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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노다리 시내와 미디 운하 대호수

 

전 연대는 카스텔로다리 시내에 위치한 성당에 집결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영향으로 연대원은 의무적으로 성당의 미사에 참여했다. 저녁 시간에 이뤄진 미사는 신선하고 신성했다. 나의 첫 신앙이 가톨릭이었으므로 어색함은 없었지만 이슬람과 불교 등의 종교는 자발적 요청에 의해 제외되었다. 전 연대원이 참석한 미사는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분위기는 신비로웠다. 고딕 양식의 성당 내 궁륭과 파이프 오르간에서 쏟아져 나오는 음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에 전율이 일기도 했다. 아이들이 나와서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 코러스로 찬송가를 부를 땐 그 신성함이 극에 달했다.

 

천 년 역사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수놓는 빛의 향연과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 천오백 년 동안 지켜진 고딕 건축물의 육중한 아름다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천상의 세계가 이런걸까... 가톨릭 신자로서 경이로웠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건축물이 신비로웠다. 200년의 건축 기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로서도 경이로웠다.

 

경상남도 사천이 행정 구역인 서포면 야산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조그만 마루로 된 성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동네 소녀 지경이를 짝사랑하던 촌놈이 거대한 고딕 양식의 성당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천주교 신자 몇몇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외인부대원들의 안위를 위한 축복이 끝나고 미사도 끝났다.

 

부대에서 4km에 위치한 시내 중심의 성당에서 돌아온 우리는 전 연대원을 위한 파티 장소로 다시 집결했다. 우리 소대는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끼어 있었기 때문에 교육대에서의 일정이 2주일 연장되었다. 크리스마스까지 예수 탄생 장식(Crèche:크레쉬)을 각 소대별로 만들었고, 장기 자랑거리를 만들어서 준비를 했었다. 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소대장을 위한 그림, 중대 클럽 등에 그림을 그리면서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원치 않는 그림을 그리는 건 고역인데, 빨리 그리라거나 어떻게 그려 달라거나 하는 요구 사항 없이 나에게 위임했다.

 

연대는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 전 연대원이 21km 크로스컨트리와 수영 시합을 했고 종합 점수에서 우리 중대가 1등을 했다. 그런 우리 소대를 보고 다른 소대장이 부러워했다. 수영에서 1등을 한 러시아 친구가 있었고, 21km 크로스컨트리에서 4등을 한 동료도 있고, 그림쟁이도 있다고! 그 둘은 생긴 것도 순하고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는데도, 각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준비된 크레쉬는 저녁 파티가 끝나면 각 중대를 자유 방문하며 구경하고, 장기 자랑은 저녁 파티 때 무대에 올라 경연한다고 일주일 동안 연습을 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동료들의 끼가 드러났다.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 신기했는데 고참들 흉보는 친구들, 훈련 중의 일화를 연극의 한 토막으로 만든 친구들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부끄럽거나 어색함이 없었다. 각 팀별로 맡은 임무가 있었으므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나는 그림이나 그리는 한량으로 아무런 통제 없이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다.

 

드디어 그날이 왔고 파티장이 준비된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리 소대원들은 이미 친해져서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을 때였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임에도 불구하고 언행에 귀한 태가 났고, 배려심이 깊어 속 좁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곤 했다.

 

각 중대별로 마련해 둔 식탁에는 그 비싸다는 바닷가재가 메인으로 올라왔고 겨울철 별미인 굴 요리도 곁들였다. 레드 와인은 물론, 샴페인까지 놓여 있었다. 각종 음료까지 한 상 가득 진수성찬이 마음을 겸손하게 했다.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부대원들에게 차별 없이 같은 음식으로 내놓았기 때문에 ‘가족과 같은 연대 의식’이라는 명예헌장처럼 연대 의식이 생기는 듯했다. 그랬다. 배고팠던 우리는, 케피를 쓰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외인부대원이라는 거대한 가족의 품 안에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와인은 얼마든지 리필해서 마실 수 있었다. 레드 와인은 외인부대가 직접 운영하는 ‘푸이롭비에(Puyloubier)’에서 공수해 온 것이다. 오바뉴 사령부에서 빨간 견장을 달면 반드시 가야 하는 그 포도 농장인데, 그때 먹었던 꿀맛 나는 감미로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변 풍경이 일하기 싫을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프랑스의 시골은 어느 곳 하나 가꾸지 않은 곳이 없고 여유가 넘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 곳에서 노동을 하면 노동이라기 보다 목가적인 분위기의 아름다움! 마치, 밀레의 ‘만종(현실은 배고프고 힘든 노동이지만 그림은 목가적인)'이 보여주는 현상이랄까!

 

그곳도 외인부대라는 거대한 가족의 품 안이니 그 카르텔이 얼마나 대단한가! 사실, 외인부대는 여러 곳에 휴양지를 가지고 있었다. 마르세유 구 항구의 말무스크 해변, 피레네의 포미게르, 라 씨오타, 마이요트 포함해서 휴가 때나 전역해도 언제든지 저렴하게 머물 수가 있었다. 물론, 여자 친구나 가족을 동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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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이로비에의 외인부대 포도농장 ‘Domaine Danjou’

 

모든 자리가 준비되자 연대장 ‘피쇼 드 샹플러리’ 대령이 마이크를 잡고 전 연대원들을 향한 크리스마스 연설을 시작했다. 식사를 하기 위한 예식도 거행하기 시작했다. 예식 때 실행하는 이 의식은 외인부대의 오랜 전통이다. 아프리카 전장에서 가끔 와인보다 물이 부족할 때 와인 몇 방울로 컵을 헹구고 마시면, 장교 전용 요리사나 군가 선창하는 대원이 음을 잡고 전 대원이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를 ‘Le Boudin(순대)’라 했다.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춰 느린 걸음으로 샹젤리제를 행군한다.

 

연대장의 큰 체격에 걸맞은 우렁찬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제4 외인연대, 내 구령에 맞춰 차렷!”

 

손바닥이 허벅지를 때리는 소리가 식당 안에 울렸다.

 

“먼지 넘길 준비!”

 

동시에 모든 병사가 앞의 잔을 들었다.

 

“넘겨!”

 

모두 진을 비워 머리 위로 털고 테이블에 올려놓고 군가를 불렀다.

 

 

“자! 여기 순대가 있어! X3

 

알자스 사람, 스위스 사람, 로렌 사람 거야!

 

벨기에 놈들 건 없어! 벨기에 놈들 건 없어!

 

그놈들은 병역 기피자들이야!”

 

연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자리에 앉아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 실시!”

 

“메르씨 몽 꼴로넬!”

 

샴페인 잔, 와인 잔, 물 잔이 각각 따로 있는 데다가 프렌치들이 알려주는 대로 먹으려니 잔 갈고 수저 갈다가 볼일 다 보겠다 싶었다. 이것도 익숙해져야지 생각했지만 전혀 지키지 않았다. 처음 마셔보는 샴페인, 와인보다는 항상 마시는 맥주가 최고지만 프렌치들은 전통인지 항상 그 룰을 지켰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자리가 무르익자 각 중대별로 장기 자랑이 이어졌다. 어느 중대는 기타를 들고 나가 노래를 불렀다. 장교들을 흉내 낸 연극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어느 소대는 연대장을 무대로 불러내어 카드 마술을 보여주었다. 그 마술이 너무 신기했고 마술사가 신병인데도 마치 유명한 마술사처럼 쇼맨십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모두들 몰입하며 빠져들었다.

 

연대장이 각 중대별 자유 시간을 주었다. 술에 제한은 없었고 한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각 중대의 장기자랑이 끝나자, 모두 일어서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장교가 와도 있는 자리에서 손에 술을 들고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축제의 날이었기 때문에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군가를 합창하기도 하고, 소대장과의 대화가 자유로웠으며, 중대장과도 대화를 원하면 절차를 밟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대화가 가능한 날이었다. 술 취한 대원들의 실수가 있어도 너그러웠다.

 

내일은 기상 시간 없이 오늘 자유가 주어졌다. 상식적으로 군대 같지 않은 환경이 내게 딱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색했다. 맞지 않는 옷인데 맞추어 입을 수 있는 것 같은 환경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가까운 동료들과 만찬을 즐기며 입에 맞지 않는 샴페인과 와인, 레몬즙을 짜서 먹는 굴을 보며 초장이란 소스를 발견하지 못한 프렌치들을 야만인이라고 속으로 비웃었다. 내게 맥주의 첫 느낌은 염소 오줌이었다. 염소 오줌이 어떤 맛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느꼈다. 소주를 마시면서 첫 잔부터 세상 최고의 맛을 느끼고 ‘캬~’ 하면서 김치 한 입에 입술을 훔치던 그 맛. 그 맛이 너무 쓰기 때문이란 걸 알면서도 익숙해지게 된 것은, 습관화되는 것이지 정해진 것은 아니다. 와인과 샴페인의 맛도 세월이 습관화 시켜줄 것이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위대한 외인부대 패밀리가 만들어 내는 위력이, 인생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경험임을 서서히 인지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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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파티

 

성대한 파티가 끝나고 치우는 시간은 금방이었다. 그 다음은 각 중대별로 방문하여 크레쉬 작품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부대원들은 손에 맥주를 들고 담배를 피우면서 각 중대를 방문해 크레쉬 작품을 구경하기도 하고 클럽에 모여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렇게 각국 친구들끼리 모여 놀 때, 한국 사람들도 안 선배를 위주로 모였다.

 

안 선배는 저격수(PGM) 교육을 받으러 와 있었고 교육이 끝나면 중사 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엄청나게 빠른 진급이었다. 나이도 서른 중반인데 20대 애들과 경쟁해서 체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빠른 진급을 하는 것이 독보적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지원병 중대 포함해서 모두 10여 명이었다.

 

처음으로 안 선배를 통해 실질적인 외인부대에서의 훈련과 각각의 연대별 특징, 3년 근무 시 의무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병과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들으면서 이상하게도 너무 이해가 잘 되어 '프랑스어가 이리 쉬웠어?'라고 생각했다. 깨닫고 보니 아! 한국말이구나!

 

모두 술을 마셨음에도 흐트러짐 없이, 아무런 사고도 없이 축제의 날을 보냈다. 입대 이후, 처음으로 늘어지게 잠을 잤다. 아침 식사 후, 피엑스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서로서로의 소식을 통해, 앞으로 선택해야 할 특기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내 뒤 기수로 들어온 친구들은 공수부대 707 출신인 정환이를 포함해서 모두 소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공수부대나 해병대를 나온 친구들에게 외인부대의 훈련은 식은 죽 먹기라고 했다. 전문성에 있어서 디테일하게 진행되는 과정은 외인부대가 뛰어난데 비해, 한국의 군대는 육체적인 훈련과 정신적인 훈련(?)이 강하다고 했다. 장단점이 있다고 했지만 비교할 수 없는 나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고작 4개월 기본 훈련을 받으면서 전체를 비교하기엔 이르기도 했다. 모두의 고충은 나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어였다. 한국인들은 작은 체격이긴 해도 다부지고 눈치도 빠르고 다들 군대 생활을 한 탓에 모두들 소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각 전투 연대에서 병장이나 병과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들은, 최소 3주에서 최대 16주 동안 교육을 받게 된다. 40가지 전공 분야 중에서는 보편적으로 통신병, 정보 체계 운용/정비병, 행정병, 정보병, 요리, 운전교육, 긴급 구조, 운동 교관, 운전 교관, 차량 정비 등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저격수는 미래 제대 후에 민간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병과가 아니었으므로 나중에 따로 병과를 받아야 했다.

 

황홀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부대 근무 중에 우리 소대는 3개월 동안 배운, 불어, 사격, 화생방, 눈 가리고 총기 분해 조립, 전투 행군 중 보고 체계, 수류탄 투척, 8km TAP, 전투 장애물 통과, 5일 동안 150km 실전 전투 행군에 돌입했다. CTE, 전술 기본 자격이라 부르는 시험이었다.

 

1998년 새해가 올 때까지 먼저, 사격과 불어 테스트를 끝냈다. 불어는 서술 위주, 그림을 보고 맞는 단어와 상황을 선택하거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6등급 가운데 4등급인 외인부대 최고 수준의 점수를 받았다. 6등급은 박사, 5등급은 학사, 4등급은 불어권으로 분류되고 ‘불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수준이다. 마지막 문장 쓰기에서 교관이 완성된 답안지를 읽어보더니 ‘4등급’이라고 말했다. 2등급이 보통 받는 수준인데 4등급이면 불어권 수준이라 내가 웃으며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시험을 잘 봤을 수는 있지만, 내 수준은 2등급에 불과했다.

 

실내 사격장에서 실시된 사격 시험은, 처음 영점을 잡고 근무를 서기도 했던 총으로 25m 속사 사격까지 영국 동료와 함께 1등을 했다. 전투 장애물 통과에서 3등을 했고, 8km 공수부대 군장 구보(11kg)를 60분 안에 통과하는 테스트도 몇몇만 제외하곤 모두 성공했다.

 

다시 레싹 농장으로 이동해서 총기 분해 조립을 눈 가리고 실시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거의 모두가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시험을 망친 것은 행군 중, 상황 보고 때였다. ‘내 팔이 가리키는 방향’의 그 훈련에 대한 시험이었다.

 

팀장이 나를 앞세워 팀을 리드시켰다. 한참을 가는데 팀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게 뭐야?”

 

티토 중사가 수통을 들고 내게 물었다.

 

“수통입니다.”

 

나는 수통을 보았지만 '저게 왜 저기 떨어져 있지?'라고 생각하며 지나쳤었다. 티토 중사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동료들은 뒤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중사는 수통이 있는 것을 자기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보고는 커녕 그냥 지나쳤으니 보고를 하라고 눈빛으로 말했다. 이것을 상황 보고인 줄 알고 수통을 수류탄으로 보고하라는 뜻으로 해석한 나머지 다시 수줍게 ‘수류탄!’이라고 말하자 모두들 어이없다고 웃었다.

 

교육을 받았을 텐데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이후로도 이 보고를 하지 못했다. 몇 년이 흘러 본대에서 전 연대 훈련을 할 때, 이전에도 해내지 못했으니 그 상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어 교육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한국 군대를 경험했던 친구들이야 상황을 보고 이해했을 텐데, 중사들이 1등이라고 하던 1등이 뒤로 밀려나는 소리가 수치심과 더불어 느껴졌다.

 

내가 오바뉴 사령부에서 했던 거짓말대로 한국에서 해병대 정도나 다녀서 불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있었다면 1등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텐데, 실제로 훈련을 받아보니 체력과 운동 신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전투력은 꽝이었다. 곧장 병장을 달 수 있는 풋풋에 올리려 했던 소대장의 의도가 이 시험의 결과로 인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불어 쑥맥인 신병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훈련이 있다면 훈련의 문제도 있는 것이겠지만 어쩌겠는가! 1등은 나의 경쟁자였던 영국 동료, 베트랑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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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인부대 사령관 ‘장 모랑’ 장군의 3중대 Raissac 농장 사열

 

모든 테스트가 끝났을 때, 전 연대원들이 농장으로 집결했다. 연대 행군에 묻어, 연대 작전을 펼치면서 마지막 행군을 준비했다. 어디서부터 행군해 왔는지 땀에 젖은 부대원들의 얼굴이 모두 피곤했다. 내가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하자 광수가 옆구리를 찌르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를 주었다. 광수는 150이 겨우 넘는 조그만 키인데도 다부지고 똑똑했다. 자기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리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나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고 우리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그저 옆에 묵묵히 있기만 했다. 그런 광수는 가끔 세심하게 나를 챙겼고 문득 깨닫고 보니 서로서로를 챙겨 주고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

 

전 연대원은 각 야영지에 도착해 물 한 병으로 샤워를 끝내고 모닥불을 피워 바베큐를 준비했다. 중대가 행군을 하고 야영을 할 때도 가끔씩 바베큐 파티를 하곤 했는데, 맥주와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행군이 아니라 파티를 하기 위해 먼 거리를 걸어온 것처럼 야영을 하며 군가를 불렀다. 외인부대의 군가는 밤에 더더욱 어울렸다. 모닥불과 함께하니 그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었다. 중대 규모가 120여 명인데 4연대 인원은 공식적으로 1170명. 그중에 연대 근무자를 제외한 전 인원이 참여한 야영지의 밤은 군가 소리와 함께 깊어갔다.

 

야영을 하고 아침이 되자 하나씩 일어나 전투 식량으로 아침을 때우고 행군 준비를 했다. 전투 식량 한 통이 1일 치 식량이다. 아침은 커피와 비스킷으로 때우고 점심과 저녁에 먹어야 했는데, 이미 위가 작아져서 그런지 배고픔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 후 야영을 정리하고 행군 준비를 했다. 이미 해 본 행군이지만 5일 동안 전 연대원이 참여하는 전투 행군이니 기대가 많았다. 행군은 나에게 즐거운 일이었다. 뛰다시피 걸어야 하는 것이 힘들긴 했어도 , 프랑스의 산천을 돌아다니는 것이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전투 행군이었기 때문에 실전을 펼치듯 진행되었고, 적은 사령부 중대(C.C.S)가 맡아 전 중대들의 추격을 받았다. 3개의 지원병 중대(C.E.V)와, 하사관 교육 중대(C.I.C), 특수 교육/병과 중대(C.I.S)가 아군이 되어 적을 추격하는 훈련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서도 이어지는 산악 훈련, CAYLUS, CENTAC, CECAP 등에서 이루어지는 훈련 과정의 마지막은 전투 행군으로 거의 잠도 안 자고 3~4주간 진행되는 훈련 끝의 마지막 주는 항상 행군과 전투를 행하면서 진행되는 시스템이 같았다.

 

행군 중 휴식 시간이 되면 티토 중사가 전 대원을 둘러보며 발의 상태를 살폈다. 이미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에 무리가 간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어주며 담배를 피웠다. 무리한 동료들을 위해 배낭을 대신 메어주고 총을 들어주면서 행군을 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짜증이 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보초 교대를 서는데 졸다가 하비 병장에게 들켰다. 조금 반항했더니 다음 날 소대장까지 보고가 들어갔는데도 징계가 내려지지 않았다. 하비의 갈굼이 있기는 했어도 봐줄 정도였다.

 

행군은 프랑스의 드넓은 초원을 걷고 걸어 야트막한 야산을 건너고 개울을 건너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헤질 때가 되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마지막 날까지 프랑스 남서부의 시골 마을을 저인망 훑듯이 다녔다. 항상 같이 다니는 중대 트럭에서 맥주를 사 먹기도 했다.

 

대원들은 간식거리로 프렌치 ‘살라미’를 먹기도 했는데, 먹어 보니 기름기도 많고 느끼해서 먹는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배고픔은 무섭고, 습관은 더더욱 사람을 바뀌게 만들었다. 처음에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한가운데 있는 것을 스스로 느끼면서 ‘정의된 선호도’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 마늘을 얇게 썰어 와인과 함께 먹는 것이 환상의 조합임을 4년 차쯤 알게 되었다. 외인부대의 주식 중 하나인 카스텔로다리의 명물인 까술레도 자주 먹었다. 소시지와 콩, 배추로 만든 이 음식이 당나귀 죽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대체 유명한 이유를 몰랐지만 자주 주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프랑스는 음식으로 유명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먹을 것은 오로지 스테이크나, 메르게즈라고 불리는 술 안주용 돼지 소시지가 입맛에 맞았다. 프랑스 음식이 유명한 것에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었다.

 

전투 행군이라고 해도, 실전과 같은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 상황을 만들어가며 즐기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행군 자체로 이미 힘든 훈련이라 여기는지 내게는 애들 장난처럼 한심해 보였다. 3년 동안 3수를 해가며 들어온 외인부대의 유명한 본색이 고작 이런 것인가 생각할 정도로 내게는 한심하게 진행되었다. 훈련의 강도도 아침 구보를 제외하면 힘든 게 없었고, 특수부대라고 여길 만큼 특별한 것을 찾지 못했다. 내게는 행군이 프랑스 산천을 아무런 걱정 없이 돌아다니고 바베큐 파티로 야영이나 하는 여행 같았다. 아름다운 프랑스 산천을 구경하는 것은 생각 없이 군생활을 하던 내겐 너무 좋았다. 나의 불만은 그것에 있는 듯했다. 특수부대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행군 중에 몇몇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트럭에 실려 의무대로 이송되었고, 모두가 지쳐갈 때쯤 4연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60여 명이던 소대원은 40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중대장이 중대 연병장에 테이블 위에 맥주와 땅콩을 두고 중대원을 소집했다.

 

“3중대원들 모두 수고했고 자랑스럽다. 몇몇 부상자가 있지만 항상 있어왔던 일. 여러분이 자대 배치받기 전, 마지막 행군을 무사히 수행한 것에 대해 축하한다. 중대 차렷!”

 

“먼지 넘길 준비!”

 

“넘겨!”

 

중대는 행군을 마친 후 진행하는 ‘뒤풀이(Pot)’를 진행하며 다시 맥주를 마셨다. 뒤풀이는 간단하게 마시고 해산했다. 내무반으로 들어가 일사불란하게 샤워를 끝내고 총기 청소를 끝냈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던 순간이 지나고 고요가 찾아온 것처럼 다시 멍해졌다. 무언가 한 단계 업된 듯 뿌듯한 자부심도 일었다.

 

우리 소대는 교육대 마지막 일정인 운전면허 시험만 남겨두었다. 그러면서 소대원들의 병과와 자대 배치에 대한 마지막 확인 절차만을 남겨두고 겨울을 넘어가고 있었다. 카스텔로다리는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겨울이라 해도 겨울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입고 있는 겨울옷이 더웠다. 자주 안개가 끼는 연대의 아침 분위기 때문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침마다 이뤄지는 구보(푸팅)덕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뱃살은 사라졌고 위도 작아졌다. 어느새 신병 외인부대원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자부심과 연대 전체의 구석구석도 눈에 익었다. 점점 고향의 모습도 잃어갔고 한국에서의 기억도 잊어가며 새로운 동료들의 이름과 생활 형태가 자리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운전면허 시험은 이론과 실기를 동시에 실시했다. 이론 공부는 물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운전 기억을 더듬어 그림과 상황을 파악할 뿐, 합격할 길이 난감했다. 처음 군용 트럭을 타고 실습을 나간 날, 신호등을 찾지 못해 빨간불에도 지나가다가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고 신호등이 어디 있냐고 한참을 따졌다. 그러고 나서야 정면 시야 위쪽이 아니라, 건널목 양옆으로 키 높이보다 약간 높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합격할 길이 없던 이론 공부는, 가르쳐 준 교관의 노하우가 있어서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이론 시험에 통과했다. 우리나라처럼 T자 통과 같은 거 없이 모두 시내 실전에서 이뤄졌다. 로터리 통과, 신호등 준수, 급정거에 이르기까지 3주 동안의 실습도 무사히 통과했다. 통과는 했지만 어떻게 합격했는지 모르게 모든 것이 지나갔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나오자, 전 연대원이 중대별로 시내에 영화를 보러 갔다. 군인 단체 관람...

 

다음 날 아침, 여명이 터 오기 전에 연대 집합이 있었다. 연대장 ‘피쇼 드 샹플러리’로부터 사격 만점 받았다고 미리 예고도 없이, 나와 영국 동료 베트랑이 전 연대원들 앞에서 연대장의 부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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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장에서 상장을 수여받는 지원병. 바뀐 전투복이다.

 

“지원병 준! 앞으로!”

 

“옛 대령님!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나는 열에서 이탈해 대령 앞으로 가 보고를 시작했다.

 

“지원병 준! 5개월 근무, 3중대 상사 알브레슛의 소대, 특기 소총수! 명령만 내리십시오. 몽 꼴로넬!”

 

대령이 상장을 수여했고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수여식이 끝나자 뒤로 돌아 소대에 합류했다.

 

우리 소대는 아침부터 중대장 면담이 있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훈련의 성적 순서대로 중대장 사무실 앞에 섰다. 어느 연대로 자대 배치를 받게 되는지, 병과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4연대에서의 최종 면담인 날이었다. 나는 8번째, 16.97/20, 평가는 '아주 훌륭함'이었다. 한국 사람들 중에 95년도에 같이 입대했던 38살의 UDT 출신이 6등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대게 순위권 안에 들었다. 그 정도로 훌륭한 군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1등은 의외로 존재감이 없던 폴란드 동료 노바콥스키가 섰고 풋풋에 내정되었다. 광수가 2번째, 베트랑이 세 번째였다.

 

내 차례가 되어 중대장실에 들어가니 소대장도 자리 잡고 있었다.

 

"준, 성적이 아주 좋아! 만족해. 그러나 불어를 더욱 잘하게 되면, 최고의 외인부대원이 될 수 있을 거야! 병과는 무얼 할 건지 정했나?"

 

"저격수입니다. 중대장님."

 

"저격수는 병과가 아냐. 복수 지망에 보니 행정병이던데 컴퓨터는 잘 다룰 줄 아나?"

 

"모릅니다. 중대장님! 그래서 배우고 싶습니다."

 

"행정병은 아이큐가 12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준은 11이야. 사령부에서 아이큐 경신 시험을 쳐야 해! 이해했나?"

 

"옙. 중대장님."

 

"어느 연대에 가고 싶나?"

 

"2e REP(제2 외인공수연대)입니다."

 

"좋아 준! 2e REP! 나가봐도 좋아!"

 

"나가 보겠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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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애묘, 40대를 위한 딴지미팅 목적으로 가입! 2018년 초 2개월간 탈퇴 후 재가입. 딴지 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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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넘겨 꿈과 희망 잃은 독거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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