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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었던 1910년. 한반도에는 12개의 일본 민단(民團)이 생겨났다. 일본인들이 속속 넘어왔고 이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조선에 넘어온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유곽’을 만든 거였다. 이들의 대외적인 명분은 ‘고매’했다.

 

“민단(民團)의 운영 비용과 재정 확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과연 그럴까? 초창기 한반도로 넘어온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섹스’만큼 확실한 사업 아이템은 없었다. 당장 한반도로 밀고 들어온 주둔군들이 있고, 뒤이어 조선 땅에 철도를 닦을 조선 철도국 직원들이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한 ‘장사’만큼 확실한 사업 아이템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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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최초의 공창 지역으로 기록된 '신정 유곽'의 전경

 

이렇다 보니 일본인 민단이 구성된 지역을 중심으로 유곽들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최소 11개 이상의 유곽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조선 땅 여기저기에 일본식 집창촌의 ‘우수성’을 알리게 된다. 이때 당시(1910년 전후) 한반도에서 활약했던 일본 창녀의 숫자는 1천 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제 집창촌은 하나의 ‘산업’이 됐다. 단순히 몸을 파는 게 아니라 집창촌 주변의 땅과 건물과 같은 부대 시설, 창녀들이 사용하는 각종 옷과 생필품 등등이 움직이게 됐다. 집창촌은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갔다.

 

재미난 사실은 우리나라 집창촌은 우리나라 발전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우리가 지금 대도시라 부르는 많은 곳을 보자. 예를 들어 인천, 부산, 대구, 목포, 포항, 원산, 진해 등등의 도시들은 일본의 침략과 뒤이은 일본인들의 거주, 철도의 건설 등등에 의해 발전한 도시다. 여기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집창촌이다.

 

대구를 예로 들어보겠다.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 당시 대구의 인구는 3만 명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경부선이 깔리고, 대구역이 건설되는 시점에서부터 인구 유입이 시작된다. 그 결과 25년이 지난 1935년 대구 인구는 10만 명을 넘어섰고,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에는 20만 명을 넘어선다(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조선인들은 이전보다 2배 이상 늘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속도로 늘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대구의 유곽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철도 건설 노동자들이, 이후에는 철도 운영을 위한 철도회사 직원들을 주 고객으로 유곽은 발전했고, 그 흔적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다.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는 사회 간접 자본 투자 앞에서 돈은 넘쳐났고, 이를 손에 쥔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해결하는 데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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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대구역

 

이는 대구만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이 그렇다. 철도역이 건설된 곳(이 두 개의 조건은 하나로 합쳐진다)에는 집창촌이 발달됐고, 인구는 늘어났으며 지금까지 ‘대도시’의 면모를 자랑하게 된다. 새로운 도시의 탄생이다.

 

대전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원래 충청도의 전통 도시는 공주였다. 일설에 따르면, 공주에 역사를 지으려 했지만 공주의 유림들과 양반들이 들고일어났다고 한다.

 

“조상들의 선산이 묻혀 있는 이곳에 번잡하게 철마가 들고나게 할 수 없다!”

 

유림들의 거센 반대 앞에 역사 계획은 대전으로 옮겨지게 됐고(당시 대전은 허허벌판이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대전은 인구 150만의 광역시가 됐고, 공주는 인구 12만의 중소 도시로 전락하게 된다. 삼국 시절 백제의 수도이기도 했던 공주의 퇴락이다.

 

그렇다면, 대전에도 유곽이 있었을까? 당연히 있다. 철도가 처음 부설되던 시기 대전역에 등장했던 유곽은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철길을 따라 도시가 만들어지고, 유곽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때 만들어진 철도, 도시, 유곽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 덕분에 조선 시대 전통적인 도시들이 퇴락(?) 혹은 상대적으로 개발에서 소외됐다는 거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도시였던 공주, 안성, 상주 등등의 도시는 철길에서 소외됐고, 이 도시에는 유곽도 생기지 않았다. 덕분에 이들은 아직까지도 ‘전통적인’ 모습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발달된 철도를 따라 도시가 만들어지고, 유곽이 들어서면서 조선은 본격적으로 ‘집창촌’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문화적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기껏해야 주막에서 주모의 궁둥짝이나 두들기거나 색주가에서 삼패기생의 잡가에 맞춰 술추렴이나 하던 이들에게 ‘프로 창녀’의 등장은 신세계의 개막이었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일본식의 매매춘과 기업 형태를 갖춘 집창촌의 등장 앞에 조선의 토착(?) 매매춘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이들은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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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작은 위에서부터였다. 일제는 1908년 9월 ‘기생 단속령’과 ‘창기 단속령’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기생 또는 창기로 영업하는 자는 부모나 친족의 허락을 받아 관할 경찰서장에게 제출해 인가증을 받아야 하며 그만 둘 때에는 인가증을 반납해야 한다.

 

둘째, 경시청에 지정하는 시기에 조합과 규약을 정해서 인가를 받아야 한다.

 

1900년 발표한 ‘창기 단속 규칙’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내용이다. 일본 본토에서 만들어진 규칙을 조선의 사정에 맞춰 수정했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게 당시 일본 경시청이 조선의 창녀를 ‘기생’과 ‘창기’로 나눠 따로 관리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을 되도록 한자리에 모아 ‘집창촌’을 만든다는 정책 방향을 내놓게 된다.

 

우선 하나씩 설명해 보겠다. 일본이 기생과 창기로 나눠 단속을 하려 했던 건 조선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조선의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로 나눠져 계층 간의 차별이 심했다. 또한, 이들 사이에서도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었다.

 

일패의 경우 몸을 팔기는 하지만, 스스로 ‘예능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주변의 시선도 달랐다. 장악원(掌樂院)이라는 국가 공인 기생 양성소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텐프로나 연예인 스폰서 개념인 그녀들이었지만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했다. 반면 삼패기생들은 소위 말하는 창녀였다.

 

삼패기생들은 일패기생들이 부르는 노래는 부를 수 없었고(기껏해야 잡가 정도를 불렀다), 일패기생들이 지나가면 길가에 비켜서서 고개를 숙일 정도로 그 위계질서가 엄격했다. 이는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사라졌음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전통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은 기생과 창기를 분리해서 바라봤던 거다.

 

이렇듯 일본식의 ‘매매춘’과 시대의 도도한 흐름, 거기에 정부의 개입 앞에서 기생과 창기들도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먼저 움직인 건 ‘삼패기생’이었다. 단속령이 나오자마자 이들은 서울에 흩어져 있던 창녀들을 모아 ‘경성유녀조합’이란 걸 만든다(후에 경성유녀조합은 신창조합으로 이름을 바꾼다).

 

삼패들이 움직이자 일패들도 움직였다.

 

평양 기생들이 모여 다동조합을, 관기 출신들이 모인 광교기생조합이 등장한다. 이들은 일본이 들여온 ‘선진 매매춘’ 방식을 도입했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영업 방식을 재빠르게 수용한다. 후에 이들은 그 유명한 ‘권번(券番)’으로 이름을 바꿔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 기생의 우수성(?)을 자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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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적인 기생을 길러내던 교육 기관이자 기생 조합이었던 '권번'

 

이렇듯 권번이 만들어지자 지방에 있던 기생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와 그 숫자가 폭증하게 된다. 공급이 이렇게 늘어났다는 건, 그만큼 수요가 뒷받침해 줬다는 의미인데... 당시 기생들은 요릿집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영업’을 뛰게 된다.

 

1970년대 한국 정치를 ‘요정정치’라 부르는 이들이 많다(실제로 그렇게 살았으니 이런 말이 나왔을 거다). 이 요정의 시초가 이렇게 시작된 거다.

 

기생들은 요릿집에 고용돼 손님들 앞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손님들은 춤과 노래에 더해 기생들의 몸까지 살 수 있게 됐다.

 

이때 기생들이 모였던 대표적인 동네가 바로 청진동이다. 조선시대 관청과 돈 많은 중인들이 모여 있던 이곳은 기생들이 활동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오늘날로 치면 테헤란로라 보면 된다). 권번과 요릿집이 하나 둘 들어서게 되면서 하나의 군락을 이루게 됐고, 청진동은 기생들의 동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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