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덴노의 결단으로 군부의 반발은 제압할 수 있었다(일단은 말이다). 그러나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아나미는 스즈키 총리를 붙잡는다.

 

“만약 미국이 덴노의 대권(大權)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스즈키 총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

 

종전을 부르짖던 요나이 미츠마사(米内 光政) 해군장관도 이에 동의했다. 이 당시 ‘덴노’에 관한 일본인들의 관점이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종전에 대한 결론은 났다. 이제 남은 건 이를 선포하는 일이었다.

 

n-emperor-a-20150807-870x617.jpg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 된 다음 일본은 스위스를 통해 미국에 항의문을 보냈다.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전쟁범죄라는 게 일본 측의 논리였다. 당시 항의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이들이 맞는가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인 건가?

 

“...(중략) 미국이 이번에 사용한 폭탄은 그 성능의 무차별성 및 잔학성에 있어서, 종래 그러한 성능 때문에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 및 기타 병기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미국은 국제법 및 인도의 근본 원칙을 무시하여, 이미 광범위하게 제국의 여러 도시에 무차별 폭격을 실시함으로써 다수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살상하고, 신사, 불각, 학교, 병원, 일반 민가 등을 파괴 또는 소실 시켰다(중략) 제국 정부는 스스로의 이름으로, 그리고 전 인류 및 문명의 이름으로 미국 정부를 규탄함과 동시에 즉시 이러한 비인도적 병기의 사용을 포기할 것을 엄중하게 요구한다.”

 

코미디라고 해야 할까? 중일전쟁 초반 난징(南京)에서 자행한 학살극. 즉, 난징 대학살 한 건만으로도 30만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게 일본이다. 그런 그들이 원자폭탄을 말하며, 인류 문명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전후 일본 학계와 세계의 인권주의자들은 원자폭탄 투하를 말하며, 인종주의와 미국의 야만성을 말하지만, 당시의 사회 분위기, 일본의 결사항전 의지, 그리고 몇 번의 기회를 무시한 일본 외교의 패착을 살펴보면 원자폭탄 투하는 당연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기회를 주었지만, 이 기회를 몇 번이나 걷어찼다. 1944년 7월 사이판이 미국의 손에 떨어지면서 일본의 패전은 결정이 났다. 반대로 말하면, 1944년 7월부터 일본은 종전의 기회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의미다. 화평파의 움직임이 본격화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일본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몇 번이나 주저했고, 강경파의 압박에 못 이겨 그들이 말하는 ‘결사항전’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결국 맞지 않아도 될 원자폭탄을 맞고 나서야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원자폭탄 사용이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말하는 이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1945년 8월이면 전쟁이 이미 끝난 상황이라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다는 논리를 말하는데, 이건 지금의 관점으로 과거를 보는 실수를 범한 거다. 당시 전 세계는 최소한 1946년 여름까지는 전쟁이 계속 이어질 거란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소모될 군비와 병사들의 목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포위한 상태로 압박을 가하면 되지 않냐는 의견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병력과 물자는 투입된다. 인종주의와 야만성을 말하기엔 당시 상황이 그리 여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1945910.jpg

 

1945년 8월 10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문을 발표한다.

 

그 전문(全文)을 살펴보면,

 

제국 정부는. 전쟁의 참화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즉시 평화를 이루려는 덴노 폐하의 염원에 따라, 중립관계에 있는 소련 정부에 대하여 대동아전쟁 종료의 알선을 의뢰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국 정부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에 제국 정부는 덴노 폐하의 평화에 대한 염원에 따라, 즉시 전쟁의 참화를 제거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제국 정부는. 1945년 7월 26일 미영중 3국 정상에 의해 공동으로 결정, 발표되고 그 후 소련이 참가한, 우리나라에 대한 공동성언의 제 조건 중에는, 덴노의 국가통치 대권을 변경해야 한다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양해하여 이를 수락한다.

 

제국 정부는 이러한 양해를 귀국 정부가 받아들인다는 명확한 의지를 신속히 표명해주기를 갈망한다.

 

제국 정부는 스위스 정부 및 스웨덴 정부에 대하여 신속하게 이러한 뜻을 미국 정부 및 중국 정부, 영국 정부 및 소련 정부에게 전달해주도록 요청하는 영광을 갖는 바이다.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 ‘천황제 유지’에 대한 고집을 확인할 수 있다.

 

8월 11일 미국의 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가 성명을 발표한다. 일본의 수락문에 대한 공식적인 회신이다.

 

덴노의 국가통치 대권에 대한 변경 요구가 포츠담선언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양해를 명기한 일본 정부의 통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힌다.

 

항복의 순간부터, 덴노 및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항복조항의 실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조치를 취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제한 하에 놓인다.

 

덴노는 일본 정부 및 일본제국 대본영에 대하여 포츠담선언의 제 조항을 실시하기 위하여 필요한 항복조항 서명의 권한을 부여하고 또 이를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

 

덴노는 모든 일본 육해공군 관헌 및 그 지휘 아래에 있는 군대에 대하여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무기를 인도하여 항복조항을 실시하도록 최고사령관이 요구하는 명령을 발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항복 후 곧 포로 및 억류자를 연합군 선박에 신속하게 승선시켜 안전한 지역에 이송해야 한다.

 

최종적인 일본의 정부 형태는 포츠담선언에 따라서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하는 의사에 의해 결정하는 것으로 한다. 연합국의 군대는 포츠담선언의 제 목적이 실현될 때까지 일본 국내에 주둔한다.

 

번즈의 성명은 일본 시간으로 1945년 8월 12일 오전 1시에 일본 외무성 및 동맹통신, 육해군의 해외방송 수신소에서 청취되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169867.jpg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군부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번즈의 회신을 받아든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郞)와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豊田副武)가 12일 오전 덴노를 찾아가 포츠담선언 수락을 번복해 줄 것을 간청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연합국이 덴노의 대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거였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제한 하에 놓인다.’란 문구다. 당시 이 문구는 외교성의 ‘의역’이 들어간 문장이다. ‘제한 하에 놓는다’의 원문은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된다(subject to)'였다. 더 논란이 됐던 건 ’최종적인 일본의 정부 형태(the ultimate form of the govemment of japan)' 역시도 외교성의 ‘의역’이 들어갔다. form of the govemment 는 정치체제로 보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거다.

 

덴노를 최고사령관에게 종속시키고, 일본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게 한다는 건, 천황제를 없애고 궁극적으로 일본을 미국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의도라는 게 군부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미 덴노는 모든 걸 결심한 모습이었다.

 

‘천황의 통치를 인정하더라도 국민이 등을 돌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뒤이어 열린 각료회의에서 육군장관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를 비롯한 군부 강경파들은 번즈의 회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국체호지(國體護持) 문제를 들고 나왔다. 결국 이들은 정식 회신문이 들어오면, 그때 다시 논의하자며 결론을 뒤로 미뤘다. 그러나 연합국의 정식 회답문은 번즈의 성명과 똑같았다.

 

8월 13일이 되자 일본 정부는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최고전쟁지도회의와 각료회의가 열렸고, 회의는 난장판이었다. 강경파와 온건파가 번즈의 회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놓고 싸웠다. 이 와중에 군부의 젊은 장교들은 아나미를 찾아가 쿠데타 계획을 제시하고, 쿠데타에 동참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다행인 건 아나미가 강경파이긴 하지만, 생각이 아예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나미는 이들을 돌려보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그런데 여기에 기름까지 더해졌다. 기름을 부은 건 미국이었다.

 

8월 13일 날 저녁에 미국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수락문과 번즈 국무장관의 회신문을 인쇄해 비행기로 살포한 거였다.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이 당시 일본의 언론은 군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 군부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체의 보도를 허가하지 않았다. 원자폭탄 투하 소식은 물론,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한 보도도 일체 금지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뿌려진 미국의 전단은 일본 군인과 민간인들에게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줬다.

 

Surrender-Leaflet-–-August-29-1945-IMG.jpg

 

정상적인 상황파악을 한 건 히로히토 덴노의 최측근이었던 기도 고이치(木戸 幸一)였다.

 

그는 미군이 뿌린 전단을 들고 황급히 덴노를 찾아갔다.

 

“이대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군부를 자극할 수 있습니다. 흥분한 군부가 어떤 사단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조속히 종전절차를 진행해서 혼란을 최소화 하도록 하는 겁니다.”

 

덴노는 기도의 의견에 동의했다. 곧 이어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어전회의에서도 아나미를 비롯한 군부 강경파는 항복조건을 확인하고 여의치 않으면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강경발언을 쏟아냈다. 이들을 막을 수 있는 건 덴노뿐이었다.

 

“(상략) 전쟁을 계속하면 결국 국토는 초토화될 것이다. 국민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다. 회답문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야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일본이 부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하략)”

 

덴노가 종전을 확실히 인정했다. 강경파들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일본의 항복은 결정됐다. 이제 남은 건 혼란을 최소화 하는 일이었다.

 

어전회의에 이어서 각료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종전의 칙서(勅書)가 완성된다. 덴노가 직접 국민들에게 칙서를 읽어주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14일 오후 궁중에서 녹음을 하고, 다음날 방송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겨우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