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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추워진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불을 갈고 연탄재를 버리러 나갔었어요. 돌아서 들어오려는데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고양이가 저를 보며 부탁이라도 하려는 표정으로 울더군요. 앉아서 손을 뻗었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다가와서 머리를 내밀었어요. 하는 짓으로 볼 때 길고양이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죠. 목에는 목줄을 맸던 흔적이 있었고 꾀죄죄하긴 해도 밖에서 오래 산 것 같지는 않았어요. 옆에는 차들이 달리는 도로가 있고 딱히 찬 바람을 피할 만한 데도 보이지 않는 곳에, 조심성 없이 낯선 사람에게 제 몸을 비비는 새끼고양이를 모르는 척 두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너 아저씨랑 같이 갈래? 하고 물었더니 찰싹 붙어서 졸졸 따라오더군요. 만약 그때 연탄재를 버리러 나가지 않았거나 낯설고 지저분한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돌아섰더라면 당신의 고양이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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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내가 사는 곳은 바깥보다 따듯했고 이미 오 년째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의 밥도 있었어요. 별로 먹지 못했는지 밥도 물도 허겁지겁 먹더니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나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도 못했는데 당신의 고양이는 앞으로 살 곳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제 동거녀인 도도가 있었죠. 한 마리만으로도 버거운 주제에 새로운 고양이까지 데려오면 자기가 나가야한다는 생각이라도 했을까요. 도도는 당신의 고양이를 내쫓으려고 했어요. 그냥 두면 물어 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어요.

 

저는 당신의 고양이를 부모님이 하시는 가게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며칠 잘 지내는가 싶었어요. 부모님도 좋아하셨고 당신의 고양이는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고양이를 재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요. 못마땅해 하는 손님들 때문에 부모님은 고양이를 보낼 또 다른 곳을 알아보셔야 했어요. 하지만 당신도 이미 알다시피 몸값이라도 꽤 나가는 외국의 고양이가 아닌 이상 쉽지 않은 일이었죠. 몇 사람이 데려가겠다고 했다가 마음이 바뀌었고 당신의 고양이는 그곳에서 자신을 싫어하는 손님들 눈치를 보며 한 달을 살았어요.

 

저는 모르는 척 하려고 했어요. 이미 내가 가진 고양이의 밥값과 가끔 들어가는 병원비만으로도 꽤 지출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랬었는데, 오갈 데 없는 당신 고양이의 모습이 꼭 내 어릴 적 모습 같았어요. 언젠가 저는 결심했었어요. 내 것은 절대로 버리지 않기로. 어쩌면 처음 손을 내밀었던 순간 당신의 고양이는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당신의 고양이는 다시 내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 삼일은 힘들었어요. 당신의 고양이도 나도 도도의 눈치만 봐야했거든요. 괜찮아요. 이제는 둘이서도 잘 놀아요. 연초에 인터넷에서 봤던 토정비결에 올 해 식구가 느는 경사가 생긴다고 했는데 그게 순이 얘기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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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키우던 고양이의 이름은 순이라고 지었어요. 수고양이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지만 처음 봤을 때 순하게 잘 따라오던 인상이 강해서 다른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어차피 고양이들은 뭐라고 부르든 못들은 체 하니까요. 순이는 아직도 말랐어요. 밥은 잘 먹는데도 살이 별로 찌지 않네요. 아마 당신은 당신이 먹던 음식을 주었던 것 같아요. 순이는 툭하면 쓰레기통을 뒤져요. 병원에 데려갔을 때 의사선생님이 순이 코가 왜 이렇게 지저분하냐고 물었어요. 쓰레기통을 뒤지는 버릇이 있다니까 미심쩍은 눈으로 사료는 충분히 주고 있는지 확인하더라고요. 좀 억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죠. 솔직히 순이의 외모가 좀 궁상맞은 데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어쨌든 당신과 살던 고양이는 지금 도도와 함께 제가 주는 밥을 아주 잘 먹고 때로는 도도의 밥까지 뺏어먹으며 조금씩 살을 찌우고 있습니다.

 

이제 예방접종은 다 끝냈어요. 심장사상충 약도 빠짐없이 발라주고 있고요. 처음 봤던 때부터 귀 속에 있던 진드기는 다 없어졌어요. 연고도 바르고 약도 먹였거든요. 그러는 동안 제 손에는 순이가 할퀸 흉터가 여러 개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도도도 그랬었는데 이제 괜찮아진 것처럼 당신의 고양이도 조금씩 제 손길에 익숙해지겠지요. 요새는 안에 있는 모래에 볼일을 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고 해요. 신기하게 고양이들이 겪는 성장 과정은 비슷한가봅니다. 도도도 순이만했을 때 밖에서 볼일을 보기 시작했거든요. 날이 따듯해지고 문을 열어두기 시작하면 순이도 도도를 따라 밖으로 나가겠지요. 봄이 오면 저는 두 배의 쥐와 참새와 도마뱀과 곤충들을 선물로 받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버린 고양이는 이렇게 저와 도도와 함께 그럭저럭 이 겨울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버린 고양이 덕에 도도와 저는 조금 더 부산스러워진 만큼 조금 덜 외로워졌습니다. 당신의 고양이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된 건 다행이지만 혹시 다음에 또 무언가를 키우고 싶어지면, 그때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동물이든 사람이든. 당신을 탓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추운 겨울, 저는 당신이 버릴지 모를 어떤 것이 조금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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