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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가 소리 없이 걷는 검객이라면 칸트는 전형적인 선비다. 스피노자의 철학은 차분한 칼집 속에서 언제든 폭발할 준비를 마친 금속질의 날카로움이다. 반면 칸트의 철학은 종합하고 정리하고 포용하며 구축한다.

 

스피노자에게는 기개가, 칸트에게는 지조가 있다. 스피노자의 개인은 무심하고 냉소하며 필요하면 칼날을 뽑는다. 칸트의 개인은 거짓을 모르는 강직한 존재다.

 

스피노자는 빛나는 우상이다. 신도에게는 흠모의, 이교도에게는 저주의 대상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모두의 신임을 받는 교장 선생님이다. 역사상 칸트처럼 많은 존경을 받는 서양 철학자는 없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에게 흘러들어갔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이 유명한 평가 그대로, 칸트는 서양 철학의 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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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칼리닌그라드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쾨니히스베르크다. 프로이센의 수도이자 왕도다.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고 제국을 세웠을 때도, 제국의 수도는 베를린이었지만 정신적 수도이자 왕도는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이름 자체로 왕(쾨니히)의 도시(베르크)란 뜻이다.

 

독일어 어원에서 부르크는 평지, 베르크는 산지를 뜻하는데 역사에는 변방의 고지대에서 평지를 내려다보던 후발 주자 세력이 결국 헤게모니를 쥐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센이 발원한 쾨니히스베르크 역시 독일 문화권의 동북쪽 맨 끝의 시골에서 시작된 도시다. 진나라는 서쪽 변방에서 시작해 진시황제 대에 중원을 통일했다.

 

독일은 2차 대전에 패배하면서 가장 소중한 곳을 잃었다. 바로 현재 독일 문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의 본토다. 본토 대부분을 승자인 러시아와 피해자인 폴란드가 나눠 가져갔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의 도시 칼리닌그라드가 되었다.

 

독일은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쾨니히스베르크를 포함해 프로이센 본토를 영구 포기하겠다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이곳에는 독일의 기업과 기관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진출해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1724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왕도에서 제왕이 탄생했지만 왕좌에 오르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철학자의 아버지는 요한 게오르크 칸트였다. 그는 말안장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아이를 교육시킬 수는 있지만 모자람 없이 지원해 주기에는 버거운 전형적인 평민 중산층 가정이었다. 칸트는 11명의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결국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형제자매는 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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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사실이 있다. 칸트의 철자는 Kant다. 헌데 요한은 자기가 만드는 말안장에 브랜드를 찍을 때 Kant가 아닌 Cant라는 메이커를 남겼다. 이게 바로 스코틀랜드식이라는 이유였다.

 

칸트의 아버지는 '우리 집안은 스코틀랜드에서 왔다'고 믿었고, 칸트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웬걸. 학자들도 속았건만, 미심쩍어서 연구해 보니 칸트라는 성은 칸트바겐이라는 동네에서 왔다. 칸트의 뿌리는 ‘쿠르스’족이라고 하는 유럽 중부 해안가의 소수 민족이다. 아마도 현지에서 천대받는 혈통의 출신이다 보니 먼 스코틀랜드에서 왔다고 족보 조작을 했거나 기억의 왜곡이 일어났을 것이다.

 

칸트 집안은 수공업자 가족답게 개신교, 그중에서도 경건주의를 따랐다. 열심히 일하고 금욕하며 근검절약하는 풍조다. 그 방식이 매우 딱딱했던 모양이다. 칸트는 엄숙한 환경에서 자라났고 성장기에 몸에 익은 기질을 평생 유지했다.

 

철학자들이 늘 그렇듯 칸트는 머리가 좋았다. 학자나 법관을 시켜 집안의 격을 높일 기회였다. 칸트는 가업을 물려받거나 다른 장인의 도제로 들어가는 코스에서 제외되었다.

 

칸트의 본명은 에마누엘이다. 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중에 히브리어를 공부하면서 자기 이름의 원래 형태가 구약에 나오는 ‘임마누엘’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는 뜻이다. 에마누엘은 임마누엘의 독일어 버전. 다 같은 말이지만 굳이 이름을 임마누엘로 개명한다.

 

그래 봤자 완벽한 동의어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개명이 아니라 원형을 복원했달까. 칸트, 이 양반이 얼마나 심한 원리원칙 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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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라났다. 그의 키는 고작 155cm였다. 마르고, 운동 못하고, 골골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안색은 창백하고, 등도 조금 굽었다. 암기력 좋은 두뇌를 어필하겠다는 듯 이마는 넓었다.

 

아버지 요한은 말안장을 만들어 번 돈으로 칸트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보내 수학과 철학을 전공하게 했다. 노동 계층 집안에서 목돈을 쓴 셈이다.

 

칸트는 대학을 6년이나 다녔다. 공부를 못 해서가 아니라 공부하고 싶은 게 많아서였다. 우수한 학생이었던 만큼 이대로라면 순탄하게 대학교수가 될 것만 같았다. 지방 법원의 고문이나 시의원 같은 직책이라도 겸하면 어엿한 하급 귀족 가문이 된다. 그러나 인간사 뜻대로 되던가. 요한은 아들이 22살 때 사망했다. 이 해에 칸트는 대학을 졸업했다. 박사 학위는 자력으로 벌어서 취득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배운 게 공부뿐인 칸트는 가정 교사로 취직했다. 목사 집안에서 시작해 백작 가문의 가정 교사까지, 나름대로 승진을 한 셈이지만 그래봐야 평민 가정 교사였다.

 

칸트는 귀족 가문의 말 안 듣는 도련님을 상대로 어떡하면 가르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연구했다. 매사에 학문적 완성도를 추구한 그답게 진지하게 접근했고, 완벽주의 탓에 자신은 아이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데 실패했다고 믿었다. 어디까지나 칸트의 관점이다. 칸트는 쉽게 가르치는 일에 노력한 만큼이나 이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생업과 공부를 병행하다가 1755년, 칸트는 9년 만에 모교로 돌아와 박사 학위를 땄다. 대학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칸트는 야심가였다. 언젠가 철학의 모든 문제를 통합하고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시간 강사와 비슷한 위치인 사강사의 지위로 푼돈을 받으며 극한의 열정 노동에 시달렸다.

 

공부의 신인 칸트는 철학, 논리학, 수학, 물리학, 윤리학, 법학, 신학, 천문학, 지리, 역사, 화학, 광물학 등을 가르쳤다. 아무리 당시의 교수와 강사가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고 해도 이쯤 되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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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가면 '중간만 하라'는 금언을 듣게 된다. 그런데 칸트는 모든 과목의 강의를 지나치게 잘했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거의 무한대의 노동 착취를 당했다. 학교 입장에서도 그를 놀리는 건 아쉬웠을 것이다. 칸트는 요점 정리의 달인이었다.

 

칸트는 강의도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청중을 가장 쉽게, 많은 지식을 가르칠지 연구했다. 비유와 유머를 적절히 섞는 기술도 이렇게 개발되었다. 어찌나 강의를 잘 했는지 소문이 퍼져 다른 대학 학생들이 칸트의 수업에 원정을 올 정도였다. 심지어 자기 전공 수업을 칸트에게 들으러 외국에서 여행 온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정규직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 칸트는 노량진 공시생들의 선조다. 가난한 강사 처지를 벗어나 정교수가 되기까지는 무려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아있었다. 강의의 천재이자 훗날의 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그는 비정규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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