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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명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혹은 영국명 조지 프레데릭 헨델은 일관된 사람이다. 일평생 올곧게 부와 명성을 추구했다. 그의 목표는 그 무엇보다 흥행이었고 그래서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흔히 바흐는 서양음악의 아버지이고, 헨델은 서양음악의 어머니였다는 말이 있다. 바흐에게 음악의 아버지라는 평은 충분히 가능하다. 어머니 포지션을 만들어 굳이 구색을 맞춰야 할까? 이건 사실 헨델도 바흐 정도는 되는데 뭔가 명칭이 있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해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서구권에 이런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키우시고..."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하면, 동시대 사람인 바흐가 음악의 형식을 잡을 동안 헨델이 음악의 흥행이라는 양분을 공급한 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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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은 1685년 2월 23일, 독일 작센 지방의 할레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헨델, 그는 이발소집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헨델을 낳았을 때 무려 63세였다. 이 양반은 실력이 뛰어나 작센 선제후(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권을 가진 제후. 실질적으로는 독립 군주이자 왕이다)의 궁중 전담 외과의사이기도 했다.

 

옛날 유럽에는 이발사 겸 외과의사가 많았다. 이발도 외과수술도 사람 몸에 칼을 대기는 마찬가지다. 이발소 마크가 하양과 빨강과 파랑의 패턴인 것은 이발사가 외과의를 겸했기 때문이다. 하양은 흰 가운, 빨강은 동맥, 파랑은 정맥을 상징했다. 현재 마크는 이발소가 가져가고 흰 가운은 양측이 공유하는 중이다.

 

이발사 겸 외과의의 사회적 지위는 현재의 의사는 물론이고 당대의 내과의만큼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험한 일인 데다가 몸을 다친 환자는 노동계층이 많았다. 머리가 아프다고 의사를 찾는 계층은 십중팔구 부유한 귀족층이었다. 주된 고객의 주머니 사정이 외과의와 내과의의 사회적 지위도 가른 것이다.

 

그래도 이발과 외과술은 전문기술이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 헨델의 아버지는 꽤 잘 살았다. 그리고 헨델에게 거대한 체구와 소도둑놈같은 험악한 인상을 유전자로 물려주었다.

 

당시엔 마취란 것이 없었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의 살을 째고 뼈를 썰다보니 당연히 환자는 발광한다. 외과의는 기술도 좋아야 하지만 미쳐 날뛰는 환자를 제압할만큼의 덩치와 힘이 필수였다. 헨델의 아버지도 강인함을 타고난 덕에 75세에 돌아가셨다. 17세기에 75세라니 참 장수하셨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헨델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냈다. 시골동네 할레의 영주님은 기뻐하셨다. 재능 있는 어린이가 자기 영지에 나타났으니... 영주님은 헨델 꿈나무를 우리 할레의 큰 자랑으로 만들고 동네 입구에 현수막을 걸고 싶어했다!

 

<경 = 할레의 자랑 헨델 빈에서 초연 전석 매진 = 축>

 

이런 걸 하고팠던 거다. 하여 헨델은 운 좋게도 사춘기가 오기도 전에 후원자를 잡았다. 당시 유럽 음악가들은 절박하게 후원자를 구하고 다녔다. 악보가 곧바로 돈이 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이런 쪽으로 보면 헨델은 처음부터 복 받았다.

 

우리 영주님은 헨델에게 스승을 붙여 과외를 시켜주었다. 그걸로도 성이 안 찼는지 주머니를 털어 베를린에 음악 유학까지 보내주었다. 마, 모름지기 사람은 서울... 아니 베를린으로 보내라고 해써! 이때가 헨델의 나이 11살.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이 하나만 보낼 수도 없는 노릇. 당연히 돌보는 어른들도 딸려가게 마련이다. 우리 영주님 정말 꼬마 헨델을 자기 영지의 자랑으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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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Handel in painting, 1893

Bridgman Art Library International

 

하지만 아버지는 모든 게 못마땅했다. 감히 영주님에게 직접 반항하지는 못했지만 집안에서 아들을 훈계할 수는 있었다.

 

"너 임마 커서 귀족들 따까리나 하고 싶냐!"

 

아버지는 음악가라는 직업이 아무리 잘 해봐야 귀족들을 위한 여흥이나 위안거리의 존재밖에 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상류층 여성들의 교양이 악기 연주였던 이유도 비슷하다. 스스로 음악을 향유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남편과 남편의 손님들에게 생음악 서비스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비슷하게 여관집 딸들은 음악가들한테 손가락에 회초리 맞아가며 피아노를 배워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여관집 광고 멘트가 “우리 딸이 피아노를 잘 친다”는 거다. 물론 여관집 쯤 되면 현찰이 넉넉하니 귀한 아들은 대학 보내야 하는 거고...

 

아버지는 궁중 외과의인 만큼 최상류층이 음악가를 어떻게 대하는지 뻔히 봤을 터. 만찬을 즐길 때 옆에서 풍악을 울렸겠지 뭐. 그는 이발과 외과술이라는 기술로 돈을 번 사람이고 평민 중에서는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즉 헨델의 할아버지는 대장장이였다. 기술직에서 더 고급인 기술직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들 대에서는? 고소득 전문직이면서도 권위까지 있는 집안이 되길 원하는 것이 신분상승 욕구의 수순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버지의 꿈은 헨델이 법관이 되는 것이었다. 천재 음악가들이 으레 그렇듯 헨델은 공부도 잘했기 때문이다(확실히 음악성과 지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헨델,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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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헨델이 열세 살 때 돌아가셨다. 이분은 혹여나 아들이 정말 '딴따라'가 될까봐 유언으로 못을 박았다.

 

"너는 꼭 법관이 되어야 한단다."

- 아버지가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사회 만큼은 아니지만, 유럽도 지금처럼 개인주의가 발달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전통사회였다. 아버지의 유언이 가지는 효과는 강력했다.

 

더욱이 독일인이 어떤 민족인가! 서류와 정리의 민족 아닌가. 유언이란 게 그냥 덕담하고 떠나는 수준이 아니라, 유언장이 공개되고 언급된 사람들이 동의의 뜻으로 서명까지 하는 게 당시 독일의 관습이었다.

 

음악을 포기하기는 싫고 불효자 인증을 할 순 없고...

 

고민스러웠던 어린 헨델은 “교양 차원의 공부는 하겠다”는 애매한 선언을 적고 그 밑에 사인을 했다. 이러면 대학교육을 받고 그걸로 직업을 가질지, 아니면 교양으로만 남겨둘지 애매해진다. 어느 쪽도 가능하도록 여지를 남겨둔 거다. 음 13살의 꼬마 헨델, 꽤나 영리하다.

 

헨델은 자신의 꿈과 재능인지 아버지의 유언인지 갈등하는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할레 대학교에 진학함으로써 일단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다. 할레 대학 자체가 단과대였고, 기본적으로 법대였다. 할레 영주님은 좀 아쉬웠겠지만 유언장을 남기고 죽은 사람을 이길 순 없었다. 살아있을 때나 자기 백성이지 뭐...

 

헨델은 당연히 법대 공부에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 공부 자체는 잘 했지만 재미가 없는 걸 어떡한단 말인가! 아버지는 법대 학비도 다 마련해놓고 떠났지만 오선지 대신 법전을 보고 살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헨델은 현명하게도 포기가 빨랐다. 그는 할레 대성당(이때 당시 칼뱅파 교회였다. 헨델은 루터파였지만 뭔 상관이겠는가. 그는 이런 걸로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다)에 오르간 주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되었다.

 

(참, 당시 작곡을 하거나 꿈꾸는 사람들에게 오르간이 굉장히 핵심적인 악기였다. 피아노의 선조쯤 되는 하프시코드도 마찬가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 피아노가 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아무래도 음의 구조가 그대로 노출된 건반악기가 작곡의 가이드가 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오르간 주자는 아무나 시켜주지 않는다. 한 지역의 중심은 교회(성당)였고 오르간은 교회건축의 상징이자 화룡점정이었다. 당연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에게 맡긴다. 첫 뮤지션 커리어를 오르간 주자로 시작하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영주님이 신경을 써준 거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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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 대성당 오르간

 

헨델은 평생 동안 넓은 물, 그리고 대중적 인기를 추구했다. 혹시 아버지의 입장과 관계가 있을까? 아버지는 고작 귀족들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게 음악가라고 타박했다. 귀족의 입맛이 아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회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 이 꿈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자 자기증명의 욕구였을까?

 

알 수 없다. 사실 아버지라는 조건 없이도 대중적 영향력을 추구하는 건 야심가라면 자연스럽다. 그렇다, 헨델은 야심가였다. 법학을 버리고 음악에 올인했으니, 음악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리라 마음 먹었다. 물론 돈도 끝내주게 벌고 싶었고.

 

아버지의 유산 정도로는 성에도 차지 않았다. 충분한 유산이라고 해 봐야, 환자와 손님 개인에게 서비스하고 받은 보수를 저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헨델에게 있어 제대로 된 돈이란, 수천 수만을 대상으로 뻑적지근하게 흥행을 해서 쓸어담는 규모여야 한다.

 

그러려면 실력을 키워야 한다. 헨델은 독일 북부의 무역도시 뤼베크로 유학을 떠난다. 왜 뤼베크인가? 이 동네에는 서양음악사 오르간 1인자가 살고 있었다.

 

두둥~

 

그는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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