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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팬 중에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도 있었다. 스웨덴은 여성은 왕위계승을 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없었다. '북구의 사자' 구스타브 2세 왕이 아들 없이 요절했을 때 왕위는 자연스럽게 딸 크리스티나의 것이 되었다.

 

크리스티나는 데카르트에게 직접 지도를 받고 싶었다. 그녀는 데카르트에게 스웨덴으로 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데카르트는 고민에 빠졌다. 스웨덴은 추운 나라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추위였다.

 

“날씨가 추우면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중한 그는 스웨덴 생활을 곰곰히 상상했다.

 

데카르트는 평생 여성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할머니, 유모, 하녀에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온 그는 크리스티나가 왕이 아니라 여왕이라는 사실에 끌렸다. 더욱이 아무리 스웨덴이라도 궁정이라면 따뜻하고 쾌적할 게 분명했다.

 

스웨덴은 인구밀도가 희박한 나라였다. 그때는 인구가 200만 명이었다. 프랑스인 데카르트에게 스웨덴은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로 생각됐다. 그의 책은 이미 유럽 사회의 논란을 불러일으켜 그를 여러모로 성가시게 했다. 마침내 데카르트는 스웨덴에서라면 편안히 연구할 수 있겠다는 착각을 하고 말았다.

 

1649년 9월, 데카르트는 스웨덴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처음부터 불길했다. 배는 폭풍우와 해일을 헤치며 데카르트의 뱃속을 뒤집어놓았다. 이때 도시괴담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데카르트는 선원들에게 어린 딸과 함께 여행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딸 프란시느는 이미 열병으로 죽은 지 오래였다. 데카르트는 선실 밖에 나가지도 않고 선실 안은 너무 조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선장(혹은 선원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V.I.P의 선실에 몰래 들어갔다. 거기서 발견한 것은...

 

시계태엽과 금속 부품으로 만들어진 모조 프란시느였다는 것이다. 즉 자동기계인형이었다. 그런 물건을 처음 봤으니, 놀란 선장과 선원들은 이 물건은 악마의 작품이 틀림없다며, 이런 걸 배에 싣고 있다간 큰일이 난다고 소리치며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 '썰'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일단 데카르트는 <인간론>에서 동물기계론을 주장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이성(영혼)이다. 인체는 이성이 조종하는 기계장치다. 그는 물과 기름처럼 영육을 분리한 철저한 이원론자였다. 데카르트가 자동기계인형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철학에 불만을 품은 반대자들이 지어낸 괴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일 수도 있다. 데카르트는 자동기계인형을 설계하고 만들 능력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 프랑수아즈를 좋아할 때 이미 그녀를 본따 사시로 만든 인형과 혼자 놀곤 했다.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유난한 그의 성격과 들어맞는 이야기다.

 

또한 인간과 완전히 같으면 모를까, 유사한 수준이라면 잘 만들수록 본능적인 불쾌감을 자극한다. 시대와 지역에 상관없이 뱃사람들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을 배에 두는 걸 금기시 했다. 불길한 물건을 바다에 빠뜨리는 행동은 인류 역사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마침 데카르트가 탄 배는 풍랑을 만났으므로 선원들은 더더욱 자동기계인형을 치우고 싶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약 사실이라면 데카르트는 가는 길부터 불의의 테러를 당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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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도착한 데카르트는 경악했다. 용병 생활을 하며 겪은 추위는 댈 것도 아니었다. 스웨덴에 대한 그의 평은 걸작이다.

 

“바위와 얼음 한가운데 있는 곰의 나라”

 

9월이었으니 점점 추워질 일만 남았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가 겪어온 귀부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건강하고 씩씩했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워낙 존경한 나머지 새벽 5시부터 그의 강의를 듣고 싶었다.

 

늦잠의 황제 데카르트는 아침형 인간에게 잘못 걸렸다. 데카라트는 일주일에 세 번 새벽에 일어나 4시 30분에 마차를 타고 가 5시부터 여왕을 가르쳤다. 죽을 맛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남자 같은 풍체에 굵직한 이목구비의 소유자였다. 의학자들은 그녀가 남성호르몬 과다분비 증상을 겪었을 거라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녀는 레즈비언이었을 확률이 높다. 자서전에는 자기 안에 남자의 인격이 따로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백작부인 에바 스파레와의 연정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공식석상에서도 남장을 즐겼다.

 

크리스티나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부드럽고 따뜻한 여성과는 반대였다. 그는 여왕의 체력과 열정 때문에 시름시름 앓더니 마침내 급성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큰일이 났다 싶었던 여왕은 자신의 주치의를 서둘러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데카르트는 1650년 2월에 사망했다. 스웨덴으로 떠난 지 불과 몇 개월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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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여왕은 데카르트를 죽게 했다는 이유로 욕을 꽤나 먹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사고를 친 것도 아니다. 그녀는 데카르트 사망 몇 년 후 폭탄선언을 했다.

 

"왕위를 포기한다"

 

적법한 군주가 알아서 왕위를 포기하다니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아연실색할 일이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국민들의 압박에 시달렸으니, 바로 결혼해서 왕국을 이을 후사를 낳을 의무 때문이었다. 다름 아닌 왕실의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백성들의 하소연이야 당연하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성 정체성 상 결혼과 출산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군주로서 결점도 있었고 실정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명군이라 불릴 만 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해 귀족들의 등쌀을 이겨내고 친정체계를 구축한 걸 보면 기본적으로 유능한 인물이다. 크리스티나는 전쟁을 종식시켜 '평화의 여왕'으로 불렸다. 종전으로 끝난 게 아니라 거액의 전쟁배상금까지 받아냈으니 그녀는 과보다는 공이 많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한 편으로 그리스 철학, 그 중에서도 에피쿠로스 학파에 심취해 있었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중요시한 학파였다. 군주의 의무는 이만하면 다 수행했으니 이제는 자기 자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

 

크리스티나는 왕위를 사촌 칼 구스타브에게 물려주고 로마로 떠났다. 그리고는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당시 유럽은 1국가 1종교가 기본이었다. 스웨덴은 루터파 개신교 국가였다. 여왕이 사탄(카톨릭)의 소굴에 가서 투항하다니! 스웨덴은 충격에 빠졌지만 크리스티나가 거액의 돈을 탕진하고 돈 좀 부쳐달라고 징징거릴 때마다 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전직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왕인 데다가 조국에 평화를 선물해준 인물이니 모른척 할 순 없었다.

 

데카르트 킬러 크리스티나는 로마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연극무대에 배우로 데뷔하는 등 하고 싶은 건 다 하다 죽었다. 그녀는 반쯤은 재미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남장을 할 때는 도나 백작, 여장일 때는 도나 백작부인이었다.

 

많은 이들이 크리스티나의 개종이 카톨릭이었던 데카르트의 영향이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개종을 위해 왕위를 버렸다고 한다. 글세,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당시 유럽에서 개종은 아주 심각한 일이었다. 데카르트에게 수업을 받은 시간은 수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개종은 아마 자기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의 개신교는 카톨릭보다 훨씬 도덕적이고 엄격했다. 그런 분위기가 숨막혔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 개종까지도 할 수 있는 모습을 어필하고 싶었으리라.

 

데카르트는 스웨덴에 잘못 간 탓에 53세에 죽었다. 크리스티나를 탓하기도 뭣한 것이, 그녀는 유럽 제일의 석학들을 교사로 초빙했지만 앓다가 죽은 이는 데카르트뿐이다. 아마 그의 체력이 그렇게나 약한 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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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당시 스웨덴은 소위 말해 '촌동네'였다. 세계적인 지성이 이곳에 있었다는 자랑스러운 사실을 증거로 남기고 싶은 나머지...

 

시체의 머리를 잘랐다(!) 유해를 고국에 돌려보내고 머리 해골은 보관했다. 두개골에는 데카르트의 것이 맞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스웨덴 왕궁 근위대장의 서명까지 새겨져 있다. 데카르트의 머리 해골은 수백년 간을 몸통과 떨어져 지내다가, 지금은 프랑스로 돌아와 본체와 합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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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철학은 '의심과 회복'이다.

 

그는 대명제 Cogito ergo sum에서 세계를 다시 복원했다. 생각하는 내가 있으므로 나의 감각도 존재한다. 내가 감각하는 물질세계도 존재한다. 내가 존재할 공간도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의 근원이자 '보증인'인 신의 존재까지 증명한다.

 

그런데 이 증명은 실패했다. 그는 신존재 증명과는 별개로 신존재의 '필요성'은 부정했다. 다음의 설명 때문에 그렇다.

 

불완전한 인간이 로고스를 이용해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를 추산해 냈다. 그렇다면 그 로고스를 제공하는 의심할 수 없는 완전자가 있어야 한다. 그 존재가 바로 신이다.

 

이거 순환논증이다.

 

신까지도 의심했다가 <의심하는 나 자신은 있다>는 의심할 수 없는 명제를 도출해냈으니 신은 있다?

 

예를 들어 보겠다.

 

그렇게 따지면 '필독'은 절세미남이다. 그런데 추남일 수도 있다. 미남이든 추남이든 내가 남자인 건 사실이다. 남자인 나를 확신할 수 있으므로 이런 확신을 가진 나의 판단력을 의심할 바 없으므로 역시 나는 미남이다...

 

그런데 데카르트 자신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자신의 철학이 필연적으로 던지는 문제제기에 막막한 공포를 느꼈다.

 

“나는 혼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간다.”

 

데카르트의 진정한 유산은 상상력이다. 그는 비록 공포에 떨었지만 그의 철학은 감히 신까지도 의심할 수 있는 저항의 스케일을 제시했다. 존재자는 고독하고 세계는 의심스럽다. 이제 의심스러운 세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게 되었기에, 데카르트로부터 서양근대철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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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