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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랍의 봄, 그리고 카다피의 최후

 

“후세인은 독재자이다.”

 

“카다피도 독재자이다.”

 

“둘 다 나쁜 놈이다.”

 

이 논리를 반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둘 다 나쁜 놈이고, 둘 다 이라크와 리비아를 철권통치했다. 이 둘이 죽자, 이라크와 리비아는 ‘지옥’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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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시절 리비아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실시됐다. 게다가 남녀공학이었다. 세속주의자였던(그렇다고 터키식의 완전한 세속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 독재자가 사라졌다. 덕분에 리비아는 지금 세 조각으로 나뉘어져 피 튀기는 내전 상태에 돌입했고, 유럽은 카다피의 부재로 ‘개판 5분 전’이 됐다.

 

아이러니한 게 카다피를 죽이겠다고 토네이도 전폭기, 라팔 전투기를 동원해 공격했던 유럽인데, 카다피가 죽고 난 뒤 ‘난민’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그동안 카다피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넘어가는 걸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카다피가 재스민 혁명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무렵 리비아 주재 유럽 대사들을 불러 모아 이 같은 경고를 했었다.

 

“이 정권이 몰락하면, 유럽은 아프리카 난민들로 인해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카다피의 말은 현실이 됐다.

 

‘재스민 혁명’에 관해서는 몇 번의 기사를 통해 소개를 했기에 넘어가겠다. 재스민 혁명 초창기만 하더라도,

 

“아랍의 봄”

 

“SNS를 통한 인터넷 민주주의 혁명”

 

“철옹성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 민주주의 봄바람이 불어닥쳤다.”

 

등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찬양했던 게 서방 세계 언론이었다. 정확히 7년 만에 중동 지역은 무간지옥이 됐다. 후세인도 카다피도 각각 자국의 얽히고설킨 정치, 민족, 종교 문제를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다(후세인과 카다피 모두 신정일치 사회를 막기 위해 종교의 정치 진출을 엄격하게 막았고, 그 결과 제법 ‘형태’를 갖춘 근대 국가의 모양새를 가지게 됐다. 독재정부란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재스민 혁명 이후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온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내세워 국가를 통치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방 언론이 말한 ‘민주주의 혁명’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물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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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당시 ‘아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으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내세웠다. 그리고는 3가지 증거를 내밀었다.

 

첫째, 이라크의 WMD(대량살상무기)가 국제사회에 위협이 된다

 

둘째, 이라크가 이제 생화학 무기를 넘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고 있다

 

셋째, 이라크와 알 카에다가 결탁을 해서 9.11 테러를 일으켰다

 

하나씩 논파해 보자.

 

첫째.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가 국제 사회에 위협이 될 거라는 주장

 

이미 한스 블릭스 UN 무기사찰단장에 의해 전쟁 전에 부정되었다.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BBC에 비밀리에 이 대량 살상 무기의 허상을 폭로한 영국 국방부 소속 생화학 무기 전문가였던 데이비드 캘리 박사의 증언과 자살이었다. 당시 캘리 박사는 블레어 총리의 최측근이었던 엘러스테어 캠벨 공보수석이 ‘이라크는 공격 명령을 내린 뒤 45분 안에 생물, 화학무기를 실전에 배치할 수 있다’는 내용을 영국 통합정보위 보고서에 삽입하라는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캘리 박사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영국은 즉시 허튼 조사위원회(Hutton inquiry)를 구성했다. 캘리 박사의 죽음과 이라크 파병을 위해 블레어 행정부가 정보 조작을 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 수사했지만, 허트 조사위는 블레어에게 면죄부를 던져주고 BBC 사장 해임이라는 결과만을 남겼다.

 

미국 역시 이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 CIA와 부시간의 일전이 있었다. 보복적 성격의 CIA 요원의 실명을 거론한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당장 CIA 측에서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불확실한 정보임을 알려줬었다. 한스 블릭스 UN 무기사찰단장이 수차례에 걸쳐 이라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사찰을 실시하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한스 블릭스는 2003년 9월 17일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게 된다.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는 10년 전에 폐기됐다.”

 

부시는 단순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이 주장을 잠재웠다. 점령한 이라크 땅에서 UN 무기사찰단을 쫓아내고, 1천 5백 명의 전문가를 총동원해 2003년 6월부터 5개월간 강도 높은 대량 살상 무기 수색 작업을 벌였다. 그들이 찾아낸 건 몇 개의 농업 비료 공장과 비료 저장고, 그리고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라고 주장하는 종이 쪼가리 한 장뿐이었다.

 

둘째,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거짓말

 

2003년 1월 28일 국정연설에서 공개된 부시의 거짓말은 그의 안보 보좌관인 콘돌리사 라이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이라크의 아프리카 우라늄 구입설을 제기한 부시의 1월 28일 국정연설은… 단지 한 문장 속에 들어간 16개의 단어일 뿐이다.”

 

미국은 끝까지 이라크의 핵무기 제조 관련 거짓말을 생산해 냈지만, 번번이 그 거짓말은 들통나고 말았다. 일례로 미국은 이라크가 농축우라늄 방식의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고강도 알루미늄관의 수입을 제시하였지만, 그 알루미늄관은 로켓포에 사용하기 위해 수입되었던 것이다.

 

셋째, 911테러와 이라크의 연관성

 

침공 당시 미국, 아니 부시가 주장한 이라크와 알 카에다의 연관성에 관한 증거는, 911테러의 주모자 중 하나인 모하마드 아타(Mohammed Atta)와 이라크 정보국 관료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접선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체코 정보국 당국이 그런 적이 없었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리비아, 아니 카다피의 선택은 앞날을 내다본 탁견처럼 보였다. 미국은 없는 핵무기도 만들어 내 한 나라를 박살을 내는 국가였다. 이때까지 카다피는 몰랐다.

 

“미국에게 반기를 들었던 독재자의 선택지는 오직 하나뿐이다.”

 

라는 단순한 진리 말이다.

 

2011년 재스민 혁명이 리비아로 번졌다. 리비아 전역에 시위대들이 들고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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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카다피는 거의 극단에 가까운 조치들을 취했는데(‘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해야 할까? 평소의 미친 짓이 이때가 되면 어떻게 손써 볼 상황이 아닐 정도로 변해 버린다), 유전을 폭파하겠다고 하질 않나, 감옥에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풀어줘서 리비아를 혼란으로 이끌고 가겠다고 하질 않나...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다.

 

카다피가 가장 분노했던 존재는 바로 ‘방송’이었다. 아랍권 최대 방송사였던 알 자지라가 재스민 혁명을 부채질했다는 것에 분노했고, 여기에 발맞춰 아랍의 봄을 미화하고 부추긴 서방 언론들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국과 유럽이 나서게 된다.

 

당시 상황은 카다피에게 낙관적(?)이었다. 초반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어선 카다피는 시위대(얼마 안되어 시민군이 됐다)에 대한 무력 진압을 선택하게 됐고, 어느새 시민군으로 변한 이들을 무차별 학살하게 된다. 당시 리비아군의 숫자는 5만 명이 채 안됐지만, 그래도 ‘정규군’이었다. 기계화 장비가 있었고 편제가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공군’이 있었다.

 

하늘도 카다피를 버리진 않았다. 3월 11일 쓰나미가 일본을 덮쳤다. 전 세계 이목은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할지 말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카다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활용하겠다고 결심했다. 전 세계 이목이 일본에 쏠려 있는 그때 시민군을 몰아세우고, 내전을 종식 시키겠다는 거였다.

 

이때 미국과 유럽이 들고일어나게 된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캐나다, 덴마크 등등이 힘 모아 뜻 모아 카다피를 공격한 거였다.

 

‘오디세이 새벽 작전(Odyssey Dawn)’이 시작됐다. 리비아 정규군은 미국과 나토 연합군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 무너졌다. 얼마간을 더 버티다가 결국 수도 트리폴리가 시민군의 손에 떨어졌다. 카다피는 나토군의 공습을 피해 2~3일에 한 번씩 자리를 옮기며 암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카다피는 프랑스 라팔 전폭기의 폭격과 미국 무인기의 공습에 친위대와 호송 차량을 모두 잃고, 그 스스로도 부상을 당한다. 이때 시위대들이 카다피를 낚아챈다(시위대가 그를 권총으로 쐈다는 설과 폭격으로 입은 부상이 악화돼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다).

 

불과 5년 전 핵을 포기한 대가였다.

 

김성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리비아식 해법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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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식 해법이 아닌 다른 해법은 자유한국당이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김정은이 이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김성태의 발언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문재인 정부의 협상력을 높여주기 위해 한국 내에서도 ‘의심’의 목소리가 있고,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봤지만, 이런 식의 접근이 통용되는 상황이 아니다. 진짜 협상력을 높여주려면,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야당도 담보해 준다는 초당적인 지지일 것이다. 북한에게는 10.4 공동성명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남한의 정치체제는 여당이 야당이 되고, 야당이 여당이 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정책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만약 자유 한국당이 집권한다면 어떻게 될까? 김성태의 주장이 현실화된다는 의미다. 그 말은 즉, 김정은의 목을 따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정책을 실행하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다른 해법은 없을까? 카다피의 몰락 이후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우크라이나였다.

 

1991년 12월 26일 갑작스런 소련 연방의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얼떨결에 세계 3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이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176개의 핵미사일과 1,800여 기의 핵탄두가 있었다(같이 독립한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시에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핵탄두가 있었다). 순식간에 세계 3, 4, 5위의 핵전력을 구축한 신생 독립국. 이때 순진한(?) 카자흐스탄과 벨라루시는 자진 반납의 길을 걸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우리가 소련에게 짓밟힌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크라이나는 1922년 소련에게 강제 합병된 아픈 기억이 있었다. 문제는 이게 소련과 우크라이나만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점이었다. 체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신생 독립국. 핵기술, 핵무기 유지에 대한 인력이나 관리 체제, 심지어 ‘돈’도 없었던 우크라이나에게 1800여 개의 핵탄두를 쥐여준다는 건 인류의 멸망을 재촉하는 길이란 ‘공통된 인식’이 유럽과 미국의 가슴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1986년에 있었던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유럽은 한바탕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가난한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누군가’에게 팔아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농담이 아니라 예견된 현실이다. 독립 직후 가진 건 ‘무기’밖에 없었던 가난한 우크라이나는 자신이 가진 풍부한 ‘무기’들을 제3세계를 비롯해 무기가 필요한 모든 국가에 팔아넘겼다. 소련으로부터 분리독립하던 시절 핵무기 말고도 90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현역용 장비, 물자와 100만 명 이상을 무장시킬 수 있는 전략 예비 물자가 우크라이나에 배치돼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건 우크라이나 정부의 소유물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는 이걸 유지할 돈도, 인력도 없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순식간에 세계 최대의 ‘AK-47' 수출국이 됐다)

 

결국 1994년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대 핵보유국이 부다페스트에서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안전을 보장해 주고, 덤으로 4억 6000만 달러의 경제지원을 약속받았다(5억 불도 안되는 돈에 핵무기 1,800기를 다 넘긴 거였다).

 

우크라이나는 가지고 있던 핵무기를 전량 러시아에 넘겼고, 얼떨결에(!?) NPT(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게 된다. 당시 미국, 영국은 우크라이나의 등을 토닥이며,

 

“너희들이 러시아로부터 핵위협을 받으면, 우리가 너희를 지켜주겠다.”

 

라고 약속했지만 20년 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로 진격했고, 부다페스트에서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고 나섰던 나머지 네 나라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비핵화의 모범사례라며, 우크라이나 사례를 북한에 적용하자고 나선 전문가들을 뻘쭘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리비아식, 우크라이나식 해법은 답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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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즉, 김정은에게

 

“네 목을 따겠다.”

 

라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