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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의 히딩크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 열기는 그 이상으로 보인다. 그래도 평행이론이 충분히 적용된다.

 

축구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욕망은 '세계레벨'이다. 유럽, 남미와 당당히 싸우고 강자들 앞에서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5대양 6대주에서의 존재증명을 표현하는 데는 과거 일본의 국가적 슬로건인 '탈아입구'만한 게 없다. 이 표현에 밴 불온함과 상관없이 그렇다.

 

한중일이 탈아입구를 꿈꾼다면 동남아 국가들은 '탈동입아'를 꿈꾼다. 축구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그들은 동남아 레벨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우리가 세계의 인정을 받고 싶은 정도로 그들은 아시아 단위에서 눈에 띄고자 한다. 동남아시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동남아 10개국(ASEAN)의 인구는 6억 명이 넘는다. 현지인의 세계관에서 아시아 레벨의 성취는 탈출이며 도약이다.

 

한국과 일본의 탈아입구를 베트남의 기준으로 번역하면 '탈동입아(탈 동남아, 입 아시아)'가 된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동남아시아를 '연못'이라고 부른다. 현지 언론은 이번 AFC U-23 본선진출을 일컬어 '연못을 빠져나와 아시아의 바다로 나아간다'라고 표현했다. 큰 일 낸 게 맞다.

 

베트남은 지난해 말 태국을 꺾었다. AFC U-23에서 서구 1세계 국가인 호주에 승리를 거둔 사건은 대단한 의미지만 나는 태국전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의 방패이자 맹주다. 몽골제국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좌절시킨 것도 베트남이다. 이 나라는 제국의 무덤이다. 20세기에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 대표, 신대륙 대표를 다 물리쳤으니 인터넷 별명대로 전투민족이라 불릴 만하다.

 

현재의 베트남 영토는 오랜 시간의 정복으로 팽창한 결과다. 박하게 표현하자면 베트남의 괴뢰국이나 마찬가지인 라오스의 관공서에서는 호치민의 사진을 볼 수 있다. 현재 캄보디아의 국가정체성을 규정한 것도 베트남이다. 그러나,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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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목소리 크기는 지갑 사정이 결정한다. 태국은 네팔과 함께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나라다. 따지고 보면 일본도 패전 후 속칭 GHQ 막부 혹은 맥아더 쇼군 시기를 거쳤다.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노려보는 완충지대가 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자본주의도 일찍 발달했다. 태국의 저렴한 숙소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한방비누 비슷한 냄새가 있다. 이 비누는 백 년이 훌쩍 넘은 제품이다.

 

베트남은 동남아 중심 국가를 자처하는 태국의 모습이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야 식민 본국을 실력으로 몰아내고 인류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물리친 일이 더 대단하지만 태국이 독립을 지켰다는 거야 엄연한 사실이고, 전쟁을 한다고 지갑이 두둑해지진 않는다.

 

공산주의 체제와 중국의 경제개방 추이를 지켜보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 탓에 베트남의 경제성장은 늦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성장세는 무섭다. 중국식 중앙집권제와 관료제를 경험한 한자 - 유교문명권 사회의 공통점과 무관치 않다.

 

베트남은 동남아의 맹주 자리를 되찾을 것이며, 그 사실을 베트남인들도 알고 있다. 태국은 베트남의 입장에서 조만간 손을 봐 줄 녀석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기다림은 불편한 법이다. 그런데 유사 전쟁인 축구에서 10년 만에 태국을 꺾었다. 이는 마치 앞으로의 국가적 승리를 예고하는 전조처럼 보인다.

 

뒤이어 AFC U-23에서는 장대한 백인들을 스러뜨렸으니 열기가 고조될 수밖에. 다시 말하지만 나는 현재 베트남을 뒤덮은 이상열기의 기저에 태국전 승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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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태국은 베트남이 D조를 뚫고 토너먼트에 오르는 와중에 B조 조별리그에서 1득점 7실점 3전 전패로 탈락했다. 신나는 보너스다. 말레이시아는 8강전에서 한국에 잡혔다. 적어도 베트남인들에게 지금 동남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나라는 조국이다.

 

BTS(방탄소년단)가 아시아 국가에서 얼마나 많은 인파를 끌어당겼는지보다, 미국 AMA 무대를 집어삼킨 사실에 우리의 관심이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 구미 사대주의라고 폄하할 것만은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 소녀들의 마음을 홀리는 것보다(서유럽에서의 인기도 엄청나다고 한다) 미국의 전국 TV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미국은 세계 대중문화의 중앙이며 표준이기 때문이다.

 

세계 중심에 대한 갈망은 중국의 주변국으로서 숙명적인 것임과 동시에 올바른 전략이다. 사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중화주의를 거칠게 그리고 전략적으로 풀자면, 여기서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중국을 모방하는 방향성이라고 하고 싶다. 재빨리 모방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마련이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전쟁을 하면서도 사신과 조공을 보냈다. 고려는 요나라의 10만 대군을 귀주대첩에서 섬멸하고 요나라에 입조했다. 이런 전략적 외교는 또다른 한자문명권 국가인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조정은 자국의 정부 뿐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UN 총회도 겸했다.

 

중심과 표준에 대한 강력한 방향성은 주변에 대한 무시로 이어진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일본과 여진족을 경멸했으며 베트남은 동남아 주변국을 낮잡아 보았다. 문명의 표준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후 우리는 미국을 열렬히 짝사랑했다. 볼썽사나운 사대주의의 풍경도 거쳤지만 거시적으로는 우리에게 각인된 생존법이다. 추사 김정희가 북경에서 문화적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선조들이 자랑스러워했듯이 우리는 BTS에 열광하는 백인 소녀의 모습에 어쩐지 흥분하고 마는 것이다.

 

중심세계와 가까워지는 습관은 캐치 업, 즉 따라잡기에 유리하다. 한자문명권 식구인 한국처럼 베트남은 재빨리 중진국이 될 것이다 - 선진국이 되는 건 다른 문제겠지만. 다만 평행이론의 정도는 베트남이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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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광 진시황이 남벌사령관 조타에게 남월 원정을 맡기면서 베트남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조타와 그의 군사들은 현지화되었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진시황처럼 주변세계 정복을 시작했다. 베트남은 처음부터 중국문명 - 즉 외부 고급문명의 이식으로 주변 이웃들과 차별화되면서 시작했다.

 

베트남은 중국을 모방하는 동시에 견제하고, 그 힘으로 자신의 영역(동남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대비는 우리보다 극적이다. 베트남의 주변 문명은 한자문명과 성격도 근본도 다르다. 베트남인의 관점으로는 우리 선조들이 보았던 '오랑캐'보다 훨씬 이질적이고 야만적으로 느껴진다. 여기에 중국과의 거리도 우리보다 멀기에 소(小)중화제국주의를 휘두르기에도 편했다.

 

베트남에게 연못을 지배하는 일과 외부의 바다에서 실력을 증명하는 일은 동전의 양면이자 동의어다. 전쟁 실력이야 증명했지만 먹고 사는 수준으로는 출발이 늦었다. 이제 터져나오려고 하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진 후부터 지금까지 백 수십 년 묵혀온 존재증명의 욕구와 AFC U23의 기적이 맞물렸다. 그 중심에 있는 박항서는 이미 우리의 히딩크 이상의 존재다.

 

경기 내용도 극적이다. 8강전 상대 이라크와 4강전 상대 카타르의 선수들은 이미지로나 피지컬로나 우리가 느끼는 독일 정도다. 두 상대 모두 경기를 뒤집고, 뒤집혀가며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거꾸러뜨리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깟 공놀이'에 있어 의미란 인간의 뜻에 따라 부여되는 법이다. 축구는 그깟 공놀이이지만 유사 전쟁이며 가장 집단적인 스포츠다. 의미는 상대적이다. 우리에게는 지역구 경쟁일 뿐인 AFC U23이지만 베트남인들은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러기에 충분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결승전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베트남은 전국이 뒤집어졌다. TV아나운서는 생중계 중에 눈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도로에서는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들이 웃는 얼굴로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다. 우리의 2002년처럼 베트남은 올해의 응원인파를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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