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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꽃그림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두 가지 그림을 그려봤었다. 하나는 뭉크의 ‘절규’였고, 나머지 하나는 ‘꽃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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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의 시나리오는 간단하다.

 

첫째. 북한은 실제론 핵 포기에 대한 의지가 없다. 다만, 조여 오는 대북제재를 피하기 위해 시간벌기용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둘째. 이 경우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간차를 두고 예전과 같은 반복. 합의 도출, 뒤이은 ‘실행’과 ‘검증’ 과정에서의 파기가 반복될 거다.

 

셋째. 이 경우 미국은 강경 입장으로 돌변한다. 북한은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아울러 국제적인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고, 핵 협상은 완전히 물 건너 가게 된다.

 

이 시나리오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건 북한이 협상에 나선 동기가 약하다는 거다. 대북제재와 전쟁 위협 때문에 협상에 나섰다는 건 수긍이 간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벌기로 뭘 할 수 있을까? 자유 한국당 주장처럼 북핵 고도화에 나선다? 북핵을 고도화하고, ICBM을 실전 배치하고, 미국에 위협을 가할 정도의 시간벌기다? 이미, 핵을 가지고 있고 이 핵을 투발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 굳이 대륙간 탄도탄? 바로 옆에 일본이 있다.

 

시간 벌기용으로 협상에 나왔다는 건... 김정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게 된다. 북한을 ‘정상국가’로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명처럼 보인 지난 몇 달간의 행보가 연극이라면,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시간"

 

이란 주장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시간을 벌어서 할 수 있는 건 ‘전쟁위협’ 밖에 없다. 자유 한국당 주장처럼 고도화된 핵무기를 가지고 미국을 협박하고, 국제 정치판에 위협을 가한다? 개인적으론 납득하기 어렵다. 북한의 핵무기가 분명 위협적이긴 하지만, 미국을 공격할 정도일까? 북한이 정말 공격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포자기 상황에 빠졌을 때이다.

 

물론, 당장의 제재국면을 피한 뒤 국제 정세가 호전되기를 기대한다는 바람이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게 남한의 정치 체제다. 지난 10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경험한 게 북한이다.

 

문재인만한 대화 파트너를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다(문재인 대통령의 개인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일단 ‘말’을 들어주고, 상식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북한을 흡수 통일하겠다는 망상을 일찌감치 박살 낸 인물이다). 대화를 시작한 이상, 모양새 좋게(최소한의 명분을 가지고) 깽판을 치는 방법이라면 모를까 쉽게 들어 엎을 순 없다. 문제는 회담을 들어 엎는 순간, 북한은 이제 다시는 신뢰 회복을 하기 어렵게 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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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클린턴 정부 1기 때 보여준 ‘벼랑 끝 전술’과 막장 외교 짓 덕분에 부시 행정부의 무시, 뒤이은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를 경험해야 했다. 혹자는 이 기간 동안 북한이 핵을 개발하고 고도화 시켰으니 북한에게 이득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예 ‘대화’를 하지 못하고 압박만 받아온 암담한 결과는 어찌할까?

 

북한에게 있어서 ‘핵무기’는 양날의 검이다. 핵 자체로 자신의 체제를 지키고, 국가방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 반대급부로 전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가 됐고, 엄청난 대외 압력과 경제적 제재를 받았다. 이렇게 되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를 생각하게 된다.

 

핵무기‘만’을 들고 있게 된다. 결과는 계속된 고립이다. 현상 유지를 최대 목표로 생각한다면, 이 역시도 인정하겠지만 북한 경제는 이미 장마당 경제가 전체 GDP의 1/3을 차지하는 상황이 됐다. 그 성장은 한계에 다다를 것이고, 북한은 사회 내부적인 압력을 받을 거다.

 

아니면, 정말로 ‘전쟁’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 물론, 북한이 전쟁을 꿈꿀 수는 있다. 그러나 재래식 전력으로의 전쟁은 불가능하고, 거의 자포자기식의 ‘일발 역전’밖에 희망이 없다. 모든 전쟁의 핵심인 보급과 병력의 유지, 통신... 이 기초적인 요소마저 충족시킬 수 없는 군대에 전쟁을 바란다는 건 무리다.

 

(정치 장교와 1천 명 단위가 넘어가는 수많은 장군들. 체제 수호를 위해서 최정예 병력을 후방인 평양에 빼돌린 ‘노골적인 모습’. 경제제재로 인한 훈련 및 장비 유지의 어려움. 부실한 사회 간접 자본에 인한 수송의 어려움 등등 북한군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이들이 우리의 ‘주적’이고,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우리가 이긴다. 그것도 확실히 말이다)

 

북한은 일찌감치 비대칭 전력으로 자신의 전력 구조를 개편했고, 그 핵심이 핵이다. 다시 말하지만, 핵은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보유’하는 무기다. 핵을 사용하는 순간은 곧 북한이 국가로서의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란 의미다. 북한이 이런 ‘위협’을 안고 핵을 사용할까? 결국 이들은 핵을 끌어안고 말라죽는 것과 핵을 내려놓고 맞아 죽는 것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비관적인 시나리오로 보자면).

 

지금 북한은 살만해졌다.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고, 더 발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핵은 분명 자신의 발전에 발목을 잡을 게 뻔하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미국과 대척점에 서고 제대로 ‘생활’할 수 있는 국가가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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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꽃그림은 뭘까?

 

평창올림픽 때부터 대북 특사, 이어지는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풍계리 핵 실험장의 폐쇄와 대륙간 탄도탄 실험의 유보. 이 모든 진행 상황을 보고 개인적으로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김정은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빚을 갚고 있다.

 

둘째. 북한이 자신들의 로드맵을 가지고 있다(적어도 겉으로는).

 

첫 번째 결론은 간단하다. 김정은의 선대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보여준 ‘막장 짓’의 뒤치다꺼리다. 쉽게 말해 ‘신뢰 회복’이다.

 

이제까지 보여준 북한이란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못 믿을 나라’다. 이런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은 자신들의 카드를 하나 던졌다. 바로 ‘미래의 핵’의 반절이다. 풍계리 자체의 지반이나 이제까지의 흉흉한 소문들을 종합해 보면, 풍계리는 이제 그 효용이 다 됐을지도 모른다. 지반 자체가 약해 전체 산이 붕괴 위험에 처해 있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다. 계속된 핵실험으로 자연 지진도 이어지고 있다. 인근 주민들에게는 ‘귀신병’이라 불리는 방사능 유출 의심 신호까지 잡히고 있다.

 

이미 6번의 핵 실험으로 자신들이 핵 보유국 지위에 앉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검증을 마친 상태이기에 더 이상의 핵실험은 무의미하다는 판단도 있을 것이다(당분간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카드로 잘 써먹을 수 있는 ‘미래의 핵’ 일부를 넘겼다.

 

대외적으로 신뢰를 말하면서, 한 편으론 ‘핵동결’에 대한 포석도 깔았다. 이제까지 핵 포기 이행과정에서 보여준 ‘실행’과 ‘검증’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신뢰 조치를 보여주고 있다. 북한이 ‘의지’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정치적으론 말이다)여기에 주한미군 주둔은 아버지가 말한 거였고, IAEA의 사찰만 받는다면 협상 테이블에서 카운터 파트너로 대우받을 수 있는 ‘판돈’은 마련하게 된다.

 

둘째는 북한의 로드맵인데... 북한은 이제까지 끈질기게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되고, 북미수교를 통해 정상 국가로 돌아가길 원했다.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고 나서 북한은 말 그대로 고립된 섬으로 살아왔다.

 

이걸 타파하는 게 북한 정권의 목표였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만나고, 북미 수교 직전까지 갔던 상황이 북한으로서는 ‘한’으로 남았다. 테러 지원국이란 꼬리표는 북한이 세계로 나가는 데 가장 큰 족쇄가 됐다. 이제 북한은 이 족쇄를 벗고, 정상 국가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이건 북한 외교의 숙원사업이다).

 

문제는 이렇게 정상 국가가 되려는 이유다. 김일성이 말했던 ‘이밥에 고깃국’과 김정은이 말하는 ‘사회주의 지상 낙원’을 만들려는 걸까? 지금 상황에선 아무도 모른다. 김정은이 이미 마음속에 그 로드맵을 짜놓고 있을 테고 실행할 방법론도 구상하고 있겠지만, 현 단계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목표를 예측하긴 어렵다.

 

가장 모범적인 답안은 중국식 개혁 개방 경제다.

 

북한이 이런 움직임을 보인 건 몇 번이나 된다. 2000년 초반에 나진-선봉 경제특구를 만들었다가 중국의 압박 때문에 지지부진했던 경우가 있다.

 

김정일은 살아 있을 때 세 번이나(2006년, 2010년, 2011년) 중국을 방문해 경제특구의 현장을 살펴봤다. 김정일은 중국식 모델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걸 시도했다가는 북한의 정치체제 즉, 김씨 왕조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그를 머뭇거리게 했을 것이란 추측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아들은 달랐다. 이미, 북한의 경제특구는 19군데가 넘게 지정됐다. 목적은 외자유치를 통한 경제 발전이 목표다. 그러나 지금 현재 경제특구를 움직이는 건, 북한의 새로운 경제 세력인 ‘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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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언론을 통해 국내에도 많이 소개된 ‘돈주’는 한마디로 북한판 부유층, 기업가, 사채업자라 할 수 있다. 2002년 있었던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공장과 기업소의 자율성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후 돈주들은 지방 공장을 명의 임대 형식으로 확보하게 된다.

 

김정은의 집권 이후 돈주들의 활동은 더욱더 두드러졌다. 김정은은 공장, 기업소의 경영자율권을 더욱 확대했고(거의 독립채산제 형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주들은 원료의 조달과 제조, 판매, 대외무역(수출과 수입)까지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됐다.

 

이들은 광물업은(탄광을 직접 운영하는데, 그 수가 100여 개를 넘어섰다) 물론 사채업까지 뛰어들었고 부동산 투기까지 하게 된다.

 

(북한에서는 아파트 건설 허가증에 해당하는 ‘건설 명시’를 돈을 주고 거래를 하게 됐다)

 

이들 돈주들은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김정은을 위해 충성 경쟁을 하게 된다. 언제 자신들의 돈을 빼앗아 갈지, 전전긍긍한다. 경제제재 속에서도 4% 가까운 경제성장을 보여주는 이면에는 바로 이 돈주들의 활약이 있었다. 김정은은 이들의 이권을 보장해 주고, 돈주들은 김정은과 노동당에 충성을 맹세한다(덤으로 뇌물도 주고). 이 돈주들이 투자한 곳이 바로 경제특구다.

 

이미 북한은 초기 자본주의 형태를 넘어서 중국식 개혁 개방의 초창기 모습으로 변모해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채가 웬 말이며, 아파트 건설 허가증 매매가 무슨 말인가?

 

조선시대 숙종 시절 나라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장사치’들을 어떻게 관리할까였다. 이앙법으로 생산력은 폭발하는데, 일자리는 줄어드는 상황.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린 이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장사에 뛰어들었다. 시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고, 사람들은 장사를 하면 돈이 된다는 생각에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좌판을 여는 게 흔한 모습이었다.

 

한 번 장사의 맛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벌기 위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원시 자본주의의 시작이다. 북한에 이제 새로운 물결이 불고 있는 거다.

 

이 상황에서 ‘역진(逆進)’은 상당히 어려운 일일 거다. 아니, 김정은의 생각 자체가 되돌린다는 선택지에는 없을 거다. 되돌릴 수도 없겠거니와 되돌릴 이유도 없다. 김정은은 체제 유지를 위해 현 상태를 통제하며 점진적으로 발전을 모색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중국식 개혁 개방의 북한 버전이 된다.

 

만약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생각한다면, 테러 지원국 꼬리표는 떼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북한을 지켜왔던 핵을 포기해야 한다.

 

북한이 핵 협상에서 최상의 결과로 생각하는 건 ‘핵 동결’이다. 과거의 핵과 미래의 핵을 팔아버리고, 현재의 핵으로 체제 보장을 한다는 거다. 테러 지원국 꼬리표를 떼고, 본격적인 개혁 개방에 나서는 거다. 그러기 위한 수순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이 평화협정을 기반으로 한 북미수교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자는 건 1970년대 이후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한 사안이다. 이는 정치적 맥락에서 해석해 봐야 하는데, 한국 내 UN군 사령부는 ‘교전 당사자’이므로 정전협정의 효력이 사라지고 나면 UN군의 존재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미군이 주축이 된 UN군 주둔의 법적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 이건 어디까지나 북한이 ‘정치 공세’를 할 때의 논리다. 만약 북한이 주한미군의 주둔을 허용한다면... 이미 허용했지만. 이걸 정치적으로 확실히 못을 박는다면, 평화협정은 ‘정치 싸움’을 위한 협정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북미 간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평화 체제의 틀로 인식할 수 있다. 덤으로 우리나라 보수 정치권에서 나오는 ‘통미봉남’ 논란도 잠재울 수 있다)

 

여기서 걸리는 게 ‘핵 무기 폐기’다. 북한은 경제 발전을 위해 핵무기를 포기할 순 있지만, 이는 스스로 갑옷을 벗는 행위다. 이 불안감을 누그러 뜨려 줄 수 있는 게 중국과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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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반도 체제의 현상 유지를 원한다(한반도 당사국을 포함 주변 4강이 모두 그걸 바란다). 북한 체제의 유지를 원한다는 의미다(다만, 그 권력 형태는 중국식의 집단 지도 체제로 바뀌길 내심 바라지만). 중국이 북한의 현 체제를 지지해 주고, 덤으로 김정은이 사고를 안 친다면?

 

그래도 이건 가역적인 ‘약속’의 범위 안이다. 여기에 하나 더 걸 수 있는 게 ‘서울’이다. 남한 인구의 50%와 경제력의 70%를 가진 서울을 실질적인 ‘타격권’ 안에 쥐고 있다는 것.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리비아와 우크라이나가 가지지 못한 이점이다. 불안하겠지만 강점인 건 분명하고 비가역적인 부분이다.

 

여기에 강화된 안전 보장책 하나만 더 있다면, 북한은 움직일 수 있을 거다(물론, 언제나 그랬듯 다자안보 보장 체제는 만들어지겠지만... 이게 북한의 체제 보장 즉,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100% 다 보장해 주는 게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위험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고,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달았다는 신호가 갔다는 거다.

 

이것이... 내가 그린 꽃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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