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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기억은 한 장의 사진처럼 얇다. 무심하고 가볍기 쉽다. 그 평면의 이미지가 비롯한 세계는 사실 깊고 높은 3차원의 형태이며, 시간이 더해진 4차원에서 변화무쌍하다. 

 

"판타레이", 만물은 유전한다는 그리스의 격언처럼 변해가는 세계의 세월을 견디며 그대로 있기란 좀체 쉬운 일이 아니다.

 

 

 

1.

 

불교의 경전 "숫타니파타" 중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

 

이 이야기도 그렇다.

 

'일본의 어느 연못에서 2천 년 전의 연꽃 씨가 발견되었고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생명은 신비로워서 꽃을 피워냈다'라는 내용이다. 흔한 일은 아니고 생각해 봐도 여전히 낯설고 누가 지어냈다고 해도 검증하기 어렵고 무엇보다 말로 들으면 참 쉽다.

 

"아, 연꽃 씨는 원래 오래 사나 보다."

 

그 정도. 이 기억도 역시나 깊고 높으며 변화무쌍한 세계의 한 단면이다.

 

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군부의 총력전에 동경의 사람들은 곤궁했다. 그것은 땔감에 있어서도 그랬다. 숟가락 하나까지 녹여서 전쟁에 쏟아붓는 마당에 뭔가 태울만한 것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했다. 치바현 어느 습지대에 있던 '이탄'에 눈길이 갔다.

 

이탄이란 생성된 지 오래되지 않은 석탄의 일종이다. 수분이 90%로 탄화도 덜 되어 열량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땔감으로의 가치는 높지 않았으나 때가 때인지라 눈길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1947년에도 채취는 계속되고 있었고 어느 날 작업자가 이탄 속에서 통나무배와 몇 개의 노를 발견했다.

 

원래 화석 연료인 이탄은 유기물이 완전히 탄화되지 않은 퇴적물이라 간혹 사료적 가치를 가진 물건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1949년 동양대학의 고고학 연구소가 47년의 기억을 이어붙여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때는 몇 척의 통나무배를 추가로 발견한 것 외에 연꽃의 꽃받침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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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관동학원대학의 비상근 강사이자 식물학자로서 연꽃의 권위자인 오오가 이치로에게 이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각각 다른 나무에서 잘라낸 토막들의 모임 같은 이야기였다. 애시당초 식물학과 관련도 없는 제국주의와 전쟁, 궁핍, 유물, 고고학이 연꽃 받침 하나에 살짝 실처럼 이어져 있을 뿐. 연꽃의 권위자라 해도 광활한 습지대에 뛰어들어 단기필마로 꽃을 피울 수는 없다. 애당초 진흙더미에서 연꽃 받침 하나 나왔다고 왜 연꽃학자에게 연락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세상은 그런 일들로 가득하다.

 

일본답게 조직이 생겨났다. 1951년, 오오가 이치로는 인근의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및 일반인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무리를 이끌고 늪으로 들어갔다. 1951년 3월 3일부터 4월 6일까지 35일간 늪지대에서의 삽질이 아무런 기약 없이 시작되었다.

 

뻘짓이었다. 그것도 말 그대로 뻘밭에서의 뻘짓이 여러 날 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서 할 수 있다는 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쓸데없는 말이지만 별다른 성과도 기약도 없는 일에 매달리는 학생들을 상상하고 있으면, 일본적 집단주의 성향이 있다는 반지성적 주장조차 조심스럽게 믿게 될 정도이다.

 

뻘짓을 마치고 돌아가는 밤하늘에는 아래로 볼록한 하현달이 떠 있었다. 며칠이 되자 그믐달이 되었고, 가득 차오르나 싶었지만 다시 거짓말처럼 절반이 푹 꺼졌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약 올리는 하현달이 떠오를 채비를 하던 28일째의 저녁, 오오가 일당들은 땅을 6미터나 파 내려간 상태였고, 화원중학교 학생 하나가 드디어 연꽃 씨 하나를 찾아냈다. 예정 기한을 훌쩍 넘긴 4월 6일 두 개의 씨앗이 더 나왔다. 늪지대를 사람 네댓 명의 키만큼 파내서 찾아낸 것이 결국 세 개의 연꽃 씨앗이었다(연꽃 씨만 나온 게 더 놀라울 지경이다).

 

오오가 이치로는 같은 해 5월 6일, 자택에서 참을성 없는 불량 자원봉사자가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외쳤을 " 발아(종자에서 싹이 튼다는 말이다! 자원봉사자가 바란 것이 그것이었다!)" 시도한다. 거짓말처럼 그 세 개 중 단 하나에서 꽃을 피워내는 데 성공했고, 세계 최고의 꽃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친선 우호의 상징으로 종자가 계속 분양되어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재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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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천 년 전 연꽃 씨앗이 저절로 툭 튀어나와 싹이 쑤수숙 혼자 피어난, 그런 심드렁한 한 줄짜리 해외 토픽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다.

 

 

3.

 

남북정상회담을 하던 날, 우리가 오오가 이치로로 살았다면 마치 씨앗을 처음 찾아낸 1951년의 3월 30일 같은 날일 것이다.

 

아침부터 세상은 들떠 있었고 미세먼지가 자욱한 으레 똑같은 하늘빛도 결코 평소 같지 않았다. 시시각각 더해지는 뉴스는 온갖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이라고 놀랄 것이 없었지만, 또 익숙하고 기대했던 대로여서 좋은 것들은 그대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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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분계선의 작은 연석을 김정은 위원장은 손쉽게 넘어서 남으로 왔다. 김정은이 벤츠에서 내려 그 연석까지 걸어온 여러 걸음과 그 연석을 넘은 단 한 걸음의 의미는 왜 다른가? 봄날에 겨울잠에서 깨어나 그 장면을 본 개구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2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 다시 핀 오오가 연꽃잎과 다른 연꽃잎 위에 앉아 그 차이를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북으로 가볼 날은 언제냐며 너스레를 떨던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이끌고 함께 연석을 넘은 그 한 걸음의 의미 역시 개구리는 모른다.

 

개구리처럼 가만히 있으면 욕은 안 먹을 텐데, 어떤 사람들은 무단 월북이라며 국가보안법 운운하다 '연꽃 씨에서 싹트는' 소리를 들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떼쓰는 아이에게 여러 번 속은 엄마가 아이에게 다짐을 받듯 "원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라고 못 박았다. 회담은 분명 진일보했다. 그 진일보의 기준은 DJ와 노무현이 남긴 이정표다. 종전의 기한은 올해 안이다. 비핵화는 완전한 것으로 한다. 군사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오가 일당이 찾아낸 연꽃 씨앗 3개 중 2개는 죽어버렸다. 피어난 1개에서 나눈 종자들도 무수히 많은 숫자들이 죽었을 것이다. 조심스럽던 지난 회담이 시종일관 매끄러웠다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매끄러울 필요는 없다. 심지어 간혹 군사 충돌이 있을지라도 약속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의도적으로 의심을 퍼트리려는 자들을 용서할 필요도 없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제 절멸의 우려 없이 널리 퍼져나간 오오가 연꽃처럼 전 세계에 평화가 일반화될 것이다. 35일간 삽질을 멈추지 않은 그들처럼 다 같이 그 믿음을 이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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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 전 연꽃이 개화한 것 같이 우리는 감동한다. 지난 9년 더러운 시간을 보내며 우리는 두 전직 지도자가 세운 이정표가 다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참혹한 중세를 거친 유럽에도 중동에 남아있던 그리스의 문화가 르네상스의 씨앗이 된 것처럼, 진흙 속에 파묻힌 살아있는 연꽃 씨를 찾은 것처럼 두 지도자의 노력이 진흙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아 꽃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5월에 오오가가 자택에서 씨 발아하듯 북미회담에서 그 씨앗은 싹을 낼 것이다. 국제 사회는 친선의 의미로 치바시가 세계로 퍼트린 오오가 연꽃처럼 그 평화를 퍼 나를 것이다.

 

"군사분계선"은 선이다. 선이라는 개념은 길이만 있고 폭이 없다. 연석의 폭은 15cm쯤 되어 보이지만 인간의 조잡한 인식능력 탓에 그리해 놓았을 뿐이다. 군사 분계선의 폭의 값은 서술할 수 없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으면 그 선을 넘지 못한다. 0.000001나노미터도 되지 않지만 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35일을 기약 없이 찾아 헤맨 오오가 일당처럼, 지난 9년의 진흙탕을 더듬어 좋은 출발을 해낸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 참고 자료 >

 

치바현 오오가 연꽃 정보관 - 링크
 

위키피디아 "오오가 이치로" - 링크


위키피디아 "오오가 하스" - 링크

 

일본연학회 - 링크

 

오마이뉴스 "1400년만에 씨앗에서 피어난 전설의 연꽃 '오오가 하스'" -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