 일본 육군과 해군의 입장, 일본 국민들의 생각(이는 무시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그리고 일본군의 전투력까지...


음모론적인 시각도 있다.


“미국이 일본을 압박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지금도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고, 학계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음모론이란 것 자체가 태생적으로 결과를 상정해 놓고, 그 결과에 맞는 과정들. 즉, 입맛에 맞는 과정들을 추렴해 결과에 대입한 결과이다.


“진주만 폭격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을 참전하기 위해 일부러 공격을 유도한 것이다.”


라는 주장. 여기에 대해서 난 회의적이다(이 부분은 ‘진주만 공격’ 파트에서 자세히 말하겠다).


결국은 일본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에 이르게 된 원인은 뭘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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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공황


1929년 대공황이 발생했다. 미국에서는 아이를 팔겠다는 부모가 등장했고, 월스트리트의 금융인들이 미국 경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마천루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투신자살을 했다. 그래도 미국과 영국은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블록 단위로 나눈다면, 미국을 포함한 북아메리카, 유럽, 중국으로 나눌 수 있다(대한민국의 수출입지역 1, 2, 3위를 찾아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경제 단위는 어떠할까? 전통의 강호 영국의 스털링 지역(Sterling zone)과 미국의 달러 지대, 소련의 폐쇄지대(이는 개인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독일의 마르크화 지대,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각국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가장 먼저 선수를 친 건 영국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지만, 스털링 지역이란 말이 있다. 스털링 지역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대영제국과 영연방의 경제 블록 단위라 보면 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시절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들은 영국의 파운드화를 기본으로 사용했고, 파운드화를 사용하거나 자신들만의 고유 통화를 가지고 있더라도 영국 파운드에 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EU와 유로화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1931년 영국은 재빨리 금본위제를 탈출했다. 거시경제적인 측면에서 금의 족쇄를 벗어난 영국은 파운드화 평가절하에 들어갔고, 이는 이자율을 낮추고 경제를 ‘팽창’시키는 원인이 돼 주었다. 덕분에 무역수지는 눈에 띄게 개선됐다. 대공황 직후 영국은 금본위제를 고수했던 다른 나라들 보다 훨씬 더 빨리 경제를 성장시켰고, 실업자 수를 압도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영국이 이렇듯 금본위제를 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털링 지역’이라는 막대한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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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털링 지역


미국은 어떠했을까? 미국은 1933년 4월에 금본위제를 포기한다. 그리고 뉴딜 정책을 시행했고, 산업 부흥법, 상호 무역협정법 등등 경제입법도 서둘렀지만(?), 미국의 경제회복은 더뎠다. 물론, 이에 대한 이유를 밝힌 설명들은 많지만 지금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것은 미국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다. 지금 잠시 경제적으로 힘들다고 하지만, 미국은 그 자체로 일극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나라였다.


미국과 정 반대의 위치에 서 있었던 게 소련이었다. 미국이 개방경제를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던 그때, 소련은 미국과 정반대의 정책을 시도했다. 극단적인 ‘폐쇄’였다. 스탈린은 ‘제2의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의 대대적인 경제개혁과 성장을 일궈냈는데, 그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러시아의 노동과 자본을 소련의 제조업으로 강제이동’ 시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농업을 집산화 시키는 대신, 남아도는(스탈린의 관점으론) 농부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공장에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소련에 남아 있는 거의 모든 자본을 중공업에 투자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소련은 빠른 속도로 공업경제를 구축했고, 1929~1939년 사이에 소련의 1인당 생산은 61%나 증가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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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의 쏘련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는 좀 더 드라마틱했다. 대공황 덕분에(?!) 독일 국민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이다.


대공황 직전인 1928년의 독일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불과 2.6%의 지지율을 얻었을 뿐이지만, 대공황 직후인 1930년 총선에서는 무려 18.3%의 지지율을 얻어 원내 제2당으로 도약하게 된다. 그리고 대공황의 여파가 퍼져나가던 1932년 7월 총선에서 무려 37.4%라는 지지율을 얻어내 마침내 원내 제1당이 됐다.


경제가 정치를 갉아먹은 것이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경제회복에 뛰어들게 된다.


이미 1931년에 독일은 외환거래를 통제함으로써 사실상 금본위제를 포기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이걸 발판으로 1932년 독일은 팽창적인 통화정책을 시도했다. 효과는 곧 드러났다. 1933년 1월이 되자 독일의 경제지표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였다. 생산과 고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내부지향적인 경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국내의 생산팽창’을 시도한 것이다. 당연히 외환은 통제됐다.


그 사이 아우토반을 닦았고, 국민차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눠줬다(진짜로 나눠 준 건 아니다). 소비증가와 이를 통한 실업 감소. 경기지표는 하루가 다르게 개선됐고, 이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전시경제체제’로 변해갔다. 1932~1938년간 독일의 일 인당 실질 GDP성장율은 연 6.6%에 달했다. 역시 경제위기에는 ‘전쟁’만 한 건 없는 것일까?


이는 이탈리아가 다시 한 번 증명하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끝까지 금본위제를 고수하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당시 이탈리아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가 리라화에 가지고 있었던 ‘긍지’가 문제였다. 위대한 로마로의 귀환을 원했던 무솔리니에게 금블록(금본위제를 따르는 지역) 잔류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를 자존심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점점 히틀러의 정책을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자본이동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타는 바로 아비시니아 (Abyssinia) 침공이었다. 이탈리아 경제는 기운을 차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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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대공황을 극복했을까?


일본은 수출로 먹고 사는 존재였다. 즉, 외부변화 요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일본은 감기에 걸리는 상황. 대공황은 재채기가 아니라 ‘홍역’이었다. 일본 역시 1932년 금본위제를 뛰쳐나오게 된다. 그리고 엔화에 대한 평가절하에 들어갔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국의 행보를 쫓아가는 것 같았다. 평가절하 된 통화의 ‘힘’을 가지고 국내에 투자를 하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할 듯이 보였으나... 일본은 영국 대신 독일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일본은 평가절하의 힘을 가지고 수출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군비팽창에 열을 올렸다. 대공황 시기 일본은 평가절하의 힘을 군사목적의 국내수요 창출에 밀어 넣었고, 그 결과 괄목할만한 공업성장을 일궈냈다.


이미 1930년대 일본은 전시경제 체제에 들어섰던 것이다. 아니,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은 전시경제 체제에서 벗어났던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부분은 1930년대 일본이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 향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4년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돼 주었다는 부분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 1일


평균 연령 33세. 일본에서 가장 뛰어나고 우수한 인재 35명이 내각 총리대신 산하의 모 기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이 배출할 수 있는 최고의 인재였다.


조선총독부 식산국 소속 33세의 히카사 히로타카, 북지나방면군 지난 특무기관소속 31세의 나리타 겐이치, 외무성 소속 31세의 지바 아키라, 내무성 지방국 사무관인 32세의 요시오카 게이이치, 육군대위 시라이 마쓰타쓰, 육군 회계관 소령 오카무라 슌, 해군 소령 시무라 다다시, 해군기관 소령 다케이치 요시오...


국가기관뿐만이 아니었다. 금융권과 언론사에서도 인력을 파견해야 했다. 심지어 기업에서도 인력을 보내야 했다(미쓰비시 광업, 일본 제철의 인원도 파견됐다).


일본의 육군과 해군, 내무성, 재무성, 상공성 등등 행정기관은 물론, 중의원에서도 인원을 보냈다. 조선총독부와 만주에 있는 인원도 예외는 없었다. 일본 본토 내에서는 철도와 우편, 고등학교 교사까지 차출됐다. 이들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촉망받는 엘리트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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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파견된 기관의 정식 명칭은 내각 총리대신 산하 『총력전 연구소』 였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총력전 연구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상략) 총력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조사를 목적으로 지난해 10월에 탄생한 총력전연구소는 국방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점에서 ‘장관양성학교’라 불리고 있다. (중략) 군관민 각각에서 “인격, 신체, 지능이 탁월하며 장래 지도자가 될 만한 자질을 가진 인재” 서른여섯 명에 대한 전형을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연구생의 자격은 무관의 경우에는 육해군대학교를 졸업한 대위 또는 소령, 문관은 고등관 4등 또는 5등이며, 각각 임관 5년 이상 경과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민간 분야에서는 이러한 문무관에 해당하는 직업 경력을 가진 인재 여섯 명을 선발하게 된다.(하략)


- 1941년 3월 28일자 <도쿄일일신문> 기사 中 발췌 - 


이렇게 모아놓은 인재들은 뭘 했을까? 미래의 장관 후보자라서 교육을 받았을까? 아니다. 그들은 일본 내각을 꾸렸다. 동시에 청국(淸國 : 청나라가 아니라 ‘가상적국’ 즉, 미국을 의미한다) 내각도 동시에 꾸렸다. 그리곤 책상 위에서 전쟁을 벌였다.


1941년 여름.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자원과 군사력, 국가역량 등을 모두 계산해 종합적인 일본의 국력을 상정해 놓고, 이를 가지고 가상 적국과 전쟁을 치른 것이다. 당시 일본은 초조했다. 노구교사건(1937년 일본·중국 양국 군대가 노구교에서 충돌하여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 중일전쟁에 돌입하긴 했지만, 근대전에 대한 불안감을 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조만간 중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국과의 일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


일본은 자신들이 배출한 최고의 젊은 인재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시뮬레이션을 돌린 것이다.


젊음이 가지는 혁신과 창의성, 기존의 통념에 물들지 않은 개혁성. 그리고 혈기를 억누를 적절한 사회 경험과 각자의 조직에서 습득한 전문지식. 이 모든 걸 고려해서 선발한 인원들이 총력전 연구소 연구원들이었다.


이들은 쇼와 16년(1941년) 여름 내내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시뮬레이션 했다. 그 결과는 너무도 간단했다.



“일본의 패배”



그들은 각자 분야의 전문지식을 총동원해 저마다 리포트와 논문을 냈고, 이들을 서로 비교 검토하며 일본의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1939년 후반부터 광공업 부문의 둔화, 정체가 계속되고 있는 원인은 우선 원료 부족과 노동력에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여름철 물 부족에 따른 전력기근과 연료인 석탄 부족, 특히 더욱 큰 타격을 가한 것은 1940년 9월에 미국이 선언한 철강, 고철 등의 대일 수출 금지였으며, 이런 것들이 처음에 책정한 계획 실행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카무라 육군 회계관(당시 소령)이 쓴 글이다. 그는 “해는 지고 갈 길은 먼 느낌”이라며, 일본의 전쟁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며 탄식했다. 민간 전문가의 비판은 더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물가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다 차출 된 다마키 게이조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내, 즉 인도네시아해와 동지나해를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 세토 내해)와 같이 자유롭게 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좀 더 신랄한 분석도 있었다. 일본우편기선에서 파견된 마에다 가쓰지는,


“1941년 당시 우리나라의 선박 보유량은 300만 톤이다. 작은 어선은 집어넣지 않았고, 100톤 이상의 물자 동원에 활용할 수 있는 선박만을 계산했다. 그런데 유조선은 1% 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석유를 드럼통에 넣어서 선적할 수밖에 없다. 전쟁이 시작되면 상업용 선박 대열은 침몰된다. 문제는 선박 소모량을 어떻게 예상하는가에 있다.”



마에다 가쓰지는 시애틀, 런던 주재원을 역임한 해외파였다. 그리고 그가 런던에 주재할 당시 독일의 공습을 체험했고, 유보트에 의해 영국 상선이 침몰되는 걸 다 확인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이 섬나라란 사실을 강조했고, 현대의 잠수함과 항공기가 어떤 식으로 국가의 생명줄을 끊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미국 잠수함의 어뢰공격, 기뢰살포에 의해 대부분의 상선이 격침당했고, 전쟁 수행능력은 끝없이 추락했다(이때의 경험 덕분인지, 일본 해상자위대는 기뢰 소해능력 확보에 열을 올렸고, 소해능력에 있어서만은 세계 최고의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1941년 8월 27일과 28일. 총력전 연구소의 엘리트들은 총리대신 관저의 대형 홀에서 이 ‘모의내각’은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미국, 영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반드시 패전할 것이다.

이 전쟁은 국력이 허하는 바가 아니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자리에 태평양 전쟁을 진두지휘하게 될 도조 히데키(東英機)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연구생들의 의견을 듣고 나서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다.


“연구에 대한 제군의 노고가 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루어진 연습으로서 실제 전쟁이라는 것은 제군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러일전쟁에서 우리 대일본제국은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겼습니다. 그 당시에도 열강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어쩔 수 없이 제국은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요. 생각 밖의 일이 승리로 연결되어 갑니다. 따라서 제군이 생각하는 것은 책상 위 공론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 의외성이라는 요소를 고려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 책상연습의 경과를 제군은 경솔하게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됩니다.”


1941년 8월 28일 일본은 4년 후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했지만, 그 예측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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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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