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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2월 6일 워싱턴에서 헤어졌던 세계의 열강들이 1930년 4월 22일 영국 런던에서 다시 만났다. 세계사에서는 이를 ‘런던 군축조약’이라고 부른다. 


‘런던 군축조약’의 핵심은 ‘보조함’, 그 중에서도 ‘순양함’이었다.


워싱턴 체제에 의해 전함, 순양전함, 항공모함을 완벽한 ‘규제’ 안에 묶어놓을 수 있었으나, ‘대형함’을 묶어놓자 이번엔 보조함 경쟁이 붙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돼, 도크에 있던 전함들을 모두 박살내 고철로 넘기는 게 아까웠던 각국은 이를 개장해 ‘항공모함’으로 만들었다. 항공모함을 새로 건조할 경우 최대배수량은 27,000톤에 함포구경은 최대 8인치(203mm)까지 만들도록 하는 등 온갖 규제조항을 집어 넣었지만, ‘꼼수’를 쓰기로 작정한 이들에게는 도망갈 구멍이 있었다.


항모의 최대 배수량과 함포 구경의 제한은 ‘꼼수’ 예방차원이었다. 전함 뒤에 수상기 몇 대를 올려놓고는 ‘항공모함’이라고 우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조약에는 허술한 구멍이 여러 군데 있었다. 배수량 1만 톤 이하의 항공모함은 예외대상이란 점을 들어 미국과 일본은 각각 배수량 7천 톤의 랭글리와 호쇼를 만들었다. 이런 ‘구멍’은 점점 넓어져만 갔는데, 대표적인 구멍이 ‘순양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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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운반선인 쥬피터를 개조해서 만든 미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 USS 랭글리


1만 톤 이하의 순양함과 그 이하의 보조함선에 대해서는 건조수량, 배수량 제한이 없다시피 했기에 각국은 워싱턴 체제의 규제에서 벗어나 있는 순양함을 건조하기에 바빴다. 물론 기준 배수량 10,000톤에 함포 구경 8인치라는 제한 사항이 존재했지만, 이 안에만 들어간다면 얼마든 배를 건조할 수 있었다. 때문에 상당히 ‘기형적인’ 순양함들이 만들어졌다.



다시 등장한 대미 7할론


순양함으로 대표되는 ‘보조함’ 문제는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였다. 이미 미국과 영국이 스위스에서 ‘제네바 해군 군축회의’를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의 실효성이 없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왔고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미국과 영국이 의견을 같이 했으니 이야기는 빠르게 진전됐고, 1930년 런던에서 본격적으로 회담이 열렸다.


그렇다면, 이 당시 일본의 입장은 어땠을까?


‘대미 7할의 고수’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때 내놓은 협상원칙을 다시 들고 나왔다. 전함에서는 지켜내지 못했지만 보조함에서는 대미 7할을 확보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협상단의 입장도 강고해서 일본은 다시 쓴 잔을 마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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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할에 근접한 비율이었지만, 일본 군부의 불안과 불만은 폭발 일보직전까지 올랐다. 아니, 당시 런던 군축조약에 참가한 미, 영, 일 3국 모두 불만에 차있었다. 미국은 중순양함을 더 필요로 했고, 영국은 경순양함을 더 많이 원했다. 어쩌면 런던에서의 협상도 일본의 승리로 끝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대공황 때문에 긴축재정을 해야 한다. 군비를 축소할 수 있고 군부가 명분으로 내세운 7할에 근접한 성과를 냈으니 성공적인 협상이라 할 수 있다.”


라고 자평할 만한 성과였지만 일본 해군은 폭발한다. 2번에 걸친 협상에서 대미 7할론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해군은 문민정부를 넘어서 군축을 주장하고, 주도했던 민간의 정당세력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가지게 됐다.


이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한다. 군부의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쇼와유신(昭和維新)’이란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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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유신 때의 청년들


일본 내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적 불안, 뒤이은 대공황으로 일본 경제는 휘청했고, 그 사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수혜를 입은 자유주의와 민권사상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정치는 불안해졌고 군부에 대한 견제가 ‘군축’이란 이름으로 도래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내부적인 홍역 정도로 끝이 났겠지만, 국제 정세도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의 이익과 직결된 중국 정세가 급변했고, 러일전쟁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게 호의적인 국제정세가 1930년대엔 악화일로를 걸었다. 사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전후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위험한 나라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일본은 언제나 그렇듯 내부의 불안을 외부로 표출하려고 했지만 군비가 축소된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청년 장교들은(급진세력이란 표현이 더 적확하겠지만)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정부의 정신을 부흥시켜야 한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친정(親政)체제로 일본 정치를 개편해야 한다!”


만약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우익세력’이라면 극우세력의 준동 정도로 끝날 문제였지만, 상대는 ‘군부’ 그것도 혈기방자 한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목소리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이렇게 해서 터진 것이 5.15사건과 2.26사건(2.26 사건은 ‘실패한 쿠데타’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이다. 쇼와 시절의 오점이라 말할 수 있는 군부의 준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5.15사건은 국내에선 2.26사건보다 상대적으로 ‘덜’ 조명이 되는데, 5.15사건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루비콘 강을 건넌 계기가 된 사건이다. 말 그대로 5월 15일 날 일어난 사건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된지 2년 후인 1932년 5월 15일에 벌어졌다. 사건의 구성은 복잡한데, 당시 내각이었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내각, 아니, 문민내각에 대한 불신이 시작이었다.


해군의 청년장교들은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한 前 일본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에 대한 습격을 결의하고 있었는데, 와카쓰키가 선거에서 대패해 와카쓰키 내각 자체가 사라진다. 청년장교들 입장에선 ‘죽일 대상’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때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내각 총리대신 자리에 오른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였다. 이누카이는 군의 축소를 지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팽창하는 군부를 내버려 둘 수 없다는 판단이었지만, 군부의 입장에선 자신의 ‘권력’과 관계된 일이었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정치권’ 안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란 점이다. 191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훈풍 덕분에 일본 지식인들은 군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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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를 지나서는 지식인들과 사회주의자에게서만 볼 수 있었던 군부에 대한 반감이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퍼진다. 예전이라면 군복을 입은 장교를 보면 길을 비켜주거나 예를 갖췄는데 이 시대가 되면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욕을 당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분개한 해군 청년장교들은 육군 사관후보생들과 민간 농본주의자들을 규합해 정우회 본부, 경시청, 일본은행들을 습격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테러’로 볼 수 있겠지만, 이들 중 해군장교 4명과 육군 사관생도 5명이 총리 관저에 쳐들어가 총리였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를 암살한다.


이후의 사건 진행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사건의 주모자 11명은 체포 돼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으로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무려 35만 명의 서명이 적혀있는 탄원서가 쇄도한다. 결국 이들은 사면된다.


여기까지는 쓴 웃음이 흘러나오는 블랙 코미디지만, 그 이후는 완전한 ‘비극’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일본의 정당정치가 사실상 끝났기 때문이다. 이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를 주축으로 하는 군사 내각이 등장해 일본은 완전한 군정(軍政)체제로 넘어간다.


군부의 정계 진출은 기정사실이 됐고, 사회변화에 예민한 재벌들은 ‘군부’가 일본의 핵심이라는 걸 확인하고 군부에 대한 지원과 유착관계 형성에 들어간다. 군과 재계가 손을 잡자 일본의 군국주의는 더 강화되었고, 종국에 가서는 독일과 같은 국가사회주의로 변화한다.


한때 일본 국민들의 가슴 속에 불었던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훈풍은 사라지고 이전보다 더 혹독한 군부의 압제가 시작됐다. 이렇게 생긴 군국주의 바람은 이후 쭉 이어져 태평양 전쟁까지 논스톱으로 달린다.


‘대미 7할론’이 부정되긴 했지만 7할에 근접한 수준의 성과를 얻었다. 당시 일본 경제 수준을 고려했을 때 7할을 다 채우는 건 난망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폭주했고 일본은 돌아올 수 없는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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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군부의 ‘폭주’라는 표현 말고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군사혁명의 시작


1922년 발효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은 해전의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뒤바꿔 놓았다. 이전까지는 쓰시마 해전으로 대표되는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간의 결전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함대결전주의’가 해전의 기본적인 양상이었다.


그러나 워싱턴 체제가 완성되고 해군이 ‘휴일’에 들어가면서 각국 해군들은 가지고 있는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때 등장한 새로운 무기가 ‘항공기’였다. 어제까지 대포로 싸웠다면 내일부터는 ‘비행기’가 전장의 주역이 될 것이란 의견이 흘러나왔고, 주력함을 더 이상 건조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항공모함을 활용한 전술 개발은 하나의 조류로 굳어졌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일본은 항공모함의 연구, 파일럿 양성, 실전 참가 경험을 가장 활발하게 한 국가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가장 노련한 항재기 조종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게 일본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진주만을 공습했고 멋지게 성공했다. (다시 거함거포주의의 환상에 빠져 전함 건조에 들어갔다는 게 이상하지만)


이렇게 워싱턴 체제는 정치와 군사 모든 면에서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다. 지금도 ‘군축’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다. 가장 성공적인 군축조약이었고, 동시대 해군을 기형적으로 변형시켜 ‘조약형 해군’, ‘조약형 전함’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가장 실효성 높은 군축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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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첫 번째 조약형 순양함인 Leander급


정치적인 성과를 보자면, 군국주의 일본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고 10년 가까이 일본의 팽창야욕을 억제시켰다. 이는 높게 사야할 부분이지만, 1930년대의 일본을 생각한다면 워싱턴 체제가 일본의 야욕을 억눌렀을 뿐이란 걸 알 수 있다. 아니, 억누른 반작용으로 오히려 더 크게 폭발시켰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음 시간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즉, 워싱턴 체제를 탈퇴한 일본의 ‘마지막 불꽃이 점화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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