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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 국민이 ‘기레기’에 눈뜨게 만든 인터넷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우리사회의 ‘적폐’가 얼마나 심각한지 온 국민이 알게 되었다.

 

정치인, 재벌, 각 국가기관과 이 기관의 고위공직자들이 적폐청산의 우선 대상이 되었지만,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보다 더한 적폐들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세월호 참사 보도 때 그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준 기자와 언론사가 우리사회의 가장 큰 해악이었음을.

 

아니, 어쩌면 인터넷이 보편화 되고, 네티즌들의 힘으로 탄생한 대통령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그리고 그 사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당시 광화문 광장에서 조·중·동 폐간을 외쳤던 시점에 이미 우리 사회에서 기자의 위상과 기사의 신뢰성은 사라졌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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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권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방송 허가권을 받지 못했을 조·중·동이 그 난리를 치면서까지 종합편성채널을 받은 것도 자신들이 발행하는 신문의 위상과 기사의 신뢰성이 진즉 바닥났음을 누구보다 자신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엔 주로 조·중·동의 폐단이 부각됐지만,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겨레·경향·오마이뉴스도 ‘가난한 조중동’이라며 오히려 조중동보다도 못한 평가와 취급을 받고 있으니 ‘제대로 된 언론이 없다’는 시민들의 지탄이 꼭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왜 그럴까? 그에 대한 원인과 분석 글은 이미 차고 넘치고, 시민들은 벌써부터 알고 있다. 그간 우리사회의 기득권으로서, 또 자칭 엘리트라고 하면서 언론이 부려왔던 만행과 폐단 그리고 언론 스스로 ‘가오’ 떨어뜨리는 일인 줄도 모르면서 쌓아온 ‘목불인견’의 세월을. 정도의 차이는 있겠고, 그 중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언론사와 기자들 사이에 자리 잡은 관행과 문화가 ‘후진’ 것은 매한가지다. 얼마 전 미디어오늘에서 보도된 「‘장부 달고’ 밥 먹는 청와대 기자들이 있습니다」라는 제하의 기사만 봐도 그 단면을 짐작할 수 있다(링크).

 

부끄럽지만 필자의 지난 '기자'로 불린 세월 10년을 쓰기로 했다. 필자는 꼭 주류 언론이 아니더라도 나름 체계가 잘 갖춰져 있고, 기자 교육을 잘 시키고, 회사 재정도 어느 정도 넉넉한 언론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게 아니다. 그래서 나쁜 언론의 폐해를 누구보다 더 고스란히 체험했다. 필자의 지난 10년 기자 생활로 언론계의 모든 상황을 추론하거나, 짐작, 예단, 분석, 평가 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또 하나의 폐단’ 내지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경험을 풀기로 하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는 것 같아 ‘쪽’팔리기도 하고, ‘가오’도 상하지만, 그래도 지겨운 만큼이나 애정이 있고, 한 때 누구보다 제대로 된 기자로 살아보고 싶은 열망이 컸던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언론계가 좋은 쪽으로 나아지고, 앞으로는 점차 ‘기레기’, ‘기발놈’, ‘기발년’이라는 비속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자 경험’을 털어 놓는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인터넷 신문사도 늘어났고, 공론장의 확대, 정보의 수평화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지만, 인터넷 신문이 늘어나면서 기사의 신뢰도는 더 하락되었고, 기사의 왜곡과 조작이 더욱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네티즌의 힘을 업고 탄생한 참여정부의 인터넷 언론사에 대한 전폭적 지원이 언론사를 다양하게 만들었지만 또 빠르게 종이신문을 비롯한 구미디어의 하락 뿐 아니라 기사 콘텐츠만으로 자체수익이 만들어지지 않은 인터넷 언론사의 자생력을 키워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서프라이즈에서 파생된 ‘데일리서프’, ‘go뉴스’를 비롯한 수많은 인터넷 언론이 창간됐다가 업력 5년을 못 채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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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무 생각 없이 발 들인 언론계

 

필자가 기자라고 불릴 수 있는 언론사에 입사한 건 인터넷 언론사의 황금기를 지난 2008년 8월이다. 이전까지 언론사 기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 시험을 딱 1년 더 공부하다 접었다. 힘든 현장 일을 하는 부모님에게 언제까지고 고시공부를 뒷바라지 해달라고 할 수 없었고, 고시를 접고 나서는 별 다른 꿈이 없었다. 그렇다고 일반 회사는 들어가기 싫었고, 이후엔 여군 학사장교를 지원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3군 사관학교에서 여학생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 있는 중상위권 대학, 그것도 3군 사관학교랑 자매결연을 맺었던 필자가 나온 여대 출신들은 특별한 이유가 아닌 한 어지간하면 학사장교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었는데, 필자의 가정사와 IMF 이후 취업난 등으로 여군학사장교 지원자가 많아지면서 필자의 자리는 없었다.

 

어떻게 하다 인터넷 소설 게시판에 소설을 올려 출판 계약도 하고 e-북도 몇 권 출간했지만, 작가로 생활을 해결하며 살기에는, 그것도 장르문학의 작가로 살기에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소설가로서 특출난 글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어학원 선생님으로도 일 해보고, 지인의 소개를 통해 언론매체 인터뷰 프리뷰(인터뷰 녹취록을 윤문 없이 그대로 푸는 것을 프리뷰라고 한다) 등의 알바를 하면서 언론사와 얄팍한 인연을 맺긴 했었다. 딴지일보의 딴지이너뷰 프리뷰도 했었는데, 이 사실은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도 모른다.

 

어쨌든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에 열심히 다니면서, 조중동 사옥 앞에서 ‘폐간하라!’고 소리를 지르기도하다가 어느 날 ‘잡코리아’에 들어가 언론사 취재기자를 모집하는 구인공고를 살펴보았다. 내가 알고 있던 언론사 외에도 수많은 인터넷 언론사, 지역 언론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에서 몇 군데 언론사에 지원을 했다. 20대 중반 처음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인터넷 신문사에서 정치부 담당 인턴 취재기자를 모집하는 언론사에 메일을 보내놓고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류 지원을 하고, 1차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해 하는데, 정작 당시에 필자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자고 하니, 좋은 줄도 모르고 덤덤했다.

 

 

 

3. 국회출입기자 ‘점프’ 뛸 수 있는 기회다?

 

심지어 서울의 어느 지역 언론사에 지원을 했는데, 이력서에 개인 휴대폰 번호 한 자리를 잘못 적어 넣은 줄도 모르고 있던 적도 있었다. 그때 지원했던 언론사 편집국장이 면접 보자는 연락을 휴대폰으로 하다 안 되니 재차 집으로 전화를 했었다. 아버지가 받아서 그 편집국장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 놓아 기자가 다시 연락해 면접을 보기도 했다.

 

그 편집국장이 면접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휴대폰 번호도 이력서에 잘못 적나 궁금했다. 그래서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었다”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당시 편집국장의 조언 아닌 조언이 정치부기자로 발을 떼는 계기가 되었다.

 

“기자로 성공하고, 좋은 언론사를 가려면 처음부터 수습기자로, 소위 말하는 언론고시를 봐서 입사할 수도 있지만, 다른 루트도 있다. 회사 간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기자 개인의 자질로 평가받는 게 또 기자라는 직업이다. 좋은 언론사를 가고 싶으면 일단 종합지 아무 데나 들어가서 국회출입 기자를 하면 된다. 정치기사를 열심히 쓰고, 취재도 열심히 하면서, 거기 출입하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도 관계를 잘 만들어 가면서 경력만 한 2~3년 잘 쌓으면 좋은 언론사로 스카우트 될 수 있다.”

 

그냥 흘려들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며칠 후 정치부기자 인턴에 지원한 언론사에서 면접 요청이 왔을 때에는 정치부 기자 한번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고 그렇다보니 면접을 보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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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면접 보러 오라고 전화한 국장이 대뜸 “뚱뚱하냐? 키가 몇이냐? 너무 작은 거 아니냐”부터 물었고, “군살이 넘칠 정도로 뚱뚱하지 않고, 키는 보통이다. 165cm는 되니 작은 편이 아니다”라고 하니 그 쪽에서는 “그럼, 내일 면접을 보자. 국회로 오라. 웬만하면 뽑을 테니, 집에 노트북이 있으면 들고 오라”고 했다.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생활을 해보거나, 어디 정식으로 취업하기 위해 입사지원을 해보고, 면접을 봤던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별 일 아니라 여겼고, 또 적지 않은 나이에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다음 날 오전 10시 국회로 찾아갔다.

 

그렇게 얼렁뚱땅 언론계에 발을 들였다. 어느 직업이든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아, 업무를 하는 게 왜 중요한지를 이후 기자생활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경험이 쌓이고, 연차가 쌓이고, 뭔가를 알면 알수록 기자생활의 시작에 대해 아쉬움과 회한이 드는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언론사들이 어떻게 양아치 짓을 해서 기업과 어리숙한 사람들의 ‘삥’을 뜯어 생활하는지 그리고 정의로운 척 하는 언론인들이 얼마나 위선에 쩐 삶을 사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게 되는 ‘개미지옥’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