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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이 없어도 많이 없지만, 지금은 감옥에 계시는 503호의 모친께서 그 부친을 만나 결혼할 때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학같이 우아한 이미지를 가지셨으나 몇 년 전 김종필 전 총리의 폭로(?)로 뜻밖의 일면이 드러났던 그분께서는 작달막하고 가무잡잡한, 가진 건 없으면서 나이는 많고 심지어 결혼 경력도 있는 육군 장교 박정희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로 '뒷모습'을 들었다. 뒷모습이 정직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 안목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논외로 하고.

 

방송가에도 유명한 '뒷모습' 전설이 있다. 어느 똘망똘망한 서브 작가가 들어왔다. 야무지기 이를 데 없던 그녀는 "명령만 내리십시오!" 하는 정신(?)으로 그득하여 시키는 일마다 척척해치워 선배들의 격찬을 샀다고 한다. 하루는 PD가 슈퍼스타 아무개(조용필이었다고도 하고 안성기였다고도 한다)를 섭외했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했는데, "그럼 섭외해 보겠습니다!"를 외쳤다고 한다.

 

전화를 계속 돌리다가 당연히 퇴짜를 받은 그녀는 어찌어찌 해당 슈퍼스타의 출연 일정을 알아내 직접 그 앞에 뛰어들어 섭외를 하기로 결심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방송 끝내고 나오는 슈퍼스타 앞을 실제 기습적으로 막아서서 섭외 멘트를 읊었으나, 꼬마 작가는 매니저에게 끌려 나가다시피 그 앞을 틔워 줄 수밖에 없었다 너무 간절한 호소를 듣다 못한 슈퍼스타 본인이 나서 "도저히 스케줄이 안되겠네요. 미안해요."라고 대답을 한 게 그나마 그녀가 얻은 성과였다.

 

세상의 모진 벽에 처음 부딪쳐 본 당돌한 꼬마 작가는 "네. 알겠습니다!"하고 돌아섰으나 실패의 쓴 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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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북받쳤고 이를 악물었으나 눈물이 쏟아지고 어깨가 들먹거리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방송사 로비에서 방성통곡을 할 수는 없는 노릇. 화장실에라도 가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그 슈퍼스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님 무슨 프로그램이라고 했어요? 화요일 몇 시?"

 

슈퍼스타의 마음을 움직인 건 작가의 뒷모습이라고 했다.

 

"고개 숙이고 터덜터덜 걷는데, 어깨가 들먹거리고 머리가 뒤척이는 게 어찌나 불쌍해 보이는지. 아니, 섭외하다가 실패할 수도 있는 건데 그 뒷모습 보니까 목숨 걸고 섭외했구나 하는 게 느껴지더라니까."

 

때로 사람은 뒷모습으로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오히려 '얼굴 보고' 얘기할 때보다 더 큰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 1962년 퓰리처상을 받은 폴 베티스의 <심각한 대화>는 그 좋은 예다. 그 해 1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케네디는 CIA가 부득부득 해야 한다고 우기는 작전 하나를 승인한다. 바로 CIA가 훈련시킨 쿠바인들을 쿠바에 상륙시켜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피그만 상륙 작전이었다.

 

대통령 취임 석 달도 안돼 감행된 피그만 작전은 참혹하게 실패했고, 케네디는 CIA 해체를 검토할 만큼 분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피그만 사태 며칠 뒤 케네디는 전 대통령이자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를 방문하여 고견을 듣는다. 아이젠하워의 손자 이름을 따 명명된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였다.

 

두 전현직 대통령이 포즈를 취할 때 수백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카메라 촬영 후 둘은 밀담을 나눌 캠프 데이비드의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는데, 그 뒷모습을 AP 통신의 폴 배티스가 홀로 카메라에 담았다. 제목은,

 

<심각한 걸음 -serious st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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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연소 후임 대통령은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고, 뒷짐을 진 전쟁 영웅 출신의 전직 대통령은 뒷짐을 진 채 진중하게 듣고 있는 느낌이다. 완숙한 지혜와 푸르나 무르익지 못한 패기가 함께 어우러진다고나 할까. 둘 다 고개를 세우지 않고 땅을 보고 걷는다. 걸음은 결코 빠르지 않다. 결단의 무게를 느껴 본 권력자들의 겸손함이라고나 할까. 이 뒷모습은 수백 명의 기자가 찍은 둘의 앞모습보다 백만 배 더 많은 상상과 울림을 남긴다. 폴 배티스 기자가 퓰리처상을 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뒷모습이 역사에 남게 됐다. 그날 사무실 TV에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와~"하는 탄성이 터졌다. 계단을 조금 불안하게(1984년생이 왜 이렇게 숨이 가쁜지) 내려와 그 특유의 걸음걸이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올 때의 설렘을 거쳐 손을 맞잡았을 때는 박수가 쏟아졌다. 약간의 대화를 나눈 뒤 김정은 위원장의 손이 경계선 너머 북쪽을 가리키고, 잠시의 주저함 뒤 둘이 손을 꼭 붙잡고 고무줄뛰기 하듯 경계선을 넘은 순간 또 다른 의미의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저렇게 폴짝(?) 넘을 수 있는 경계가 대체 무엇이관대 근 70년 동안 넘으면 총알밥이 될 수 있고, 넘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수렁이 돼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전혀 연출된 것 같지 않은 '애드립'의 신선함에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저 순간 두 정상의 표정이었다. 활짝 웃고 있었을까. 사뭇 진지했을까. 저 발을 뗄 때와 디딜 때 얼굴은 어떻게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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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개인적 선호도는 마이너스였고, 지금도 플러스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공화국을 빙자한 왕국의 절대 군주로서 그 형과 고모부를 죽여 버리고 잔인한 숙청을 단행한 그의 비정함은 잊지 않고 있거니와, 그의 핵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전쟁의 공포는 그에게 호감을 붙일 엄두조차 내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손을 잡고 경계석을 넘는 이 어정쩡한 거구의 뒷모습 하나로 맘속 응어리가 꽤 큰 폭으로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했던 것만큼 생각이 없는 이는 아니로구나. 보아왔던 것만큼 볼 것이 없는 사내도 아니로구나.'라는 느낌을 그 뒷모습에서 받았다고나 할까. 퉁퉁한 앞모습에서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친밀감을 뒷모습을 통해 습득했다고나 할까.

 

두 정상의 약속이 반드시 현실로 이어지고, 나아가 미국과의 대화에서도 힘을 받아 궁극적인 한반도 평화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넘기 힘들다면 넘기 힘든 벽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또 막상 넘자고 들면 저 둔중한 김정은 위원장도 그리 숨 가쁘지 않고 폴짝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분단의 벽일 터이다. 부디 평화하라. 이 나라 이 반도여.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고 죄악으로부터 해방되어라.