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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의 영웅이 됐다. 2002년 히딩크 감독과 어울려 좋아 어쩔 줄 모르던 모습,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박항서 코치의 대머리에 열렬한 키스를 보내던 모습은 당시를 살았던 한국인들이 두고두고 흐뭇한 미소를 입에 바르고 되풀이해 곱씹을 장면이듯, 아마 베트남 사람들도 대머리 박항서 감독이 부린 ‘매직’으로 열광했던 2018년 정초를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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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넘버 13번 박항서 선수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박항서 감독은 한국축구 사상 극적인 순간을 여러 번 경험한 사람이다. 서두에 말한 2002년 월드컵이야 말할 것도 없고, 1978년 10월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청소년 축구 남북대결 또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축구에 대해선 남한은 북한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아시아의 호랑이니 뭐니 하면서 폼은 잡았지만 북한의 이탈리아 격파, 포르투갈을 거의 다 잡았다가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의 활약으로 아깝게 놓쳤던 1966년 월드컵 8강의 위엄 앞에서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한국팀이 그 후로도 만나기만 하면 죽을 쒔던 호주를 6대1로 산산조각내기도 했던 북한의 위용 앞에 남한은 기가 죽어 있었다. 오죽하면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양지’ 축구팀을 만들고 막대한 월급에 유럽 전지훈련까지 시켜가며 노심초사했을까. 국제대회에서 북한을 피하기 위해 져주기를 불사하기도 했으니 그 심경 오죽하랴.

 

그러나 원수와 맞닥뜨리는 외나무다리를 마냥 피할 수는 없다. 1976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준결승에서 남은 북을 만난다. 북한축구의 기세가 많이 꺾였을 때지만 한국은 접전 끝에 1대0으로 진다. 북한선수와 공 쟁탈전을 벌이던 남한골키퍼가 복부를 강타당해 쓰러졌으나 경기는 속행됐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북한이 냉큼 공을 차넣었다. 첫 남북대결의 첫 패배.

 

비무장지대에서 들개들이 만나도 둥지가 남쪽이냐 북쪽이냐에 따라 사생결단 싸웠을 시절이었다. 더구나 축구경기한다면 서울운동장이 미어터지고 스탠드 앞까지 내려와서 사람들이 열광하던 시절, 북한에 축구를 졌다는 건 작은 일이 아니었다. 패배 다음날, “대한축구협회는 남북대결 분패에 자극, 일반/고교/대학 3개 분야별로 상비군을 구성, 남북대결에 대비하겠다(경향신문 1976년 5월 8일)”라며 절치부심하는 걸 보면 그 분위기 짐작할 수 있으리라.

 

외나무다리는 또 놓였다. 1978년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준결승에서 남한은 또 북한을 만나게 된다. 몇 안되던 방글라데시 교민들은 총출동하여 김치찌개를 끓이고 삼겹살을 구웠다. “배불리 먹고 기필코 북한을 깨주시오.” 선수들도 초긴장 상태였다. 2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각오로 충만했다.

 

이때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2년 뒤 또 한 번 북한격파의 영웅이 되는 정해원, 초창기 슈퍼리그에서 활약한 왕선재, 박윤기, 후일 한쪽 눈이 실명했음에도 골게터(Goal getter. 득점을 잘하는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린 이태호 등이었고, 팀의 주장이, 박항서였다. 신경전은 경기 전부터 시작됐다. 북한팀 주장 박해금은 남한팀 주장 박항서의 악수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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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니 이때 박항서의 머리숱은 매우 무성하다.)

 

경기는 접전이었다. 양쪽 날개가 빨랐던 북한은 한국의 측면을 계속 노렸고 힘과 기술이 좋았던 한국팀은 74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이 선보여 세계적 유행이 됐던 토털사커로 맞섰다. 출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유니폼에 영문표기를 하지 않았던 '조선'이 약간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북한의 강송근이 때린 슛이 크로스바를 맞췄을 때는 남한선수들의 가슴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한수비진은 끈질기게 북한의 공격을 막아냈고 급기야 밀착수비에 짜증난 북한 골게터 안길동은 영 신경에 거슬리던 작달막한 선수를 거칠게 떠밀었다가 경고를 받는다. 경고를 끌어낸 작달막한 선수 역시 박항서였다.

 

전후반 모두 0대0이었고 연장전도 그랬다. 하지만 초조함은 북한이 더했던 것 같다. 박항서를 밀었다가 경고를 받은 안길동을 비롯 4명이 경고를 받았고 남한선수 정해원을 걷어찬 북한선수 1명은 레드카드를 받았던 것이다.

 

거친 플레이에 못견딘 남한선수 김석원이 “레프리!”를 부르자 북한선수는 욕설을 퍼붓는다. “간나새끼 제국주의 말 하디 말고 조선 말이나 똑바로 하라우.” 남한선수 이태호는 자신의 마크맨이 심하게 발길질하고 욕을 퍼붓자 다른 선수와 위치를 바꾸기로 한다. 이태호의 위치에 와서 북한선수에 깡다구로 맞선 이가 또 주장 박항서였다.

 

마침내 승부차기의 시간이 왔다. 이번 아시아 청소년 축구 대회 8강전이나 4강전에서 베트남은 모두 승부차기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를 지켜보면서 박항서 감독은 필시 1978년 10월을 떠올렸을 것이다. 외나무다리 중의 외나무다리, 골키퍼와 키커 모두의 피를 말린다는 승부차기, 그것도 남북대결의 승부차기가 벌어졌는데, 1번 키커가 주장 박항서였으니 어찌 그 기억을 지웠겠는가.

 

한국팀은 박항서, 김창효, 왕선재, 정해원, 장외룡(인천 유나이티드 감독 시절 다큐멘터리 <비상>의 주인공이었던)이 나서 모두 공을 성공시켰다. 여섯 번째 키커들이 나섰다. 북한은 나봉기, 남한은 후일 한쪽 눈의 공격수 이태호.

 

한편 대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78년 10월 17일, 서부저선에서 제3땅굴이 발견됐다. 남북대결이 벌어질 즈음에는 수백만 서울시민이 여의도에 모여 ‘땅굴파는 두더지 김일성’ 화형식을 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수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 자기 차례가 오지 않기를 바랐을 게 뻔한 나봉기와 이태호는 내키지 않는 승부차기에 나서야 했다.

 

나봉기가 먼저 찼다. 하지만 골키퍼 박영수의 손에 걸렸다. 나봉기는 머리를 감싸 쥐었고 미친듯한 환호의 물결이 한국 선수단과 응원단, 기자석에 흘렀다. “저 녀석이 실축하면 아오지에 가겠지(경향신문 1978년 11월 4일)”와 같은 생각이 농담 아닌 진담으로, 신문기사로 나던 시절, 나봉기의 실축은 남북대결 최초의 승리라는 벅찬(?) 감격 직전으로 선수단을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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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8년 11월 4일 기사 중

 

그리고 나선 남한의 키커 이태호는 침착하게 골을 네트에 꽂았다. 승부차기 6대 5. 남한축구가 북한축구를 처음으로 이긴 날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스포츠라고 얘기하는 축구, 실력이 세계 정상급은 아니라 해도 남북 모두 공히 국기(國技)로 여겼던 종목의 남북대결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두었고, 남한의 뒤통수를 치고자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던 북한 괴뢰 도당’을 눌렀으니, 당연히 카 퍼레이드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축구협회가 승용차 오픈카를 못 구했던 것이다. ‘관계당국’이 무슨 영문인지 승용차 오픈카 퍼레이드를 허용하지 않았고 선수단은 김포공항에서 양화대교 지나 신촌 거쳐 시청까지 화물트럭 카 퍼레이드를 펼친다. 시민들은 환호했지만 어딘가 미안해 했다. “거 애들을 근사한 차 좀 태워주지...”

 

트럭 카 퍼레이드 1번에 타고 있었음직한 박항서 감독. 그가 베트남팀을 아시아 U23대회 결승에 올려놓았을 때 베트남 시내 풍경은 가히 2002년 한국과도 비슷했겠지만 78년 한국축구의 분위기에도 근접하지 않았을까 한다. 수십 년 쌓인 콤플렉스가 최초로 무너진 순간의 기쁨이란 무엇에 비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선수들에게 체력훈련을 시킬 때, 고강도 훈련을 이겨내지 못한 선수들에게 “금성홍기(베트남 국기) 하나만 생각해라. 넘어지고 실패해도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조국에게 보답하는 길은 훈련 뿐임을 명심해라'.”고 일갈하여 선수들을 자극시켰다는 얘기도 돈다. 이 얘기를 들으며 나는 싱긋 웃었다. 박항서 감독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78년 10월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때만 해도 태극마크란 거의 준 군인 계급장이었고, 국가대표란 “목숨 걸고 뛰어 국가에 보답하는” 게 당연했을 테니까. 지금은 그러지도 않지만 그래서도 안되는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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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의 승리를 기원한다. 워낙 우리가 많은 빚을 진 나라 아닌가. 축구를 무척 즐기지만 남의 나라 승점 올리는 제물 노릇을 노상 해왔던 베트남 사람들이 한 번 시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그러고 보니 언젠가 베트남 대표팀이 한국팀을 어쩌다 한 번 이겼을 때 베트남 코치가 “해방 전쟁 승리 이후 최대의 기쁨이다.”고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베트남 파이팅. 짜이 짜이 베트남.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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