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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헌법(明治憲法), 메이지 천황 시절 만들어진 구 일본제국의 헌법이다. 일본에서의 공식명칭은,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


이 헌법의 제1장은 ‘천황’에 관한 내용으로, 나라의 성격을 규정하는 제일 첫머리를 ‘천황’이 장식했다는 것만으로 구 일본제국이 추구하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제2장은 신민의 권리와 의무, 제3장은 제국의회, 제4장은 국무대신 및 추밀고문, 5장은 사법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 메이지 헌법 제1장의 몇 가지 조문을 소개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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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헌법' 제1장


제1장 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제1장 5조
천황은 제국의회의 협찬으로써 입법권을 행사한다.


제1장 7조

천황은 제국의회를 소집하여 개회, 폐회, 정회 및 중의원의 해산을 명령한다.


제1장 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몇 가지 조항만 추려봤음에도 천황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이 제1장 11조다.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이 11조 때문에 일본제국은 군부의 손에 놀아났고, 전쟁국가 일본이 되었다.


국가에게 있어선 ‘최후의 주권’이라 말할 수 있는 군사력이 국민의 손이 아니라 군인의 손에 떨어졌다. 당시 깨어있는 일본 정치인들은 군부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 군권(軍權)을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정치인에게 양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생각뿐이었고, 현실적인 목표는 ‘군부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였다. 그러나 군 통수권에 대한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보일라치면 군부는 메이지 헌법 제1장 11조를 들고 나와 상대방을 압박했다.


“군 통수권은 신성한 천황의 권한이다. 그런데 일개 신하가 감히 천황의 통수권을 침범하려 하는가?”


군부는 천황을 방패로 내세웠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대본영(大本営)


이었다. 원래는 육군성 내 일개 국의 위치였으나, 육군성에서 독립해 천황 직속의 참모본부가 된다. 덕분에 천황은 육군성이나 육군대신, 해군대신의 도움 없이도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됐다. 원래는 전시(戰時)에 조직되는 천황 직속의 통수기관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전쟁국가 일본의 컨트롤 타워가 돼 버렸다(평시 일본제국 육군의 지휘부는 참모본부, 해군은 군령부였다. 그러나 전시 체제가 돼 대본영이 꾸려지면서 참모본부는 대본영 육군부, 군령부는 대본영 해군부로 바뀌고, 천황은 대원수로서 육군에 내리는 명령인 ‘대륙명大陸命’, 해군에 내리는 명령인 ‘대해령大海令’을 내리며 전쟁을 진두지휘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대본영은 전시(戰時)가 아닌 사변(事變)에도 대본영을 둘 수 있게 전시 대본영 제도가 ‘살짝’ 바뀐다. 그럼 사변이 뭘까?


‘전쟁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병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적 사태나 난리 또는 선전 포고 없이 이루어진 국가 간의 무력충돌’


즉, 전쟁은 아닌데 전쟁인 상황 혹은 전쟁에 준하는 군사적 움직임이 있는 상태를 뜻한다. 바로,


‘지나사변(支那事變)’


이다.



1. 지나사변, 전쟁인 듯 전쟁 아닌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벌써 70년이 넘어섰음에도 일본 우익들은 중일전쟁을 ‘지나사변’이라 부르곤 한다. 어째서 일본은 ‘전쟁’을 ‘사변’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말 그대로 ‘사변(事變)’으로 중일전쟁을 바라봤던 당시 일본 군부의 자신감(?)
둘째, 국제정치학적 필요.


우선 ‘사변(事變)’으로 바라본 당시 일본 군부의 시각이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 군부는 중국군과의 전투를 만주사변의 연장선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대륙을 3개월 이내에 완전히 장악하겠다.”


이 호언장담을 눈여겨봐야 한다. 당시 일본 군부는 중국군을 얕잡아 보고 있었고, 만주사변과 같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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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노구교사건(일본과 중국의 군대가 노구교에서 충돌한 사건. 중일전쟁의 발단이 됨) 직후 일본 군부 내의 강경파들은,


“이 참에 화북지방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자!”


라며 전선확대를 주장했다. 솔직히 당시 일본 군부의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만주사변, 상하이 사변, 러허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땅을 야금야금 갉아 먹었고 그때마다 중국은 무기력하게 일본군에게 끌려갔다. 중국은 병든 돼지였고, 옆구리를 찌르면 땅을 떼어주는 자판기 같은 존재였다. 이런 경험치로 인해 일본은 지나사변을 ‘가볍게’ 생각했다.


“화북지역 5개성 정도를 가볍게 접수해서 만주국 같은 괴뢰국을 하나 더 세우자. 그렇게 되면, 화북지방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로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중일전쟁을 지나사변이라 부르는 두 번째 이유는 국제정치적으로 ‘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동안 맺어왔던 각종 조약과 이 조약에 의한 명분의 유지, 그리고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 ‘전쟁’을 할 수 없었다.


우선 생각해 볼 건 그 동안 일본과 중국이 맺었던 각종 조약들이다. 몇 번의 사변과 전쟁을 통해 중국과 일본은 수많은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때마다 일본은 조계와 치외법권을 확보했다. 그런데 만약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동안 누려왔던(?) 일본의 특권이 모두 무효가 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야 할까? 분명 전쟁인데, 전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조약상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이 대외적으로 맺은 조약들도 걸림돌이 됐다. 대표적인 게 부전조약(전쟁포기에 관한 조약)과 9개국 조약(일본의 중국진출을 억제함과 동시에 중국의 권익보호가 목적)이다. 자위적인 전쟁은 인정하지만, 침략전쟁은 용인할 수 없다는 부전조약에 사인했던 게 일본이다.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워싱턴 해군 군축체제를 붕괴시킨 일본이지만 국제사회에서의 최소한의 ‘명분’은 지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일본을 압박한 최고의 동인은 ‘미국’이었다. 1935년 미국은 ‘중립법’을 통과시킨다. 전쟁 당사국에게는 무리 및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원료 등의 수출을 금지하고, 금융거래를 제한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경제의 상당부분을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던 일본으로서는 이 중립법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런 이유가 모여 중일전쟁은 ‘지나사변’이 됐다. 그러나 전쟁 당사국인 중국과 주변의 열강들, 그리고 일본조차도 이 사태가 ‘사변’이 아니라 전쟁이란 걸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일본만이 자신들만의 명분과 아집에 아직까지 ‘사변’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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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늪에 빠지다 ①


일본에게 있어서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1937년이다. 많은 이들은 태평양 전쟁이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12월에 시작된 걸로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일본군을 발목을 붙잡은 것은 ‘중국’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사망자 200만 명 중 절반이 중국 땅에서 죽었고, 1943년 중반까지 일본군 예산의 50% 이상이 중국에 투입됐다. 이것만 보더라도 일본군의 주 전선이 중국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어째서 일본은 이런 무모한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처음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는 호언장담. 이 호언장담이 결국 일본군의 발목을 잡았다. 중국은 더 이상의 타협을 용인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1937년 7월 12일 장제스는 장시성 노산(盧山)에서 노산 국방회의를 열었다. 중국의 주요인사 150여 명이 참석해 5일간 현 상황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고, 여기서 그 유명한 ‘노산담화’가 나왔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전민족의 생명을 걸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철저히 희생하고 철저히 항전할 뿐이다.”


장제스의 결의가 중국 전역과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그때까지의 중국이 아니었다.


이 당시 일본은 어떠했을까?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가 ‘노구교사건’을 보고 받은 것이 1937년 7월 8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내각 회의를 열어 확전방지 대책을 강구하려고 했지만,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가 길길이 날뛴다(일본 패망과 조선 독립에 앞장선 훌륭한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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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이번 노구교 사건은 중국의 계획적인 도발이다! 그동안 중국이 보여준 반일성향을 보라! 중국은 계획적으로 우리를 공격한 것이다. 당장 3개 사단을 증파해 중국군을 쓸어내야 한다!”


스기야마 하지메의 생각 없는(!) 외침에 제동을 건 것은 해군 대신이었던 요나이 마쓰마사였다. 육군 참모본부 내에서도 중국 침략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개념’있는 장교가 많아서인지 신중론이 우세했다), 관동군이 멋대로 일으킨 충돌을 전쟁으로까지 비화시킨다는 것이 영 성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상식적으로 중국과의 전쟁이 이치에 맞을까?


관동군과 내각에 있었던 육군대신의 면면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동군 참모장은 그 유명한 도조 히데키(東条英機)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주역이었고(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관동군 참모는 ‘근성론’의 대가이자 한때 ‘작전의 신’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병신 중의 상병신 츠지 마사노부(辻政信)였다. 츠지 마사노부의 명저 <이것만 읽으면 전쟁에 이길 수 있다>를 보면,


“(미국과의) 전쟁은 승리다. 비행기와 전차와 자동차와 대포의 숫자는 (미군이) 지나(중국)군 보다 훨씬 더 많으므로 주의해야 하지만, 구식인 것이 많을뿐더러 그 무기를 쓰는 병사들이 약하므로 쓸모가 없다. 따라서 야습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만 봐도 그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훗날 대본영으로 들어가 일본 패망에 앞장 선 훌륭한 인물이다.


그리고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병기가 없어, 탄환이 없어, 먹을 것이 없어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차라. 발도 없으면 물어뜯어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김성종 원작의 <여명의 눈동자>에 잘 묘사돼 있는 ‘임팔작전’의 책임자였던 무타구치 렌야가 내뱉은 말들이다. 당시 노구교사건의 해당 부대(연대) 연대장이 무타구치 렌야다.


노구교사건을 어떤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따지고 보면 별 거 아니다. 일반인들에게는 <JSA – 공동경비구역>의 이병헌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무타구치 렌야가 연대를 훈련하던 도중 휘하 병사 중 하나가 사라졌다. 이 병사는 급한 용무, 그렇다. 똥이 마려워 화장실로 사라진 상황. 그러나 무타구치 렌야는 이 병사를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무턱대고 중국군 소행이라고 판단을 내려 이를 상부에 보고한다. 그리고 중국군을 공격했다(한 병사의 장 트러블이 이후 8년 동안 2천만의 중국인을 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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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도조 히데키, 츠지 마사노부, 무타구치 렌야


도조 히데키, 츠지 마사노부, 무타구치 렌야. 이 3명이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 일본에게는 ‘불행’이었다. 무타구치 렌야가 노구교사건을 일으키자마자 도조 히데키는 즉각 혼성 2개 여단을 편성해 출동시켰고, 츠지 마사노부는 무타구치 렌야에게 달려가,


“뒤는 관동군이 받쳐주겠습니다. 마음껏 때려 부수시오!”


라면서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히로히토: 일본과 미국 사이에 일이 터지면, 육군은 얼마 만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시오?


스기야마: 남쪽 방면만 한다면 3개월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스기야마, 그대는 중국사변 발발 당시 육군대신이었소. 그 때 그대가 중국사변 이후 우리 일본이 중국을 1개월 정도면 정리할 수 있다고 한 말을 짐은 아직 기억하오. 그렇지만 4년이나 질질 끌었고 아직도 정리를 못했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스기야마: 중국은 오지가 넓기에 예상과는 달리 작전을 못 폈습니다. 허나 폐하, 태평양은 도서지역이기 때문에 더 수월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뭐요? 중국의 오지가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소이다! 대체 무슨 확신이 있어 3개월이라는 소릴 하는 것이오?


<쇼와사> 中 발췌



한도 가즈토시가 쓴 <쇼와사>의 한 대목이다.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에 히로히토 천황이 스기야마 하지메에게 태평양 전쟁에 관해 묻자, 자신 있게 ‘3개월’이라고 대답한 대목이 인상 깊다. 상식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과도한 자신감이 발로일까? 중일전쟁 개전 초기에도 히로히토에게 1달 안에 전쟁을 정리하겠다고 말했지만, 그 전쟁은 8년을 끌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답이 없다(스기야마는 훗날 참모장과 작전과장이 결사반대한 ‘임팔작전’을 무타구치 렌야의 얼굴을 봐서 결재해 주라고 명령했던 인물이다).


이 네 ‘미친놈’들이 일본을 늪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회,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